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해결사 (4)
6.
3월 11일 월요일 오전 9시.
종로구 태성그룹 본사.
30층 회장실에서, 박태화는 비서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최근에 러시아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알렉세이 밀레르 가스프롬 최고경영자까지도 인맥에 포섭이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철로부터 아들의 포르노 CD 원본을 대가로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에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달라는 청탁을 받은 직후, 박태화는 비서실에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동향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다.
곧 비서실은 미주 법인을 동원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극동개발탐사라는 러시아 기업의 대주주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러시아 쪽에까지 조사를 한 결과,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보고서가 박태화의 손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가스프롬?”
박태화는 비서의 입에서 나온 가스프롬이란 회사명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된 건가?’
박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서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비서는 박태화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 후 회장실을 나갔다.
박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전면 통유리 창가에 서서, 박태화는 태성그룹 본사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한 거목그룹과 일신그룹 본사를 바라보았다.
‘한소영이…… 이 여우 같은 인간…… 뒤에서 러시아 가스관 사업에까지 관여하려고 했단 말이지?’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은 태성 입장에선 계륵이었다.
정권 차원에서 늘 나오던 말 중 하나였고, 태성이 한국을 대표하는 에너지기업이었던 만큼 항상 파트너 회사로 지정이 됐다.
그러나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은 항상 정치적인 이유로 발목이 잡혔다.
거기다 그 사업을 통해 태성이 얻을 이득이, 아예 전무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목숨 걸고 달려들 만큼 큰 것도 아니었다.
반면 러시아 입장에선 할 수 있다면 무조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놈들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정치적 이득을 생각하고 움직이니까.’
에너지는 현대 러시아의 경제적 무기임과 동시에 정치적 무기였다.
러시아는 가스와 석유를 통해 국부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통해 자국의 소비자 국가에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한다.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도 표면적으론 러시아 천연자원을 동북아의 부국인 한국에 수월하게 팔기 위한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극동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정치적 의도가 있음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신그룹이나 거목그룹이 가스관 사업으로 이득을 볼 수도 있겠지. 어쨌건 우리 태성 혼자서 다 먹을 만한 규모도 아니고, 또 정부에서도 그것까진 바라지 않을 거니까.’
박태화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지, 아니야. 단순히 그런 게 아니야. 이것들…… 아예 러시아에서 뭔가 뽑아 먹을 거를 찾은 것일 수도 있어.’
박태화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확장돼 갔다.
‘한소영이가 러시아 정재계에 로비를 한다는 건, 그 국내에서 얻을 이익이 있으니 그러는 거겠지. 뭐지? 설마…… 가스관 사업이 성사되면 아예 그쪽에서 한국에 가스 판매 독점권 같은 거를 가진다, 이런 건가? 러시아가 그렇게 해주나? 아니지…… 그렇게 해주게 만들려고 지금 저러는 걸 수도 있겠네.’
한소영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실소유주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모든 가정은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박태화가 보기엔, 그럴듯했다.
‘그래, 나를 한 번 구해줬으니, 나도 한 번은 도와줘야지. 뭐 내가 손해 보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박태화는 폰을 꺼냈다.
그리곤 한소영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박 회장님. 어쩐 일이세요?]
상당히 밝고 명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한소영에게 박태화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한 회장, 이번 주에 시간 나면 나하고 점심이나 한 끼 하는 게 어때? 난 개인적으로 수요일이나 목요일 점심이 좋은 데 말이야.”
[수요일이나 목요일…… 아, 목요일이 괜찮겠네요. 일정 잡아둘게요.]
“그래, 그럼 그날 가야호텔에서 보자고. 하하하.”
통화를 끝내고, 박태화는 거목그룹 본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모두가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진출할 때, 러시아 시장을 개척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시그니엘그룹이나 현성그룹처럼 피똥을 쌀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는 이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흐하하하하-!”
7.
박태화가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꽁무니를 쫓던 동안, 강철은 열심히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며 중국 쪽에 다져놓기 시작한 인맥을 확장해 나갔다.
러시아인들과 문화는 확실히 달랐지만, 결국 중국인도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강철이 제공하는 달러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고, 또 마음의 문을 열면 강철을 한 식구처럼 대해주었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선 러시아인보다도 더 강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더 정겹기까지 했다.
그것을 강철은 인종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만나는 러시아인 상류층은 대부분이 슬라브계 백인이었고, 중국인은 동아시아계 황인이었으니까,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게 아닌가? 그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3월 15일 금요일 정오.
베이징 5성급 호텔 레스토랑 룸에서, 강철은 펑캉린과 독대하며 밥을 먹고 있었다.
“허허허. 자네가 친구를 만들어가는 속도가 우리의 경제 발전 속도만큼 빠른 것 같아. 허허허.”
“이게 다 부주석님 덕분입니다.”
“허허허, 겸양은 이 사람아. 나는 그저 다리를 놔 줬을 뿐이고, 그 사람들하고 친해진 건 다 자네 능력 아니겠는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펑캉린의 모습에 강철도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근데 말이야. 너무 아무나 다 만나고 다니면 안 돼.”
한 차례 칭찬 이후에, 펑캉린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강철에게 조언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다리를 놔 준 사람들은 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이 다리를 놔준 사람들까지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어. 자네도 사업을 해서 알겠지만, 급한 놈들이 어디에나 있지 않은가?”
“사실 그것 때문에 오늘 이렇게 부주석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그래?”
중국 쪽 인맥이 필요했던 이유는, 태성의 박태화를 구해주고 호의를 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만을 위함이었다면, 고위층 인맥 따윈 없어도 그만이었다.
강철이 고위층과 인맥을 다진 것은, 박태화를 구한 이후 후속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저도 조심하고는 있다지만, 어쨌건 최근에 사람을 많이 알게 된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근데…… 이제 부주석님도 정치를 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어느 나라나, 중국이건 러시아건 미국이건 일본이건, 지도자가 바뀔 때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펑캉린은 강철이 무엇을 말하려는 가를 깨닫곤 씩 웃었다.
“누가 새 지도부에 적대적인가를 알고 싶다, 이건가?”
강철은 숨기진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향후 10년을 이끌 새로운 지도부와 대립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펑캉린은 고개를 끄덕였지.
“현명한 선택이야, 암, 현명하고말고. 허허허.”
펑캉린은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오웨이캉. 이 친구랑 연관된 사람들은 좀 조심하는 게 좋아.”
강철은 펑캉린이 가장 먼저 가오웨이캉을 떠올리자 속으로 활짝 웃었다.
‘공적이구나.’
펑캉린은 자기 생각이 먼저 읽힌 줄도 모르고, 그것을 언어로 털어놓았다.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또 이전에 장 주석님 시절에 같이 활동도 하고 한 친구인데…… 이 친구는 좀 선을 많이 넘었어.”
“어떤 식으로 그랬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흐음…….”
잠시 고민하던 펑캉린은 이내 뭐 대수롭겠냐 생각하며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주석은 장 주석님과 후 주석이 합의하에 추대한 뭐랄까…… 일종의 관리자형 주석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관리자형 주석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주석 아닌가? 더군다나 이전에 장 주석이나 후 주석과는 달리 시작부터 국가 주석직과 당 총서기직 그리고 군사위 주석직을 다 들고 있는, 상당히 실권이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아무리 관리형 주식이라 하더라도, 권력자는 권력자.
그런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즉 대체재에 관한 후원을 가오웨이캉은 너무 대놓고 한다는 것이 펑캉린의 지적이었다.
“자네 말마따나 10년은 임기가 보장된 사람이야. 근데, 그런 사람의 후계자도 아니고 대체자를 후원해? 정신이 나간 거지.”
그러면서 펑캉린은 가오웨이캉에 관한 최신 정보 하나를 강철에게 풀어주었다.
“거기다 그 친구, 최근에 자기 사적인 일에 국가 기관을 동원했다가 손해를 입혔어. 그래서 상당히 그 친구에 대한 분위기가 안 좋아.”
구체적인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강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진핑에게 대놓고 대들고 있고, 거기다 국가안전부 요원 사망 건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구만.’
박태화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완전히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펑캉린…… 이 사람도 오래 가긴 글렀어.’
2013년은 이제 갓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자가 된 해였다.
그리고 적어도 이때까지, 시진핑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펑캉린의 인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무난한 사람, 관리형 지도자…… 다들 깨닫게 되겠지. 이게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가를.’
가오웨이캉은 곧 숙청될 것이다.
강철이 중국 정치에 디테일하게까지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적어도 2014, 15년 즈음하여 시진핑이 반부패운동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정적 숙청 작업을 개시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때 과연 펑캉린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거기까진 강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강철의 제일가는 관심사는 어쨌건 중국에서의 사업으로 금을 획득하는 것이었으니까.
‘중국이 지금도 그렇지만 곧 제3세계 국가의 금광을 싹쓸이하게 될 거야. 그때, 그 업체들에 숟가락을 얹어서 일부만 빼와도 그 양은 상당하겠지.’
그가 알고 있는 역사 중 하나는 이미 바뀌었다.
그 자체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보수 정당의 재집권 실패와 진보 정당의 정권 탈환 성공은 확실히 역사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놓고는 있었다.
‘엘릭서를 끊임없이 섭취해서 내 원래 힘보다 더 강한 힘만 어떻게든 얻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무식한 짓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강철의 몸은 베이징에, 서울에 있었지만 마음의 일부는 늘 모스크바에 가 있었다.
‘민주 국가야 사회 구조가 지도자 개인보다 더 중요하지만, 독재 국가에선 지도자 개인이 곧 사회 구조 그 자체니까.’
그렇게 강철은 당면한 중국에서의 과제를 마무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