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해결사 (3)
4.
활활 타오르는 아틀란티스호텔 건물 상부를 그로부터 불과 수백m 떨어진, 일신그룹과 거목그룹이 각각 2대, 3대 주주로 있는 명동 뮤호텔 옥상 테라스에서 바라보며 박태화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CCTV는 꺼져있었습니다. 거기다 호텔에서 죽은 사람들은 입국 기록이 없는 불법체류자들이고 말입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박태화는 시선을 불타는 아틀란티스호텔에서 강철에게로 돌렸다.
강철은 나름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 정도면 저 정도 불법 행위 정도는 얼마든지 무마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박태화는 앞에 놓여 있던 맥주를 쭉 들이켠 후, 거칠게 그것을 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불타는 아틀란티스호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죽은 놈들이 그냥 불체자 나부랭이들이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 걔들은……”
그러다가 문득, 박태화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문을 막은 것은 ‘근데 이걸 말해도 되나?’라는 이성의 호소였다.
“중국 보안 요원이건, 일반적인 불법체류자건, 뭐, 죽으면 다 똑같은 재가 될 뿐인 거 아니겠습니까?”
이성의 호소에 망설이는 박태화에게 강철은 직구를 날렸다.
강철의 입에서 ‘중국 보안 요원’이란 단어가 나오자 박태화는 흠칫했다.
그의 내면을 관심법으로 읽으면서 강철은 말을 이었다.
“최근에 중국 해커들이 저희 쪽 보안망을 침투하는 일이 자주 생겨서, 역으로 우리도 걔들 IP를 추적해 공작을 펼친 일이 있었습니다.”
준비해온 시나리오를 읊으며 강철은 박태화의 내면을 실시간으로 감시했다.
“그러다가 중국 보안 기관과 연루된 조직의 자료를 해킹한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알게 된 겁니다. 회장님이 어떠한 곤경에 처하게 되셨는가를 말입니다.”
“……”
박태화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금 상황에 관한 수십 개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박태화는 그 수십 개의 가능성 중 가장 현실적인 것들 몇 가지를 추출했다.
물론 그것들 중, 사실과 부합하는 추론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뒤에서 공작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발상인 거지? 이런 수준의 판단력으로 어떻게 태성을 나중에 2위까지 끌어올린 거지?’
태성그룹 참모진과 전문경영인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면서, 강철은 그런 본심은 숨긴 채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는 이제 그런 아날로그를 버리고 디지털로 모든 것을 저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도 그런 아날로그에 의존하고 있더군요.”
그 말에 박태화는 칵테일 옆에 올려두었던 CD 케이스를 바라봤다.
“덕분에 복사본이 없어서 원본을 입수하기가 수월했습니다. 만약 걔들이 디지털로 저장해두었더라면, 상당히 골치가 아팠겠지만.”
“…… 한소영 회장이 시킨 일인가?”
박태화의 물음에 강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자네가 독단적으로?”
이번에도 강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누가 시킨 일이란 건가?”
“거목그룹의 대주주께서 시킨 일입니다.”
“거목 대주주?”
박태화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엄씨 일가는 사실상 지배력을 잃었어. 한소영도 거목그룹에서 총수 의전을 받고는 있지만 가진 지분은 거의 없는 수준이고. 잠시만…….’
거목그룹의 지배구조에 관한 기억을 더듬던 도중 박태화는 한 존재를 기억해냈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를 말하는 건가?”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회사…… 한소영 회장이 결국 실소유주가 아닌가? 그럼, 그 회사 명령을 받건 한소영 회장의 명령을 받건 그게 그거 아닌가?”
박태화의 말에 강철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가 다른 재벌들한테는 한소영의 회사로 인식되고 있네? 좋아. 나쁘지 않아.’
어차피 러시아인들과 한국인들을 동시에 만날 일은 없었다.
러시아인들에겐 실소유주가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고, 한국인들에겐 한소영으로 알려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책임은 결국 그 둘이 지는 거니까.’
서류상으로나 존재하는 어느 미국인과 책임 따위 질 일 없는 재벌을 얼굴마담으로 쓰는 것에 만족하며, 강철은 말을 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별도로 답변 드릴 방법이 없는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대주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
박태화는 한소영이 이 일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했다.
“자네들의 행동 때문에 공연히 나만 위험해졌어. 중국 보안 기관 요원을 다섯이나 죽여놓았으니, 앞으로 난 어쩌란 말인가?”
“죽은 보안 요원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공식적인 임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그들은 가오웨이캉이라는 원로 정치인을 위해 일하고 있던 겁니다.”
“가오웨이캉?”
박태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공산당 원로 정치인을 건든 아들에 대한 분노였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오히려 이번 일은 가오웨이캉에게 독이 될 거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겨우 자기 사적인 일에 국가안전부 요원을 동원했다가 인명 손실이 났습니다. 과연 베이징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강철의 말에 박태화는 가만히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 정치를 떠올려보았다.
끊임없는 파벌투쟁과 힘겨루기, 견제와 공작.
그 구도 속에서, 강철의 말을 이해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박태화는 완전히 안심하진 못했지만, 처음보다는 확실히 진정됐다.
그는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뭘 원하나?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런 무식하고도 위험한 일을 한 거 아닌가?”
박태화의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을 확인한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과 관련해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게 강철의 입에서 나오자 박태화는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이 새끼?’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은 일단 태성그룹이 한국 측 대표 사업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선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버려 재집권한 진보 정권조차도 이전 보수 정권의 대북 정책 기조, 즉 동맹과의 공조를 통한 대북제재 강화를 유지해나가는 판국이었다.
정치적 구도가 그런 상황에서, 박태화 개인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들, 변하는 건 없을 터였다.
‘뭐 하자는 거지?’
박태화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소영이 나한테 그걸 왜 바라겠어? 그걸 바라면 차라리 이렇게 무식한 짓을 안 하고, 직접 말했겠지.’
박태화는 칵테일을 쭉 들이켠 후 가만히 강철을 바라봤다.
‘이 자식……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거지?’
박태화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강철로 하여금 실소하게 했다.
‘북한 간첩? 참 대단한 상상력이시다.’
일단 강철은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밀어붙이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아드님께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하라고 당부해주십시오. 앞으로 태성을 이끌 분 아니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철이 그렇게 말하자, 박태화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CD 케이스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태성에 짐이 될 놈이지. 이끌 분은 개뿔.”
5.
3월 6일 수요일 밤 10시.
한남동 한소영의 자택.
경비원 몇 명과 야간 숙직 가정부 몇 명만 남은, 다소 공허함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공간.
한소영의 방에서 강철은 그녀와 독대하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박 회장님이 앞으로 날 이상하게 보시겠네?”
“그럴 수도 있겠지.”
“일을 자기가 벌이고, 수습은 내가 한다? 좀 그렇다?”
“뭐 수습할 게 뭐가 있겠어? 어차피 박태화도 따로 내 뒷조사부터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뒷조사까지 해볼 건데.”
“흐음? 그럼 뭐가 나오려나?”
“뭐, 난 그냥 고아 출신에 전국구 조폭을 장악하고 재벌한테 빌붙어 있는 한량 정도?”
그 말에 한소영은 풉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우보이는?”
“페이퍼 컴퍼니라는 것과 최근 그쪽 대표라는 사람이 러시아 정재계 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 정도?”
“태성의 정보력이 그 정도까지 된다고?”
“러시아 쪽 정보 얻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거긴 돈만 주면 국가 기밀을 팔 준비까지 된 것들이 많으니까.”
“그 정도야?”
“그 정도지.”
한소영은 그렇구나, 라며 혼잣말을 내뱉고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난 뭘 해주면 될까?”
“지금처럼 하면 돼.”
“지금처럼?”
“박태화가 은연중에 이 이슈에 관해 물어와도 모르는 척, 카우보이에 대해 물어봐도 아는 게 없는 척.”
“흐음? 모르는 척, 아는 게 없는 척하기엔 내가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은데?”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소영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 후 천천히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한소영은 가벼운 콧소리와 함께 강철의 손에 뭉친 어깨를 맡겼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우린 큰 이익을 챙기게 될 거야. 단순히 금전적인 이익을 말하는 게 아니야. 더 큰, 어쩌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그런 이익을 얻게 될 거야.”
강철의 말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인류의 멸망이 실제 역사와는 달리 적어도 2022년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이득을 얻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한소영이 그런 강철의 뜻을 알지는 못했던 만큼, 그 말의 본의가 그대로 전달되진 않았다.
“난 이미 운명을 바꾼 이익을 얻었잖아. 민식이도 그리고 자기도. 겸사겸사 일신그룹까지.”
“박태화가 당신을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실소유주인 것으로 착각하게 내버려 둬.”
“실소유주가 내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으니,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건가?”
오늘따라 시원시원하지 않은 한소영의 대답에 강철은 살짝 의구심을 가졌다.
한동안, 한소영을 대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관심법을 강철은 발동했다.
곧 그녀의 생각에 강철에게 고스란히 읽혔다.
‘끄응…….’
강철은 내심 모르는 척, 한소영의 목을 주물러주며 말했다.
“형제란 때로는 짐이 될 수도 있어. 특히 당신 같은 재벌 입장에서 형제는 평생의 숙적이 될 수도 있지. 박태화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야. 아마 박동진은 이번 일로 인해 승계권을 잃게 될 거야.”
그 말에 한소영은 강철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 부근으로 끌고 내려왔다.
“하지만 형제가 있으면 때론 힘이 되기도 하고, 혼자 하기엔 무서운 일도 같이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명이 맛이 갔을 때, 대안이 생기고 말이야.”
한소영은 엄태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강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한소영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직 나 한 명 정도는 더 나을 수 있데.”
한소영은 강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강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민식이가 동생을 바라고 있을까?”
그 말에 한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간절히 바라고 있을걸?”
더 이상 강철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