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죽어가는 자 (3)
5.
2월 17일 목요일 밤 9시.
딸 한소영과의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한경석은 차에 올라타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미리 현금 확보를 좀 해두면 좋겠구나, 소영아.”
전후 사정을 말하지 않고 뜬금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한소영은 대강 그게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 살펴 가셔요.”
“그래.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렴.”
한경석은 그러면서 한소영의 뒤에 서 있는 강철을 한 차례 바라보곤 씩 웃었다.
강철도 그런 한경석을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미있는 녀석이야.’
한경석은 시트에 등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본사 인사총괄본부 본부장실로 쳐들어와서 도끼를 들고 행패를 부린 후, 본부장 김유경의 턱을 치고 사라졌다는 남자는, 의외로 가까이서 보니 거칠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단단함이라든가 재벌 총수 앞에서도 여유로운 모습에서 한경석은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소영이가 딱히 밖에 나돌아다니는 애는 아니었는데.’
한경석은 강철에 의해 자기 딸의 인생과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전혀 깨닫지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늦었지만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요즘 것들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나?’
그러면서도 그는 묘하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근데 엄태욱이 그 인간은 알고나 있나? 아니면, 모르는 건가?’
한소영이 거목그룹의 지배자가 되고, 그녀에게 지분의 절반을 증여할 것을 결정하면서 한경석은 인사총괄본부에 엄태욱과 엄근식의 감시까지도 명령했다.
혹여나 그 두 사람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무슨 짓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엄근식은 집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하며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있었고, 그건 아들인 엄태욱도 마찬가지였다.
‘못난 놈…… 사내가 거기가 부실하면 마음으로라도 자기 여자를 잘 보듬고 품어야지…….’
한경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젠 서류상으로나 사위인 엄태욱을 속으로 힐난하고는 폰을 꺼내 김유경에게 전화를 넣었다.
“어, 뭐 따로 얻은 건 없지?”
[네, 회장님. 죄송합니다.]
“그 친구 감시는 이제 그만 해도 돼. 내가 직접 만나 봤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에 엄태욱이랑 엄근식이 두 인간 감시 인력을 더 늘려.”
[네, 알겠습니다.]
같은 시각, 잠원동 펜트하우스로 돌아가는 차에서, 한소영은 조수석에 앉아 강철이 틀어놓은 음악을 듣고 있었다.
[夢中人♬]
“이거 나 대학생 때 듣던 노래인데.”
“명곡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깊이와 감상이 더해지는 법이지.”
“자기가 그런 예술적인 섬세한 감각도 있었어?”
“거친 파도 아래에 잠잠한 심해가 있는 법이지.”
“이상한 비유를 한다고 예술적인 건 아닌데?”
강철은 피식 웃어넘겼다.
그에겐 이런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장 동원 가능한 현금이 얼마나 있지?”
“왜? 증여세 때문에?”
“한경석 회장이 좀 작정하고 증여할 생각인 모양이던데?”
“그렇겠지?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지분의 절반, 그러니까, 12%를 나한테 물려주시는 거니까?”
“12%보다 더 많은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강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설명하지?’
한소영과 한경석은 식사를 하는 내도록 일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한경석은 그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의 일부를, 오랜 세월 자신이 억압했던 딸에게 사죄하는 데 사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경석이 머릿속으로도 일적인 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명으로 명의 신탁해놓은 지분 중 절반까지도 한소영한테 넘기려 하고 있어.’
일신그룹은 지주사다.
㈜일신이 모든 계열사를 아우르는 형태로 그룹 지배 구조가 일원화돼 있다.
현재 한경석에게는 지주사 지분만 있었고, 그 지주사 지분 중 24%만이 순수하게 본인이 가진 지분이었다.
나머지 16%는 탈세를 비롯해 다양한 사유로 명의신탁을 해 놓은 주식이었다.
물론 말이 명의신탁이지, 실질적으론 차명 계좌에 불과했다.
그중 절반인 8%를 현재 한경석은 자신의 지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한경석은 공식적으로 한소영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다.
즉, 한소영이 받을 지분은 12%가 아니라 20%인 것이다.
‘실질적으론 한소영과 한보성 모두 반반씩 지분을 갖게 되는 거지만, 대외적으론 한소영이 공식적인 대주주가 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딸에게 사죄하고 싶어 한다는 게 참 우습긴 하지만, 뭐 그거야 재벌들 사정이고.’
손가락에서 불꽃이 피어나게 하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나타나는 건 마술이라고 어떻게 둘러댈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건, 마술이라고 둘러댈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정도면 마법이다.
“그냥 느낌이 그래.”
그랬기에 강철은 그렇게 둘러댔다.
“여자의 촉은 들어봤어도, 남자의 촉은 못 들어봤는데…… 믿을 만한 거야?”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유비무환이라잖아. 정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고.”
그 말에 한소영은 씩 웃었다.
“맞네. 우리 자기,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실소유주였지?”
“뭐…… 미국 은행에서 대출을 얼마나 해 줄진 모르겠지만, 달러도 나쁘진 않지?”
“환전 수수료는 자기 쪽에서 부담하기다?”
“계산은 똑바로 하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둘이 들어갈 때, 오늘 오전까지 있었던 감시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6.
2월 22일 화요일.
저축은행 부실화 사태가 절정에 이르고,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선 큰 지진이 일어난 날로 기억될 날.
오전 10시, 한준영은 한경석의 집 마당, 별채와 본채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벌써 3시간째 꿈적 않고 있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상태에서 하필 눈까지 내렸기에,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랜 수행의 세월을 겪은 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자식 아직도 있어?”
한준영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별채 내부 서재에선 한경석이 집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흥! 아주 몸이 건강하구나. 응? 아주 건강해.”
한경석은 그렇게 아들을 비꼬곤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그 어떠한 명령도 없었던 만큼, 집사와 가정부들은 한준영을 계속해서 방치했다.
‘내가 어제 차명 계좌 지분 절반을 흡수했고, 금융관리본부에 증여세 계산하라고 명령했어. 근데 하루 만에 저 인간이 저렇게 찾아와서 쇼를 한다고?’
한준영은 예전부터 후계자로 낙점되었던 만큼, 그리고 상당히 오랜 세월 그룹에서 일했던 만큼, 당장 잘랐다고 해서 그의 영향력이 0이 되는 건 아닐 터였다.
한경석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은밀히 지시한 업무가 하루도 안 돼 한준영에게 유출된다는 건,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누굴까? 민재가 직접 그렇게 할 리는 없고…… 덕흠이가 그랬으려나?’
금융관리본부장 조민재는 한준영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도 그랬지만, 비공식적으로도 두 사람은 물과 기름 같았다.
이전에 한준영이 후계자였을 땐 한경석에게 그것이 마음에 상당히 걸리는 부분이었지만, 그가 후계자에서 탈락한 후로는 오히려 좋았다.
어쨌건, 그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한준영의 충신이었던, 그래서 한준영의 사적인 명령을 수행하다 손가락까지 날아갔던 시장조사본부장 김덕흠이었다.
‘덕흠이일 가능성이 높긴 높아. 어쨌건 예전에 금융조사본부에서 일하기도 했으니까.’
한경석은 서랍에서 인사 조직도 파일을 꺼내 펼쳤다.
그리곤 사인펜을 꺼내 조직도에 올라와 있는 임원들 얼굴에 X표를 하기도 하고, 따로 옆에다 코멘트를 적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약 1시간 정도 작업하고 나서, 한경석은 높은 피로도와 눈의 침침함을 느끼곤 작업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집사에게 전화를 넣어 한준영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네, 아직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살아 있으면 쫓아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후, 별채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이거 놔 이 자식들아! 아버지! 아버지!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회장님 명령이십니다.”
끌어내려는 자들과 끌려나가지 않으려는 자의 다툼 속에서, 한준영은 목청껏 한경석을 애타게 불렀다.
“에잉…… 동네 부끄럽게…… 이거 아주 옆집 김 회장이 화들짝 놀라겠어.”
한경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웃의 고충에나 신경 쓸 뿐, 한준영의 애타는 부름 따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다음에 회장님 기분 좋으실 때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한경석의 저택 집사와 경비들에 의해 대문 밖으로 쫓겨난 한준영은 자신을 박대하는 자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너희 이 개새끼들…… 두고 봐. 내가…… 내가 이 수모 반드시 갚아 줄 거니까.”
그는 자신을 붙잡고 끌어낸 자들의 얼굴을 머릿속 깊숙이 남겨두겠다는 기세로 일일이 째려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괜찮으십니까?”
안부를 묻는 운전기사에게 한준영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괜찮아 보이냐? 어? 넌 이게 괜찮아 보여? 에이 씨…… 빨리 가자, 감기 걸리겠다.”
“네, 부회장님.”
이태원동 자택으로 떠나는 차 안에서, 한준영은 한경석의 집 담벼락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의신탁해 둔 지분을 자기가 직접 흡수해서 소영이한테 주려고 해?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그동안…… 씨발 내가 그동안 회사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한경석의 예상대로 한준영에게 관련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김덕흠이었다.
그는 사실상 한소영에게 숙이고 들어간 상태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험 하나 든다는 생각으로 한준영에게도 한 번씩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한준영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한경석의 집으로 아침부터 찾아왔고, 근 4시간을 눈만 맞다가 이렇게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뭔가…… 뭔가를 해야 해. 어떻게든…… 하다못해 그분을 만나서라도…….’
그러나, 그는 당장 어떠한 시도를 할 순 없었다.
2월이긴 했지만, 아직 여전히 추운 날씨에, 진눈깨비라곤 하지만 눈을 맞으며 4시간을 야외에서 버텼던 대가는, 그날 오후에 곧장 지독한 감기의 형태로 한준영에게 나타났다.
“에그.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러게 왜 가서 무릎을 꿇었어? 그냥 날 좋을 때 찾아가서 싹싹 빌었어야지!”
뒤로는 딴생각을 하는 아내 연은진으로부터 타박을 받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에, 그리고 이 나이에 4시간 동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한준영은 서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날 밤 소리죽여 남몰래 울고 말았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