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해결사 (2)
“근데 우린 언제까지 CD에다가 자료를 보관한답니까?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클라우드에다가 저장해도 되지 않습니까?”
부하의 물음에 지부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뭐, 윗선에서 알아서 정하겠지. 어쨌건 아직까지는 CD가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거 아니겠어? 클라우드인지 뭔지보다는?”
“디지털로 보관을 해두면 파일을 어느 곳에나 복사해둘 수 있어서 공유하기도 편한데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CD에 보관을 해두면, 자칫 불이라도 나거나 하면, 몽땅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이 안 나게 조심해야지.”
“그게 아니라 그냥 우리도 디지털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CIA는 그렇게 한다던데…….”
“그래서 우리가 걔들 기밀 몇 개 털었잖아. 허허허.”
여기서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다.
저들을 뚫고 나갈 순 있었지만, 자칫 중국에 깔아놓기 시작한 네트워크가 제대로 설치되기도 전에 망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잘못하면 왕샤오페이까지도 노출이 될 수가 있었다.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많은 것이, 이곳 상하이 지부에서 깽판을 치는 일이었다.
대신 강철은, 더욱 강화된 자신의 관심법에 의존하기로 했다.
강철은 가만히 세 사람의 상념 깊숙이 진입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강철은 CD보관소의 위치와 박동진의 비디오가 그곳에서 어느 칸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강철은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CD보관소로 이동했다.
탕비실로부터 5m 정도 떨어진, 창고 같은 공간에 CD보관소가 있었다.
‘허어?’
CD 보관은 굉장히 구식이었다.
창고 같은 곳에 박스가 수십 개가 있었는데, 그 박스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박스 하나당 100개씩 넣어 두는 건가?’
굉장히 구시대적인 일 처리에 강철은 살짝 보안 기관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이렇게 해야 또 내가 정작 일하기는 편하니까.’
강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박동진의 CD를 찾기 시작했다.
‘130225-31…… 아, 여기 있네.’
강철은 곧 박스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朴이라는 한자가 130225-31이라는 숫자와 함께 적혀 있는 CD 케이스를 발견하곤 그것을 집어 들어 품에 넣었다.
‘물건은 확보했고.’
강철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만히 박스 귀퉁이를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곤 그대로 불꽃을 일으켰다.
곧 박스에 불이 붙으며 활활 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서, 강철은 조용히 CD 보관소를 나가 문을 닫았다.
“뭐 타는 냄새 안 납니까?”
“내 담배 냄새겠지.”
“아닌데…… 담배 냄새가 아닌데…….”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 요원들을 지나쳐, 그렇게 강철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응? 뭐야? 고장 났나?”
책을 읽고 있던 종업원은 또 자동문이 그냥 열리자 인상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하기사 국정원은 인도네시아 외교관 숙소 침투했다가 어설픈 일 처리로 다 들켜버려 망신을 당했고, 러시아 정보기관은 나중에 전쟁 때 제대로 된 정보를 수뇌부에 전달도 못 했으니까.’
생각보다 허술한 정보기관의 보안에 실망을 하면서도, 강철은 어쩌면 이게 현실일 수도 있다 생각하며 이내 납득했다.
‘사실 내가 비현실적인 거니, 쟤들은 현실적인 거 아니겠어?’
곧 강철은 카페로 복귀했고, 그즈음 은신을 풀었다.
“CCTV는?”
“입구 쪽만 일단 끄는 데 성공했습니다.”
“됐어, 그 정도면. 자, 일어나자.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벌써 말입니까?”
“왜, 관광이라도 하려고 했나?”
“그 제가 중국은 처음이라…… 그래도 이왕 온 거…….”
“다음에 오라고, 다음에. 응? 회삿돈으로 말이야.”
강철은 서용태를 이끌고 카페를 벗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타 한창 이동할 때쯤, 미려상해 화장품 가게 쪽에서 큰불이 났고, 그로 인해 소방차가 수십 대나 출동하는 소란이 그 일대에서 벌어졌다.
‘자, 이제 한국으로 가서, 박 회장한테 선물을 줘야지.’
물론, 그냥 주진 않을 생각이었다.
“이거, 한국 가자마자 바로 디지털 백업본 하나 만들어 둬.”
강철은 서용태에게 CD를 건네주었다.
“아, 이게 그겁니까?”
서용태의 물음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서용태에게는 중국 정보기관을 털어온 괴물로 강철이 인식됐다.
‘너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히 털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더라.’
그러나 진상을 아는 강철은, 그런 서용태의 환상을 살짝 비웃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올 일이 있겠지.’
3.
“기다리고 있어.”
“네, 회장님.”
3월 6일 수요일 오후 6시 45분.
박태화는 명동 아틀란티스호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는 수행원들에게 기다리라 한 후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위트룸 층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야 생기겠냐만…….’
아틀란티스호텔은 일단 대주주가 중국 회사였다.
이전에는 현성그룹과 시그니엘그룹이 나눠서 지분을 들고 있었지만, 그랬기에 예전에는 박태화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전 호텔 CEO와 지금의 CEO는 아예 사람이 달랐다.
‘어쨌건 여긴 내 안방이니까.’
그랬기에 협박범의 요구에 따라, 홀로 스위트룸까지 올라가면서, 박태화는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점을 믿으며, 안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당연히 안심 따윈 되지 않았다.
‘뭘 요구할 생각이지?’
협박범은 박태화에게 그저 찾아오라는 말만 했을 뿐,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의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중국 애들인 건 확실한데…… 조직 범죄자인가? 아니면…… 공산당?’
높은 확률로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박태화는 조직범죄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적대할 이유가 있나? 그동안 먹인 게 얼마인데?’
중국 사업 진출을 위해 태성그룹 차원에서 당국에 뇌물로 먹인 돈의 액수를 떠올리며 박태화는 이를 갈았다.
‘만약 내가 그렇게 먹였는데도 이런 식으로 하는 거면…….’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태성그룹이 중국에서 할 수 있는 보복성 행동이라곤, 사업 철수뿐이었다.
그리고 중국 사업 철수는, 태성그룹에게 손해가 되면 손해가 됐지, 이득이 되진 않을 터였다.
‘이제 겨우 거기서 수익이 좀 나오나 했더니…… 동진이 이 멍청한 새끼가…….’
박태화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아들 박동진에게로 향했다.
‘일단 이 일을 해결하고 나면…… 그 인간은 무조건 한국에서 일하게 해야겠어. 내 눈에서 멀어지지 않게.’
그렇게 분노를 속으로 삭이는 사이에, 박태화는 스위트룸 층에 도착했다.
그는 곧 B-32번 방을 찾아갔다.
‘응?’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박태화는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현관문이 닫혀 있었기에,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냥 들어오라는 건가?’
박태화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유사시 최대한 빨리 도망칠 수 있게끔, 문을 반절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드르륵-!]
현관문을 열고서 박태화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간 박태화는, 곧 거실의 광경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벽에다 바짝 붙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박 회장님?”
거실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머리가 깨진 채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드러져 있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머리는 깨져 있었다.
옆이건 뒤통수건 아니면 이마건 정수리건, 어느 부위건 하나씩은 깨져 있었고, 그 깨진 틈으로 피와 뇌수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한 남자는, 머리통이 반쯤 찢겨 져서, 거기로부터 뇌가 삐져나와 있기까지 했다.
“우욱-!”
결국, 박태화는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박태화를 바라보며, 홀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강철은 피식 웃었다.
“비위가 안 좋으시네요.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한 차례 토악질을 한 박태화는 최대한 시체에서 시선을 뗀 채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 당신 누구요?”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섯 구의 머리가 터진 시체가 있는 곳에서, 홀로 살아서 담배를 태우는 남자.
당연히 누가 봐도 그가 살인자였으니까.
“섭섭합니다? 한경총 회의랑 이런저런 재벌들 모임에서 몇 번 인사드렸는데, 저만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강철의 말에 박태화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고, 그 얼굴과 강철의 얼굴을 매칭시킬 수 있었다.
“다, 당신…… 하, 한 회장 보디가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한소영 회장님 경호실장 강철입니다.”
강철은 가볍게 의자에 앉은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태화는 살짝 마음을 놓으면서도, 여전히 불안에 떨며 물었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그 물음에 강철은 씩 웃으며 대답 대신 품에서 CD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그건…….”
“아드님의 열렬한 사랑이 담긴 동영상 원본입니다.”
동영상 원본이라는 말에 박태화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워, 원본?”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박동진의 포르노 영상을 인정하는 말을 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여유롭진 않았다.
“그, 그걸 어떻게 가지고…… 아…….”
박태화는 그렇게 묻다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누운 다섯 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우웨엑-!”
그리고 그는 다시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이거 참…… 괜한 걸 보여드린 모양입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하면서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태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에게 CD 케이스를 건네주었다.
“챙기십시오. 이런 사적인 영상은, 당사자가 들고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가서 아드님께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하십시오.”
그 말에 박태화는 고개를 들어 강철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 인간은?’
그러면서도 그는 CD 케이스를 넘겨받았다.
“고맙소.”
박태화는 최대한 시체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강철에게 물었다.
“저…… 시체들은 어쩔 생각이오?”
살인이다.
그것도 다섯 명이 동시에 살해당한 사건이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이걸 덮는 건 무리다.
“화장해드려야죠.”
“화장?”
강철은 들고 있던 담배를 시체들 사이에 던졌다.
[화르륵-!]
담배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불이 붙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헉-!”
“자, 빨리 빠져나갑시다, 회장님.”
강철은 화들짝 놀라는 박태화를 붙들고 방을 나섰다.
그리곤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아래로 쭉 내려갔다.
“아, 아니 불을 지르면 어쩌잔 거요!”
“걱정 마십시오. CCTV는 다 꺼져있고, 스위트룸 층에는 저 방 말곤 다 빈방이라서 사상자도 없을 겁니다.”
“그, 그 말이 아니잖소!”
“아, 다른 객실 고객들도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아마 3분쯤 뒤에 방송이 나갈 거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박태화는 일단 말하려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그의 마음 상황이, 정상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강철은 그런 박태화를 달래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