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죽어가는 자 (2)
3.
서울 중구 일신그룹 본사 사옥.
그곳 18층은 모두가 경영지원실에서 쓰고 있었고, 그중 인사총괄본부 사무실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없어?”
18층 정중앙에 자리한 경영지원실장실에서 2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돌아온 김유경은 텅 빈 사무실을 보며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파쇄기 앞에서 서류 수백 장을 갈던 말단 직원의 입에서 나왔다.
“전부 외근 나갔습니다.”
김유경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말단 직원을 바라보았다.
“전부 다?”
“1팀부터 6팀까지는 조사 대상 탐문차 나갔고, 7팀이랑 8팀은 오늘 회장님 의전 때문에 나가 있습니다.”
“그럼 넌 왜 여기 남아 있어?”
“저기 그…… 이거 파쇄를 해야 해서 남아 있습니다.”
김유경은 말다 직원 앞에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 해.”
그리고 그녀는 텅 빈 사무실을 쭉 지나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하긴 감시 대상이 지금 뭐 한 둘이어야지.’
정장 재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 그녀는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잠시 멍을 때리던 그녀는, 커피가 다 내려오자 잔을 들어 그것을 한 모금 마신 후 책상에 살짝 엉덩이를 기대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전부 다 한소영 거목 회장 주변 인물이긴 한데 말이지.’
1팀은 연은진을 감시하고 있었다.
2팀은 한소영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경호원을 감시하고 있었고, 3팀은 엄태욱을, 4팀은 엄근식을 감시하고 있었다.
‘5팀하고 6팀이 누구더라? 아, 그 근본 없는 이사들이었지.’
그리고 5팀과 6팀은 각각 김명길과 김형만을 감시하고 있었다.
‘진짜 애인일까? 아니면 경호원? 철우 말로는 그 인간이 김덕흠 손가락 잘랐다고 하던데…….’
시장조사본부가 한준영의 명령으로 한소영을 감시하다가, 본부장인 김덕흠의 손가락이 날아가는 참사가 일어났다는 소문은 이미 사내에 쫙 퍼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김유경은 직접 그 장면을 보았던, 자신의 외사촌 동생이기도 한 시장조사본부 3팀장 배철우에게 그 손가락을 자른 사람이 애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동일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원래 거목이 깡패들하고 어울리면서 사업을 더럽게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가락을 자르는 건 좀…….’
그러면서 김유경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잔을 살짝 기울였다.
“그쪽 손가락은 안 잘릴 것 같나?”
“악-!”
그러다 김유경은 갑자기 들려온,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살짝 미지근해져 있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뜨거웠기에 김유경은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 통증조차도 잊게 만드는 한 존재의 등장에, 그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떨리는 눈으로 그 존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희 일신그룹은 참 웃겨. 시장조사본부가 하라는 시장조사는 안 하고 사람을 감시하질 않나, 인사총괄본부는 아예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감시하질 않나…… 유일하게 이름값 하는 건 금융관리본부 정도인 것 같단 말이지.”
김유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 설마 이 사람…….’
그녀는 곧장 자기 눈앞에서 도끼를 든 채 서 있는 남자, 강철이 자신이 감시하는 대상-한소영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존재와 동일인임을 확인했다.
‘어, 어떻게…….’
당황하는 와중에도 김유경은 일단 먼저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책상 위에 놓인 경호원 호출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녀 딴에는 은밀하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강철에게는, 구태여 관심법 없이도, 그 의도가 포착됐다.
“지금 그 상태에서 손가락 하나라도 더 움직이면 그대로 도끼가 날아갈 거야.”
강철은 도끼를 던질 자세를 취하며 그렇게 김유경을 협박했다.
협박은 바로 먹혔다.
김유경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나오진 않았다.
‘밖에 애를 들어오라고 하면…… 어떻게든…….’
그러나 바깥의 말단 직원은 지금 수백 장의 서류를 파쇄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말단은 함부로 본부장실에 들어오질 않는다.
‘젠장…… 2팀장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김유경의 모든 생각은 강철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강철은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천천히 김유경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쿵-!]
김유경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자, 강철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에 그녀 앞에 도달한 강철은 그대로 도끼로 책상을 내리찍었다.
“으윽…….”
도끼는 정확하게 김유경의 손가락 끝을 살짝 스치며 책상에 찍혔다.
김유경은 오금이 저리는 것과 동시에, 오줌보가 터지려 하는 걸 느꼈다.
다행히 오줌을 지리거나 하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배후가 누구지?”
강철은 그런 김유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연히 김유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그녀의 내면에선, 자연스럽게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한경석 회장이 명령했다고?’
강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경석은 왜? 어차피 한소영한테 지분 줄 거 아닌가? 혹시 연은진하고 만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강철은 그대로 도끼를 쥐지 않은 왼손으로 김유경의 멱살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한경석 회장이지?”
일단 유도심문이 필요했다.
강철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마치 모르는 양 그녀에게 물었다.
김유경은 살짝 당황했다.
“맞구만.”
마치 유도심문을 통해, 그녀의 표정 변화만 읽고서도 맞췄다는 듯 연기하며 강철은 계속해서 물었다.
“왜 한경석 회장이 날 감시하라고 했지? 내가 뭐라고?”
당연히 김유경의 입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김덕흠과는 달리, 그녀는 그런대로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것과 별개로, 그녀의 내면까지 조용한 건 아니었다.
‘한소영 거목 회장의 애인이 맞아? 그냥 단순 경호원인가? 아니, 애인이건 경호원이건 어디서 이런 괴물을 구해온 거지? 회장님한테는 뭐라고 보고해야 하지? 아니, 내가 보고할 수는 있을까? 손가락이 아니라 목을 자를 기세인데?’
시끄럽게 아우성치는 그녀의 마음의 소리.
그것을 가만히 관심법을 통해 인지하던 강철은, 마침내 왜 한경석이 자신을 감시하게 시켰는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딸 걱정이시다?’
강철은 피식 웃었다.
그는 김유경의 멱살을 놓았다.
김유경은 이번엔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책상을 쥔 채 가까스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 물음에 강철은 도끼를 바지 뒤쪽에 넣는 행동으로 답변했다.
김유경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본부장 양반.”
그런 김유경에게 강철은 경고했다.
“앞으로 우리 한소영 회장님하고 내 주변에 감시자가 또 붙으면, 그땐 이 빌딩 전체를 불태울 수가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허세였겠지만,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몰래 침투해온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김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뻑-!]
강철은 그대로 김유경의 턱을 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은신을 펼쳐 모습을 감췄다.
4.
2월 17일 목요일 저녁 7시.
중구 가야호텔 VIP라운지.
“어머,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한소영이 굉장히 미안해하며 한경석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던 한경석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딸을 반겨주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도 조금 전에 왔어.”
그러면서 한경석은 한소영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서 따라 들어온 한 남자를 바라봤다.
‘이 친구가 그 친구?’
김유경에게 받아 보았던, 한소영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사진과 한소영의 뒤에 붙어 있는 강철의 몽타주를 비교하며, 한경석은 딸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곧 음식이 나왔고, 한경석과 한소영은 비즈니스랑은 거리가 먼, 아주 소소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속이 말이 아니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약간 떨어진 거리에 서서 바라보며, 관심법을 통해 두 사람의 내면을 읽고 있던 강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한소영은 한경석을 여전히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함을 느끼고 있고, 한경석은 또 한경석 나름대로 한소영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어. 부녀가 아주 쌍으로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이 참 보기 그렇네.’
한경석이 자신을 감시하게 만든 이유.
그건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확인한 강철은 더 이상 감시자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한소영에게서 딸이 태어난다면…… 나도 한경석과 같은 마음이 될까?’
강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1시간 정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끝마친 두 사람이, 막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를 먹고 있었을 때, 별안간 한경석이 자기 경호원들에게 모두 자리에서 비키란 명령을 내렸다.
뭔가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음을 눈치챈 한소영도 강철에게 자리에서 비키라 명령하려고 했다.
“아니야. 저 친구는 잠시 남아 있으라고 해.”
그러나 한경석이 나서서 강철을 남게 했다.
‘흐음…….’
관심법을 통해 강철은 한경석의 의도를 읽고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을 내색하진 않았다.
일신그룹 쪽 경호원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VIP라운지에는 강철과 한경석 그리고 한소영 세 사람만이 남게 됐다.
“이리 와서 앉게.”
한경석은 의자 하나를 빼서 강철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강철은 한소영을 바라봤다.
한소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강철은 자리에 앉았다.
강철이 자리에 앉자 한경석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한소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소영이를 잘 부탁하네.”
그는 딱 그 말만 강철에게 전했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러나 관심법을 통해 그의 생각을 꿰뚫고 있던 강철은,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내 자존심 때문에 평생 과부처럼 살게 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자네가 이 아이에게 여자의 즐거움을 알게 해 주게.’
한경석이 속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한경석은 강철의 손을 잡은 채로 한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영아.”
“네, 아버지.”
“내가 미안했다.”
역시 한경석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관심법을 통해 강철은 그의 속마음을 읽었고, 그게 자신을 향한 생각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한소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도 후회하고 있었다.
이혼하고 싶단 생각 하나로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하는 데 동조한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한준영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것을.
‘후회할 짓은 애초에 안 해야지.’
부녀의 마음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강철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근데 나도 결국 후회할 짓을 했잖아. 뭐, 덕분에 이렇게 다시 인생을 살고는 있지만.’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