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120화 (120/175)

120 해결사 (1)

1.

어느 국가건, 국가의 공적 조직으로 하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일은, 공적 조직의 오더를 받는 민간 조직이 대행해서 처리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인데, 국가의 군대가 하면 전쟁범죄가 돼 문제가 생길 일이라도 용병이 하면 국가 자체에는 별 법적 문제가 생기지 않기에, 21세기 첨단 무기의 시대에도 여전히 용병은 민간군사기업(PMC)이란 이름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민간군사기업이 전쟁에서 효율적인, 그러니까 비인도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민간 해커 집단은 사이버 전쟁에서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흑풍’이란 이름의 민간 해커 집단이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사실상 중국 국가안전부에 의해 설립된 존재다.

흑풍은 국가안전부와 협조하여 협력적 관계에 있는 국가건 적대적 관계에 있는 국가건 가리지 않고 상대국의 사이버망에 침투해 중국의 국익을 위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꽤 성과도 좋은, 그래서 2013년 현재 중국 정부에서 상당히 아끼는 민간 조직이다.

“그 얼굴 보는 건 처음이지? 우리?”

3월 5일 화요일 오전 9시.

베이징시 외곽의 허름한 중고 전자기기 상점.

간판조차 제대로 달려있지 않는, 다소 지저분한 곳에서 강철은 서용태와 함께한 중국인과 만나고 있었다.

“그…… 여자인 줄은 몰랐는데.”

서용태는 유창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정확한 발음으로 북경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인 여성, 왕샤오페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냥 영어로 이야기하지? 어차피 우리 보통 영어로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나 왕샤오페이는 중국어대신 영어로 서용태에게 대답했다.

“아…… 뭐 좋지.”

서용태는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

그 이유를, 관심법을 통해 두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알게 되면 강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반했냐?’

왕샤오페이는 올해 만21세가 되는, 강철과 동갑내기인 92년생이었다.

하지만 92년생치고는 굉장히 성숙해 보여, 마치 82년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게 말해서 성숙해 보인다는 거지, 사실은 좀 노안이었다.

‘뭐 노안이라도 이 정도면 예쁘긴 한데…… 서용태…… 하기사 원래 여자에 미쳐있던 놈이긴 했는데 말이야.’

본래 강철과 서용태의 관계는, 멸망한 세계에서, 영주의 하렘에 들어가 첩들을 강제로 범한 강간범과 그 강간범을 뒤쫓는 해결사의 관계였다.

강철의 기억 속에서 본래 서용태는 섹스에 미친 허접한 초능력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회귀 후 그를 만난 후 지금까지, 서용태가 한 번씩 찌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섹스에 미친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늦바람이 든걸 수도 있겠지. 어쨌건 세상이 망하기 전까진 컴퓨터에 빠져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서용태의 색정광 기질이 언제 발동되느냐가 아니었다.

‘내가 나서야지.’

왕샤오페이는 흑풍의 조직원 중 하나이자, 서용태와 협력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대표자였다.

그리고 지금 강철이 서용태를 중국으로 불러 왕샤오페이와 만나는 이유는, 태성그룹 장남 박동진의 섹스 비디오 원본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정부 기관이랑 일을 하다 보면, 실제로는 내가 우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기관이 단지 국가적 조직이란 이유 하나로 우위에 서려는 경향이 있지.”

자신을 보며 제대로 시선 처리도 못 하는 서용태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왕샤오페이는 갑자기 강철이 유창한 북경 중국어로 이야기하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떨 때는 내 쪽에서 계약 파기를 해버리고 싶지만, 어쨌건 상대는 정부 기관이고 그들에게는 광범위한 행정적 동원과 법적 조치가 가능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차기 계약이 날아가기 때문에 결국 참게 되고 말이야.”

“……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왕샤오페이는 살짝 경계 어린 눈으로 강철을 바라봤다.

강철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냥 내가 사업을 하면서 느낀 걸 이야기한 거야. 아마 지금 내 마음과 가장 비슷한 마음을 가진 게 태성그룹 박 회장일 거고. 중국에서 중국 정부를 대상으로 로비를 벌여서 사업을 했는데, 완전한 을의 입장이 돼 버렸잖아?”

그 말에 왕샤오페이의 경계는 살짝 누그러졌다.

‘깜짝아.’

완전히 경계를 푼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왕샤오페이는 자신의 고민을 알고 이야기한 게 아닌, 그냥 우연히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던 차에 박태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 말 정도로만 이해했기에, 그쪽으론 경계를 더는 하지 않았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어느 나라나 정부가 민간보다 우위에 서려는 건 변함이 없구만. 합법적인 쪽이건 불법적인 쪽이건.’

지난 3년여 동안, 강철의 초능력 에너지는 끊임없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돈이 되는 대로 금을 모아서 연금술의 불꽃으로 녹여 엘릭서를 추출해 마셨고, 덕분에 현재 강철은 오거닉 메탈을 온몸에 두른 채 최대 2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됐고, 관심법을 통해 상대방의 표층 의식 너머까지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됐다.

왕샤오페이를 비롯해 서용태와 협력하는 흑풍 조직원들은 모두가 중국 정부, 특히 국가안전부의 행태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흑풍의 설립이 국가안전부 전직 요원들에 의해 주도가 됐고, 국가안전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곤 하지만, 그들에겐 어디까지나 국가안전부는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자 투자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가안전부는 흑풍을 하부 기관 다루듯 다루었고, 그것에 왕샤오페이를 필두로 한 일부 젊은, 90년대생 조직원이 불만을 가진 것이었다.

그랬기에 왕샤오페이는 서용태에게 박동진의 섹스 비디오를 보내 그거로 이득이나 보라는 식으로, 소소하게나마 일탈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난 건수를 잡았지.’

강철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서 이사한테 박 회장한테 빨대를 꼽으라 했다고? 그 비디오로?”

왕샤오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했지.”

“근데 어차피 중국 쪽에서 그거로 박 회장을 협박할 게 뻔한데, 겨우 복사본 그것도 원본보다도 한참 짧은 분량을 가지고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 원본보다 짧은 건 어떻게 알았지?”

“겨우 10초 조금 넘는 분량으로 대기업 회장을 협박하진 않을 거잖아?”

“…… 그렇지.”

왕샤오페이의 눈썹이 八자로 휘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철의 화법에 말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 화법에 말리는 게 아니라, 네 생각이 내게 읽히는 거지. 정보의 격차일 뿐이야, 이 아가씨야.’

강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한국 3위의 대기업 집단 총수를 협박할 수 있는 좋은 소재란 말이야. 그래서, 원본을 구하고 싶은데 말이야.”

“원본?”

“뭐, 디지털이니까, 원본 파일의 복사본 정도라도 있을 거 아니야?”

순간, 왕샤오페이의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가 걸쳐졌다.

그리고 강철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먼저 읽고는 살짝 당황했다.

“화질이 구린 걸 보고 눈치를 못 챈 모양이지? 그거 폰으로 재촬영한 거야. 원본 영상을.”

“…… 아날로그식으로 저장을 해 뒀다고?”

“정부 기관은 원래 이런 쪽으론 발전이 느리잖아?”

박동진의 섹스 비디오는 말 그대로 비디오에 녹화가 돼 있었다.

정확하게는 CD에 녹화가 돼 있었고, 그 CD가 유일한 원본이자 판본이었다.

‘일이 좀 더 쉬워지겠는데?’

2013년, 삼우전자와 애플망고가 스마트폰으로 대전쟁을 벌이는 때에, 정부 기관에서 CD를 쓴다는 것.

그것에 살짝 충격을 받으면서도, 강철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럼 그 CD만 확보하면 되겠네. 그리고 재촬영본도 확보하면 되고.’

강철은 왕샤오페이에게 물었다.

“그 CD는 어디 있지?”

“큰집에서 들고 있지.”

“큰집? 아…… 국안부?”

“쉿! 함부로 그 이름을 말하지 마!”

그 짧은 대화에서 강철은 많은 정보를 왕샤오페이의 머릿속에서 추출해냈다.

원본 CD는 현재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에서 보관 중이며, 그것을 폰으로 재촬영한 재촬영본은 적어도 왕샤오페이의 폰에선 지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여자한테 재촬영본을 보낸 놈은 현재 한국에 가 있고?’

어쨌건 국가안전부에서 시켰다곤 해도, 실행을 한 건 흑풍이었다.

왕샤오페이로부터 많은 정보를 추출한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스포츠 가방 하나를 건넸다.

“그거로 월병이나 사 드셔. 가지, 서 이사.”

“아, 네. 그…… 다음에 또 보자고.”

강철과 서용태는 그렇게 허름한 상점을 떠났다.

홀로 남은 왕샤오페이는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스포츠 가방을 열었고, 그 안에 가득 든 달러 지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시원시원하시네.”

2.

오전 10시.

강철은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출발했다.

그리고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에 상하이에 도착한 강철은 서용태와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왕샤오페이의 머릿속에서 추출한 정보를 바탕으로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를 찾아냈다.

그 근처 카페로 들어간 강철은 그곳에서 서용태에게 해킹을 준비시켰다.

“5분 후에, 저쪽 건물 CCTV 싹 다 꺼버려.”

“그…… 100%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한국이면 모르겠는데 어쨌건 여긴 중국이라서…… 일단 예전에 흑풍 애들한테 받아둔 데이터 기반으로 해서 해보고는 있는데……”

“내가 부탁하는 어조로 이야기하진 않은 것 같은데?”

“…… 하겠습니다.”

강철은 서용태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카페를 나섰다.

그리곤 여유롭게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를 향해 걸어갔다.

‘미려상해…… 아름다운 상하이라…….’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는 기념품 가게로 위장하고 있었다.

미려상해라는 간판을 단 화장품 가게 지하층이 그들의 안가였고, 상하이 지부였다.

강철은 시간을 확인하고 5분이 됐다 싶을 때, 은신을 펼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 응? 뭐야? 고장이야?”

자동문이 열리자 인사하려던 종업원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홀로 가게를 지키는, 자신이 국가안전부 상하이 지부를 위해 일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는 평범한 종업원의 곁을 지나 강철은 가게 뒤편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그다지 정교하지 않게 위장된 판을 걷어내고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찾아내 그것을 열었다.

그대로 강철은 계단을 타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리곤 지하실 계단 끝에서 멈춰선 후, 가만히 정신을 집중해 관심법을 펼쳐보았다.

‘3명…….’

세 사람의 상념이 강철에게 잡혔다.

강철은 그 상념이 나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서울에서는?”

“내일 만나기로 했답니다.”

“이게 국가 안보를 위해 중요한 일인진 모르겠습니다, 지부장님.”

“중요한 일이야.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해야 해.”

탕비실로 보이는 곳에서, 세 남자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강철은 일단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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