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24화 (124/175)

124 암살 대상 (1)

1.

태성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3위의 대기업 집단이다.

당연히 보유한 정보 자산은 상당하면, 어떤 부분에선 국정원보다도 더 나은 수준의 정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들 또한 최근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가 러시아와 중국에서 보인 모습들을 포착할 수 있었고, 구태여 강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박동진과 연루된 가오웨이캉의 정치적 위기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더 자극해봤자, 좋을 건 없어.”

3월 21일 목요일 저녁 6시 30분.

한소영의 경호실장 자격이 아닌, 거목그룹과 일신그룹의 비자금 관리인 자격으로 강철은 박태화 앞에 섰다.

“그건 자네도 잘 알 것 아닌가?”

한층 편안해진 모습으로 박태화는 강철을 맞이했다.

“적당히 그쪽에다가는 선물을 보내뒀으니까, 그 양반도 가만히 있겠지.”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솔직하게 탁 깨 놓고 이야기하지. 우리야 우리 나름의 정보 자산이 있어서 알 수 있었지만, 자네는 어떻게 알아냈나?”

박태화의 물음에 강철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원론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사이버 보안과 중국 정계에 관한 업무는 제 소관이 아닙니다.”

“허허허허!”

박태화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 소관은 국내 정관계입니다. 아시잖습니까, 회장님도?”

“허허허. 그렇지. 보통 비자금 총책은 국내를 우선적으로 관리하지 허허허. 해외는 또 거기 문화를 아는 사람이 관리해야 하거든. 허허허.”

실없이 계속해서 웃으면서 박태화는 강철을 가만히 스캔하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지?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나이는…… 겉보기로만 보면 동진이보단 어리고 정연이보단 많아 보이는데…….’

그런 박태화의 생각을 읽으며 강철은 태평하게 ‘피부 관리가 필요한 시기인가?’하는 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박태화의 의견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자신은 한소영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박태화 본인이 한소영의 뜻으로 알고 있는, 강철의 제안-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에 관한 전향적인 입장 표명을 수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아에 대산을 집어삼킨 주먹패에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의 비자금을 총괄하는 젊은 친구라……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야.’

박태화의 상념이 강철의 정체성에 관한 상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하자, 강철이 먼저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아드님 일은 덕분에 잘 해결이 됐으니, 이제 회장님께서 저희 제안을 수용해주실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만?”

강철의 말에 박태화의 상념은 멈추었다.

“아,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제 외교부 장관이랑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좀 했어.”

“뭐라고 합니까?”

“당연히 이 정권 차원에서야 남북 경협을 긍정하고 있고, 또 개성공단 이후로 이렇다 할 경협 업적이 없으니, 뭔가 하고는 싶어 하지.”

지난 진보 정권은 개성공단이라는, 남북 경협의 성과물을 만들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개성공단은 보수 정권 때에도 유지가 되며, 남북 협력의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대통령도 그런 상징적인 무언가를 하나 하고 싶어 하지 않겠어? 그러니 외교부 장관도 긍정은 하지. 긍정은 하는데…… 자네도 알지 않나? 지난달에 북한이 응? 쾅! 하고 응?”

3차 핵실험으로 인한 국제 제재 국면에서, 당분간은 전통적인 우방국-동맹인 미국과 준동맹인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과 함께 공조하겠다는 것이 기본적인 현 정부의 방침이었다.

정권이 변하더라도 바뀌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강철은 보수 정권이 아니라는 것에 착안점을 두고 접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재 국면은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현 정권도 지난 정권과의 차별성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거고, 그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북정책이 될 거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겠는데…….”

“회장님께서 청와대를 설득해 주십시오. 그럼 우리가 러시아 쪽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박태화가 흥미롭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러시아를 설득해 보겠다?”

“우리 대주주님이 러시아 정재계에 인맥이 좀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 대표. 암. 허허허.”

박태화는 그러면서 강철에게 짐짓 기습적인 한 방을 날린다는 투로 말했다.

“근데 이왕 대표를 만들 거면, 여자로 만들지 그랬나?”

박태화는 가볍게 한쪽 눈을 찡끗했다.

‘한심하긴.’

자기 딴에는,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실소유주가 한소영이고, 그러니 이왕이면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대표로 만들어두지 그랬냐, 하는 말이었지만, 강철에겐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단은 박태화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흐음…… 뭐 러시아에서 사업하기엔 남자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일단, 강철은 박태화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다.

‘중요한 건 사업이 진짜 진행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야. 이거로 나를 향한 푸틴의 의심을 거두는 게 중요한 거지.’

강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박태화가 그에게 말했다.

“이건 그냥 사적인 질문인데 말이야.”

“네?”

순간, 강철은 박태화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의 생각을 포착하곤 살짝 표정이 굳었다.

“자네 애인 있나?”

박태화는 강철에게 여자를 붙여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에 강철에 대한 정보 수집 차원이었다.

문제는 붙이려는 여자가 자기 딸이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년까진 군인 신분이라 대외적으로 활동이 힘들잖아. 그사이에 적당히 만나보면서 정보나 수집하라고 하는 거지. 겸사겸사, 애가 얼마나 일 처리가 확실한가도 확인해보고.’

강철은 하마터면 자기도 모르게 ‘미친.’이라는 말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자식들을 정략결혼용으로 쓰는 거야 흔하다지만, 딸을 미인계로 쓰려고 해? 그것도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는 딸을? 미친 거 아니야?’

강철은 표정을 가까스로 풀고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순간 박태화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그래?”

그러면서도 그는 여지를 남겼다.

“젊을 때 막 사귀어두고 해야 해. 나이 들면, 그것도 힘들어.”

강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2.

“그래서?”

목요일 밤 10시 50분.

한남동 한소영의 자택 안방.

강철은 원탁에 앉아 한소영에게 박태화와 만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응?”

“뭐라고 대답했어? 박 회장한테?”

“지금은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지.”

한소영의 물음은, 애인 있냐는 물음에 대한 강철의 대답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강철은 거기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한소영의 얼굴로 순간 실망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소영의 표정과 순간 품은 생각은, 강철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있다고 했다면, 내 뒷조사를 엄청나게 했을 거야. 그러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겠지. 아, 저 인간 한 회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구나.”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실망한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도 여자다 이건가?’

한소영도 강철의 말을 이해하곤 있었다.

그러나 심적으로 그녀는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강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대로 그녀를 공주안기로 의자에서 안아 올렸다.

“어머!”

돌발적인 행동에 한소영은 놀라긴 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아까보다 풀렸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당신과의 계약이 끝날 때까진, 애인은 안 만들 거니까.”

그 말에 한소영은 피식 웃었다.

“헛소리하지 마. 언제까지 나 같은 아줌마하고만 자려고?”

그러면서 그녀는 강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자기 앞길 막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자기를 통해 내 유전자를 복제하고 싶을 뿐이야.”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물론, 실제로 강철이 애인을 만든다면, 말과는 다른 감정을 품게 될 것이고, 그 감정이 다른 행동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터였다.

“하나 더 복제할까?”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강철은 평소보다 오버하며 그녀를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막, 침대에 그녀와 함께 누웠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강철과 한소영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강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원탁에 가 앉았고, 한소영도 후다닥 그 맞은편에 앉았다.

강철은 그대로 양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고개를 숙여 가신의 자세를 취했고, 한소영은 팔짱을 끼고 턱을 추켜세운 채 주인의 자세를 취했다.

“무슨 일이야?”

한소영의 물음에 문밖에 있던 가정부가 송구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이 자꾸 찾으셔서요.”

“음마-! 으마-!”

“민식이가?”

한소영은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손수 문을 열어주었고, 문을 열자마자 엄민식이 그녀에게 안겼다.

“에구구. 우리 왕자님, 잠이 안 와쪄요?”

한소영은 확연히 밝아진 표정으로 엄민식을 안고선 아이의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엄민식은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어댔다.

그리고 강철도, 자기도 모르게 엄민식을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바-! 아바-!”

엄민식도 한소영의 품에 안긴 채 강철을 바라보며 그렇게 불렀다.

“어머, 얘 좀 봐?”

한소영은 그런 엄민식의 모습에 살짝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정부보고 나가 있으라 손짓했다.

가정부는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닫고 안방에서 나갔다.

한소영은 엄민식을 안고 강철에게 다가왔다.

“아바-! 아바-!”

엄민식은 강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철은 그 조그만 손을 잡아주었다.

“민식이는 진짜 아빠가 누군지 아나 보네? 그래, 민식이 아빠야. 그 찌질한 변태랑은 다른, 진짜 남자란다.”

“어허-!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러면서 강철은 가만히 엄민식을 보고 생각했다.

‘나도 이해가 안 갔어.’

박태화가 자기 딸을 미인계의 도구로 삼아 강철의 뒷조사를 하고자 마음먹은 걸 알았을 때, 강철은 감정적으로 상당히 분노했다.

사실 분노할 일은 아니었다.

그저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을 뿐인 재벌 3세를 마약 중독자로 만들어 약 공급을 매개로 조종하고, 한 집안의 씨를 말렸으며, 가업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대산과 거목 그리고 일신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강철이 벌인 일에 비하면, 박태화가 하려는 일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어떤 측면에선 귀여운 음모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강철은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는 이제야 알게 됐다.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따위 생각을 한다는 건지…….’

점차 꾸벅꾸벅 조는 엄민식을 바라보며, 강철은 마음 한쪽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꿀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를 바꿨듯, 러시아의 역사를, 더 나아가 세계의, 인류의 역사를, 운명을?’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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