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잘 나가는 인생 (1)
1.
2011년 2월 25일 금요일.
거목그룹에서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것은 엄태욱-한소영 부부가 결혼 23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곧 기사화됐고,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임신을 축하해주며 마침내 거목그룹의 후계자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됐다고 진단했다.
그랬다.
적어도 외면상으로는 거목그룹의 후계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엄태욱이 회장이 되더라도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 이후의 불확실함이 해소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겐 그러한 언론 보도는 그저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은 헛소리일 뿐이었다.
“아쉽지 않아?”
금요일 밤 9시 30분.
공중파 뉴스에서 엄태욱-한소영 부부의 임신 소식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 있던 강철에게 한소영이 물었다.
“아쉬울 게 뭐 있겠어? 그저 계약대로 되고 있는 건데.”
“계약이라…… 뭐, 그렇긴 한데.”
한소영은 강철의 곁에 앉았다.
“그래도 인간적인 아쉬움이란 건 있을 수 있잖아? 자기 자식인데 자기 성도 못 물려줘, 자기 자식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리지도 못해…… 안 그래?”
“난 그런 미련은 없어.”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강철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미련도 원래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강철은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건 계약이니까……”
“자기답지 않은 변명이다?”
강철은 결국 웃으며 한소영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춰 그녀가 입을 다물게 했다.
“첫째는 엄씨 집안의 혈통이 되겠지만…… 둘째는 강씨 집안의 혈통으로 놔둘까?”
가벼운 키스 이후 한소영은 강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첫째 낳는 것도 굉장히 힘들 건데…… 둘째까지?”
“돈과 현대 의학의 힘이면 그렇게 힘들진 않을 수도 있어.”
“출산 후가 힘든 건 돈과 현대 의학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건 그렇긴 한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거목 지주사 전환 작업은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지?”
강철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한소영도 그걸 알았기에 구태여 더 말을 잇지는 않고, 곧장 강철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본심을 일단은 숨겨둔 채 공통된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같은 시각, 한남동 한경석 자택 별채.
“허어…… 임신을?”
TV로 뉴스를 보던 한경석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껄껄 웃어댔다.
“애인으로 추정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구나. 허허허.”
어차피 엄씨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오니, 한경석 입장에선 살짝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곧 한경석은 한소영이 밴 아이가 엄씨가 아닌, 이름 모를 강인한 경호원의 씨를 받은 존재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신혼 후에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어. 그런데 23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잠자리를 가져서 애를 가진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남녀관계가 그렇진 않지. 암.’
문득 한경석은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 소영이가 딸을 낳으면? 그러면 내가 한경총에 가서 회장들 설득해서 국회에다가 사촌 간 결혼 합법화를 하도록 해서 보성이랑 그 애랑 결혼시키면? 그러면 한 25년 뒤에 자연스럽게 나누어 놓았던 지분이 하나로……’
그러다가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주제에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어.’
재벌들이 자기들에게 별 도움도 안 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 로비할 리도 없었고, 한소영이 딸을 낳을 거란 보장도 없었으며, 설령 사촌 간 결혼이 합법화되고 한소영이 딸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한보성과 한소영의 딸이 결혼할 리도 없었다.
‘내 뜻대로, 우격다짐 식으로 부부관계를 유지시킨 결과가 이 모양인데…… 또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소영의 자식을 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갈 사람은 남은 자들을 위해 준비나 해두고 조용히 떠나야지.’
그 순간, 한경석은 간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어허!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기다려. 조만간 요양원에서 조용히 죽어가게 해줄 테니까.”
한경석은 그런 자신의 간을 향해 거래를 제안한 후 뉴스를 끄고 살피던 서류를 마저 살폈다.
2.
2월 28일 월요일 오전 9시.
일신그룹 임원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다.
<임원 인사이동>
<경영지원실 시장조사본부 본부장 김덕흠 -> 일신레코드 사장(전보)>
<일신레코드 사장 문영훈 -> 경영지원실 시장조사본부 본부장(전보)>
일신엔터테인먼트 자회사이며 온라인 음원 판매 및 오프라인 앨범 제작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일신레코드 사장과 본사 경영지원실 시장조사본부 본부장 자리의 맞교환이었다.
일신레코드가 나름대로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확장을 꾀하고 있고, 2천 년대 중후반 선제적으로 온라인 음원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던 만큼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김덕흠이 잘 된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의 평가도 그랬다.
“경영지원실에 있으면 오너 하고는 가까워도 자기 경력 쌓는 건 좀 불리하긴 해.”
“그래도 레코드 사장이면 나중에 엔터 총괄사장까지도 노려볼 만하지 않아?”
“김 본부장 입장에선 뭐 나쁠 게 없겠지. 안 그래도 요즘 오너 일가 쪽 분위기 이상하잖아?”
“맞아. 이럴 땐 비를 피하는 게 최고야.”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 사원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회, 회장님…… 도,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인사이동 발표가 난 당일, 김덕흠은 그 소식을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공고문을 통해 접했다.
그는 곧장 회사를 나와 한남동 한경석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별채로 들어가 서재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던 한경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 제가 회장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하, 한소영 회장 감시한 건 분명 큰 잘못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한경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성경을 내려놓았다.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 말에 김덕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또 하나 더 있어.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한경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창가로 가 김덕흠을 등진 채 서서 뒷짐을 지고는 말을 이었다.
“모두가 잠언 25장에 나오는 말이야. 너 솔로몬의 재판 알지? 그 솔로몬이 적었다는 말인데, 아주 훌륭한 말이야.”
“회, 회장님……”
“자를까 말까 하다가 그간 그래도 네가 날 위해 그리고 회사를 위해 한 게 있어서 네 지금 직급에 맞춰서 전보시켜준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나 하다가 백수 되지 말고 조용히 모레부터 일신 레코드로 출근해.”
“회, 회장님…….”
“내가 옛날 같았으면 두 번까지 말도 안 했다? 그래도 지금은 성격이 좋아져서 두 번까지는 이야기해주는 거야.”
그러면서 한경석은 고개를 돌려 김덕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용히 지금 당장 일신레코드로 가서 영훈이한테 인수인계 받아. 그게 싫으면, 사표 쓰고 집으로 가.”
김덕흠은 지금 한경석이 짜증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젠장…….’
그는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한준영이한테 보험 들어놓는 게 아니었어…….’
시장조사본부장으로서 그리고 한때 금융관리본부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김덕흠은 꾸준히 한준영에게 지분 이동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경석의 레이더에 포착됐으리라.
“회장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덕흠은 더 이상 한경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한 차례 큰절을 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빠져나갔다.
“쯧쯧쯧. 못난 놈.”
한경석은 그런 김덕흠을 향해 혀를 찬 후 잠시 바깥 풍경을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마저 성경을 읽어나갔다.
3.
월요일 오후 1시.
“김덕흠이 잘렸다?”
[잘린 건 아니고 전보된 거긴 한데…… 사실상 좌천된 거지. 일신엔터 총괄도 아니고 엔터 자회사 사장으로 간다는 거면 뭐…….]
“그래도 그 자리를 새로 차지한다는 사람은?”
[레코드랑 맞교환 형식이라서 지금 레코드 사장으로 있는 문영훈이 올 거래.]
“어떤 사람이지?”
[그냥 무난해. 솔직히 오너 뒤치다꺼리보다는 계열사 하나 맡아서 사업 경영하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시장조사본부 힘을 좀 빼려고 그러시나?]
한소영으로부터 일신그룹 인사이동을 들으며 강철을 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고 있었다.
“일신그룹에 그래도 우리 말 잘 듣는 꼭두각시 하나 놔뒀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나가리가 되면 어쩌자는 건지 참…….”
[너무 그렇게 생각하진 말어. 어차피 알아야 할 정보는 다 얻었잖아?]
“그렇긴 한데…… 아무튼 알았어. 여기 일 끝나고, 집에 가서 보자고.”
[그래. 조심히 들어와.]
전화를 끊고서 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심어둔 스파이가 좌천되는 경우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참나…… 그래, 이렇게 배워나가는 거지. 때로는 조직 내부의 변수가 일에 문제를 준다는 것도 배우는 거고.’
한소영의 말대로 어차피 김덕흠에게선 들을 만한 이야기는 다 들은 상태였다.
당장으로서는 그가 큰 쓸모는 없었기에, 그가 주력 계열사의 자회사로 좌천됐건 어쨌건 하는 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기름이나 넣고 가자.”
어쨌건, 아직은 남의 회사였던 만큼, 일신그룹 내부 문제에 관하여서는 신경을 잠시 끄기로 다짐하고 강철은 기름을 채우기 위해 근처 주유소로 달려갔다.
강서구를 지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는 강서구에 있는 주유소에 들어갔다.
“만땅으로 넣어주십쇼.”
강철은 차창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온 주유소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며 그렇게 주문했다.
“어?”
그런데, 주유소 직원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상당히 앳돼 보이는 외모의 남자는 강철을 보더니 카드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강철도 그것을 느끼곤 주유소 직원을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강철의 말에 주유소 직원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철이 형!”
강철은 살짝 당황했다.
“…… 저를 아십니까?”
“맞네, 철이 형. 나야, 나! 성민이! 기억 안 나?”
“성…… 민?”
“아니 그 형하고 같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연극 준비했잖아. 재작년까지는.”
그 순간, 강철의 머리로 한 소년이 지나갔다.
“…… 성성민?”
“그래! 와…… 아니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날 잊은 거야? 서운한데?”
강철은 살짝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었다.
“이야…… 근데 형 되게 잘 나가는 인생이네? 차가…… 이야…….”
자신의 차를 보며 감탄하는 주유소 직원.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었던, 그러나 회귀 전이나 후나 잊고 있었던 소년과의 만남에 강철은 자기도 모르게 기쁨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