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재벌 3세의 사랑 (1)
1.
2월 23일 토요일 저녁 8시.
중국 상하이시의 어느 호텔.
“밍밍~ 나 한국에 가는데 진짜 안 따라갈 거야?”
태성국제상사 상하이지사 직원 박동진은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한 여인을 향해 중국어로 물었다.
“말했잖아, 둥둥. 아빠랑 같이 쓰촨으로 여행가기로 했다구.”
그 말에 화장을 고치던 중국 여인, 저우페이밍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박동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까먹은 거야? 어제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박동진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손사래를 쳤다.
“당연히 안 잊었지. 그냥…… 그냥 밍밍이랑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기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 말에 저우페이밍은 활짝 웃으며 화장을 마저 고치곤 그대로 침대로 날아들어 박동진의 위에 엎드러졌다.
그리곤 그의 입술과 볼에 수차례 키스 세례를 퍼붓곤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자기하고 계속 같이 있으려는 거잖아.”
박동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우페이밍을 올려다보며 강한 성적 흥분을 느꼈다.
곧 두 사람은 한데 어우러져 섞였고, 천연의 알몸 상태가 돼 침대 위에서 야생의 레슬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은, 호텔 천장과 벽면에 설치된 수십 대의 카메라에 의해 선명하게 촬영되었다.
2.
2013년의 새해가 밝아왔다.
두 번째 2013년 새해 첫 일출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한소영·엄민식 모자와 함께 맞이한 강철은 굉장히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튼튼한 복지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경제 성장 또한 함께 이루어지는,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선순환적인 경제구조를 만들겠습니다.”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강철은 한소영과 함께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강철은 원래라면 대통령은커녕 2010년대 후반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 은퇴당했을 사람이 자신의 대통령 취임사를 낭독하는 것을 바라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과연 이게 전체 역사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분명히 역사는 바뀌었다.
본래 여당이었어야 할 당이 이젠 야당이 됐고, 본래 야당이었어야 할 당이 이젠 여당이 됐다.
본래 대통령이 돼야 할 사람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야인으로 돌아갔고, 본래 추하게 정계 은퇴를 해야 할 사람은 당당하게 대통령이 됐다.
‘그 양반 입장에선 그리고 지금 야당 입장에선 나은 건가? 탄핵 오명이 없어지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도 사라질 예정이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도, 최초의 탄핵 대통령도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강철이 두 재벌 기업의 총수 일가의 일에 개입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두고 볼 일이야.’
그러나 강철의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미시적인 분야에서의 역사가 어찌 되건 거시적인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이기도 했다.
‘구조적으론 아무것도 변한 게 없으니까.’
강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취임식 맨 앞줄은 양대 노총 대표와 한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한 경영계 대표자 그리고 사회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배치돼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뒷줄부터는 전부 30대 기업 총수 및 총수 대리인으로 배치돼 있었다.
‘대통령이 변해도, 정경유착 구조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단순히 자리 배치만이 아니었다.
한소영을 비롯해 주요 재벌 기업 총수들은 이미 인수위의 오더를 받고,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물론 인수위에서는, 자기 정권의 숙원 사업을 재벌에게 맡긴 대가로 그들의 숙원 사업 또한 허가해 주기로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벌들은 이런저런 경로로 인수위 관계자들에게 용돈을 쥐여 줬고, 대통령 당선인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해주었다.
물론 그 후원은 당연히 익명에 차명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두고 보면 알겠지. 원래 이 정권에서 일어났어야 할 이벤트들이 그대로 일어날지, 아니면 잠잠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철은 신임 대통령에게 냉소 섞인 박수를 보내주었다.
3.
“박동진. 태성그룹 박태화 회장의 아들입니다. 지금은 태성국제상사 상하이지사에서 평사원으로 있는데, 평판은 별로 좋진 않습니다.”
3월 1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강철은 용산에 자리한 서용태의 아지트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젠 좀 세련된 장소로 변한 아지트에서, 서용태가 직접 띄운 PPT 화면을 보며, 강철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재벌 3세가 평판이 안 좋은 거야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만, 이 사람은 평판만 안 좋은 게 아닙니다.”
서용태는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천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박동진과 한 여인의 정사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나왔다.
“현재 박동진은 저우페이밍이라는 중국 여자와 연애 중입니다. 문제는 이 여자가 중국 공산당 원로 정치인인 가오웨이캉의 애인이라는 겁니다.”
화면이 넘어가고, 이번엔 한 노인의 사진이 나왔다.
노인이라곤 하지만,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는,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남자를 서용태가 소개했다.
“이 사람이 가오웨이캉입니다. 예전에 장쩌민 주석 시절에 굉장히 잘나가던 정치인이었고, 지금도 여러 공산당 정치인들을 후원해주면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 파벌은?”
“상하이방인데, 후원해주는 후배 정치인은 태자당부터 공청단까지 다양합니다.”
“상하이방이라…….”
강철은 계속해보라는 뜻으로 손을 한 차례 흔들었다.
서용태는 계속해서 브리핑을 이어갔다.
“이 사진은 올해 2월 23일,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에 촬영된 동영상의 캡처본입니다. 촬영은 중국 국가안전부랑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흑풍이라는 조직이 했고, 그중 일부가 저에게 들어온 겁니다.”
“그 흑풍이라는 조직이, 서 이사 당신하고 예전부터 같이 일했다는 그 중국 조직인가?”
“네, 맞습니다.”
“그쪽이 왜 이걸 그쪽한테 준 거지?”
“뭐, 아무래도 한국인 재벌 3세랑 연관된 거니까, 준 것 같습니다.”
“이거로 뭐 하라고?”
“그 친구들 말로는 이거로 빨대 좀 꼽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빨대를? 재벌 3세의 섹스 비디오로?”
강철은 씩 웃었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이거랑 비슷한 사건은 없어.’
강철은 가만히 기억 속에서 태성그룹에 관한 정보를 더듬어보았다.
‘2017년쯤부터 박정연이라는 여자가 회장 후계자로 거의 확정이 됐는데…….’
그리고 강철은 태성그룹의 후계자가 박동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종합해보면, 중국에서 이것을 두고 박태화를 협박해서 무언가 이득을 취했고, 박태화는 이에 분노해서 아들이 아닌 딸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는 건가?’
당시 언론에서는, 태성그룹이 시대의 변화에 순응해 성별이 아닌 능력으로 후계자를 정했다며 굉장히 박태화를 빨아주었다.
그러나 어쩌면 진실은, 역사가 알려주지 않은 사실은, 다를 수도 있다고 강철은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역사란 드러난 것보단 숨겨진 게 더 많기도 한 법이니까.’
태성그룹.
대한민국 재계서열 3위의 대기업 집단.
2020년 이후 세계가 멸망할 때까진 현성그룹을 제치고 2위 자리를 3년간 유지한 기업.
그리고 알렉세이 밀레르 가스프롬 부의장이 남북러 가스관 연결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그래서 굉장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기업.
‘태성그룹을 접수하는 건 불가능해. 박태화가 건재한 데다가, 박태화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박동진이나 박정연이나 둘 다 너무 어려. 회장이 되기에는.’
거목과 일신은 후계자가 모두 40대였기에 후계자를 앞세워 접수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태성은 달랐다.
당장 현 회장 박태화가 2013년 기준 쉰여섯 살로 현역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가 될 아들과 딸은 각각 스물아홉, 스물다섯이었다.
‘하지만 박태화를 도와서 그와 순탄한 관계를 맺는 건 가능하겠지.’
강철이 기억하는 태성그룹 회장 박태화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랬기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 말만 듣고, 그에게 회삿돈으로 투자대금을 빌려줬다가 횡령과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를 선고받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태성그룹이 중국에 뭐 투자를 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보지 않았었나?’
지난 생의 기억을 더듬어, 2016년 연말에 있었던 재벌 총수들의 대규모 국회 출석 사건 때, 태성그룹의 중국 사업 손실이 정권과의 검은 유착에서 비롯된 거 아니냐던 야당의 질책에 그건 아니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변했던 박태화를 떠올리며, 강철은 씩 웃었다.
“어이, 서 이사.”
“네, 대표님.”
“자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봐. 박동진이가 어디까지 엮여있는지, 중국 친구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중국 친구들 배후에 있다는 그…… 가오 뭐시기 하는 양반은 어디까지 원하고 있는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오웨이캉입니다.”
강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주차장으로 와 차에 올라타자마자 미하일 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혹시 중국 쪽에 인맥이 있나?”
[중국 말입니까? 저는 따로 없는데, 제 누님이 그쪽에 인맥이 있습니다.]
“어떤 인맥이지?”
[그 예전에 누님이 거기서 작전할 때 사귀었던 친구인데 지금 공산당 중앙서기처에서 있습니다.]
‘사귀었던’이라는 말이, 단순하게 친구 관계였다는 말인지 아니면 애인 관계였다는 말인지, 당장에 강철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상당히 괜찮은 인맥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다리 좀 놔 줄 수 있나?”
[네, 가능합니다. 때마침 누님이 지금 베이징에서 휴가 중이라서, 아마 만나고 있을 겁니다.]
“오케이. 접수했어.”
강철은 미하일 킴과의 통화를 끝내고 시동을 걸었다.
‘박태화 회장에게 호의를 사서, 그 호의를 바탕으로 남북러 가스관 협력 사업에 전향적으로 나서게 한다면?’
어차피 남북러 가스관 협력 사업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것이다.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북한은 얼마 전 핵실험을 강행했고, 덕분에 북한과의 경협 이야기는 쏙 들어간 상태였다.
강철이 확인한 정부 내 분위기도 당장에는 남북협력보다는 동맹과의 안보 공조를 하는 게 맞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요한 건 알렉세이 밀레르에게 내가 태성그룹의 마음을 돌렸음을 알려주는 거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알렉세이 밀레르는 강철을 상당히 좋게 볼 터였다.
그리고 알렉세이 밀레르의 배후에 있는,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갈 남자도 강철에 대해서 상당히 전향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만약 독대만 성사가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 미래를 상상하며, 일단 강철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방안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