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나비효과 (2)
3.
4월 12일 목요일 오후 1시.
일신종합건설 총괄사장 우용택의 비서가 역삼동에 자리한 그의 애인의 빌라에서 비자금 장부가 든 007가방과 갈아입을 옷가지를 들고 일신 본사 회장실로 왔다.
“우 사장 모시고 가.”
한소영은 우용택과 그의 비서를 그렇게 쫓아냈다.
그리곤 경영지원실 총괄지원본부에 연락해 소파를 갈고 회장실을 청소하게 시킨 후, 그녀는 강철과 함께 회장실 곁에 딸린 조그만 접객실로 들어갔다.
방음부터 해서, 외부의 시선까지 모두 완전히 차단된, 과거 한경석이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때 쓰던 곳에서, 강철은 한소영과 함께 비자금 장부를 확인했다.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참 오빠도 위험한 도박을 했네?”
한소영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준영이 특정 정치인과 정당에다가만 비밀 후원금을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아셨더라면, 진즉에 뭐라 하셨을 거야.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한소영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약 한준영이 후원한 정치인과 정당이 잘되지 않았더라면, 일신그룹 자체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래 역사대로였다면, 한준영의 도박은 성공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박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만약 오빠가 계속 회장 후계자로 남아 있었으면 일신도 큰일 날 뻔했다. 그치 자기야?”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뭐지?”
그러다가 강철은 장부에서 이해가 안 가는 표식과 숫자를 보곤 한소영에게 물었다.
“이거? 미지출 금액인 것 같은데?”
한소영은 그것을 해석해주면서, 그 미지출 금액 옆에 적힌, 암호문 같은 것을 읽었다.
“Jade, 불발, Dos의 오더가 필요.”
강철은 그 곁의 날짜를 확인했다.
한준영이 한경석으로부터 밀려난 이후의 날짜였다.
“Dos. 스페인어로 2를 뜻하지. 아마 한준영일 거야.”
“그래? 그렇네. 다른 데서도 전부 다 숫자 2로 오빠를 표기해 뒀네.”
“Jade…… 옥이라는 뜻인데…… 이게 무슨 뜻이지?”
강철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정치인 중에 옥씨가 있던가?’
적어도 선거 판세에 영향을 줄 만한 정치인 중에는 없었다.
‘아마 이게…… 영향을 준 것 같은데…….’
다만 책정된 금액이 500억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이번에 바뀐 선거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확실한 건 없어.’
일단은 이것도 추론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건, 원래 역사에서도 집행이 되지 않은 금액일 수 있었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회삿돈도 아니고 자기 비자금을 500억이나 깨서 정치인을 돕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강철은 비자금 장부에서 시선을 뗐다.
정치인 스폰을 제외하면, 다른 분야는 사실 강철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철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한소영은 홀로 장부를 빠르게 훑으며 그간 한준영을 통해 일신그룹의 돈을 받아먹은 정치인과 관료, 기자 명단을 추출해 보았다.
대부분 암호문이었지만, 몇몇, 예컨대 아까의 그 Jade 정도를 제외하면, 한소영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녀는 쉽게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강철이 담배를 연거푸 3개비나 태웠을 무렵, 한소영은 장부를 덮었다.
“일단 기존에 주던 사람들한테는 계속 주고, 여기다 새로 그간 안 주던 사람들도 포함해야겠어.”
“한준영이 자기 비자금을 토해낼까?”
“오빠 돈으로 할 생각 없는데? 회삿돈으로 해야지.”
강철은 피식 웃었다.
“일단 돈 관리는 다른 사람한테 맡길 생각이야. 우 총괄은 어쨌건 오빠 사람이었잖아? 조만간 인사 단행하면서, 비자금 관리할 사람도 뽑아야지.”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할게.”
“응? 자기가?”
“회계 관리야 따로 사람을 써야겠지만, 전반적인 관리는 내가 할게.”
그 말에 한소영의 표정이 짓궂어졌다.
“일신은 나중에 보성이한테 물려줄 회사야. 알지? 아버지 유언이 그래서, 나로서도 이건 양보할 수 없어.”
“알고 있어. 다만…… 나도 이제 좀 고위층 인맥을 많이 만들어야 하니까.”
“나로는 성에 안 차시다?”
“당신이 대통령 선거 나갈래?”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강철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바짝 붙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시간 뒤에 결정해서 이야기해 줄게. 그러니까, 1시간 동안 날 만족시켜 봐.”
그 말에 강철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다 주게 만들지.”
4.
강대산을 죽여서 그렇게 됐건, 엄태욱과 엄근식을 몰아내서 그렇게 됐건, 한준영을 숙청해서 그렇게 됐건.
어쨌건 강철이 벌인 미시적인 행동이 거시적인 역사의 한 부분을 바꾸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강철이 알고 있는 한 역사에 변한 것은 없었다.
나비효과.
강철이 떠올린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4월 12일 목요일 오후 2시 30분에, 잔뜩 만족해 자신에게 일신그룹 비자금 관리를 맡긴 한소영과 함께 회장실에 딸린 접객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강철은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했다.
‘앞으로 10년하고도 7개월 정도. 세상이 망할 때까지 남은 시간.’
4월 13일 금요일 저녁 6시.
강철은 서용태에게 운전대를 맡긴 채 자신의 골덴바움 SUV를 타고 러시아 해외정보국 서울 안가로 가고 있었다.
본래 서용태에게 미하일 킴을 소개해주려고 했지만, 그간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데다가 서용태도 따로 해킹 프로젝트가 몇 개 있어서 시간이 맞질 않았는데, 오늘 드디어 서로 시간이 맞아 만남이 성사가 됐다.
그것을 위해, 강철은 특별히 미하일 킴에게 줄 선물을 들고 가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러시아 정계에 내 끈을 만들어 둔다면…… 어쩌면 10년 뒤에는…….’
그렇게 강철이 자신이 일으킨 그리고 앞으로 일으킬 수도 있을 나비효과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신호를 받은 상태에서, 서용태가 강철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호칭을 뭐라 불러야 합니까?”
“응?”
“아니 그 명길이도 그거로 좀 혼란스러워하고, 최 변호사도 살짝 고민하고 있던데…… 슬 통일된 호칭을 정해주시는 게…….”
그 말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서용태를 바라봤다.
하지만, 막상 통일된 호칭을 지정해주려니, 본인부터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경호실장은 그냥 내가 막 가져다 붙인 거고, 고문도 마찬가지지. 그렇다고 형님이라고 부르라기엔 최 변호사랑은 잘 맞지도 않은 데다가 이 인간들이 어쨌건 다 나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장자라서 내가 불편해.’
일단 강철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서용태는 강철이 마치 답을 할 것처럼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자 황당하단 표정을 짓긴 했지만, 재촉하진 않았다.
당장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한테 소개해준다는 사람이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해외정보국 요원이야. 대위였던가? 고려인 출신이라 한국어에 능통하니까,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거야.”
“그…… 러시아 정보기관 애들하고 엮이는 게 영 꺼림칙해서 그런데…… 괜찮은 거 맞습니까?”
“내가 검증했으니까, 걱정하진 마.”
“제가 같이 일하는 중국애들 중에 그 국가안전부 출신들도 있는데…… 걔들이 그렇게 러시아 정보기관 애들을 싫어해서 말입니다. 적성국이고 우호국이고 다 엿먹이고 다닌다고…….”
그러면서 서용태는 자신이 중국 해커 그룹으로부터 들은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련된 괴담을 강철에게 몇 가지 들려주었다.
미인계부터 일부러 마약을 먹여 중독자로 만든 후 약을 가지고 조종하는 수법까지, 자신이 들은 괴담을 모두 이야기하며 서용태는 자신이 느끼는 꺼림칙함을 숨기지 않고 강철에게 말했다.
“제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걔들이 저를 통해서 그…… 일단 고문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고문님을 곤란하게 하는 게…… 전 두렵습니다.”
그 말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인계에 강제로 약쟁이로 만들어 조종하는 것까지…… 그거 다 내가 한 거 아닌가?”
“네? 아…….”
“이미 그렇게 일하는 사람하고 같이 일하면서 뭐가 두렵다는 거야?”
서용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구해줄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강철과 서용태는 중구 러시아 대사관 근처에 자리한 해외정보국 안가에 도착했다.
해외정보국 안가라곤 했지만, 실제론 연방보안국하고도 같이 쓰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강철과 서용태가 안가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레스토랑처럼 꾸며진 방에 들어갔을 때, 그 자리에는 해외정보국 대위 미하일 킴뿐만이 아니라, 연방보안국 대위 올가 프리마코바까지도 앉아 있었다.
“아, 이번에 대사관에 신임 서기관으로 온 올가 프리마코바입니다. 구면이시죠?”
미하일 킴은 강철에게 올가를 그렇게 소개했다.
강철은 피식 웃으며 올가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올가입니다.”
올가는 살짝 어눌한 한국어로 강철에게 인사했다.
“아직 말은 서툴지만, 그래도 글은 어느 정도 쓰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곤 러시아어로 강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와서 좋네. 극동은?”
“그때 만났던 요원 중에 왜 그 제일 처음 그쪽한테 맞았던 친구가 대위로 진급해서 제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아. 그래?”
그때, 미하일 킴이 개입했다.
“저하고 올가하고 둘 다 진급했습니다. 소령입니다.”
“그렇구만. 잘됐네. 진급 축하도 할 겸, 이거 받으면 되겠어.”
그러면서 강철은 고급 양주 세트 하나와 돈 가방 두 개를 건넸다.
본래 미하일 킴에게만 주려고 했지만, 2개로 나눈 덕에 올가에게도 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그렇게 물으면서도 미하일 킴은 돈 가방을 살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빳빳한 달러를 보고선 활짝 웃었다.
“Спаси́бо!”
돈을 받고 좋아하는 두 러시아인 보안 요원을 보고 한 차례씩 웃은 강철은, 이내 두 사람에게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내가 저번 사건을 겪으면서,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확실히 인맥이 중요하구나 하는 걸 느꼈어.”
그 말에 미하일 킴과 올가 프리마코바는 동시에 강철을 바라봤다.
“그쪽 상관도 좋고, 아무튼 러시아에서 내가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강철의 말에 미하일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근데 일단 소개를 해드리려면 당신의 직함이 정확해야 합니다. 뭐라고 당신을 소개하면 되겠습니까?”
아까 서용태에게 받았던 질문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강철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한 가지 직함이 떠올랐다.
“대표.”
“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대표. 존 크리스토퍼 허버트. 날 그렇게 소개하면 될 것 같아.”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