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죽어가는 자 (1)
1.
2월 14일 월요일 밤 11시.
한남동 자택 별채 서재에서 한경석은 말없이 성경을 읽고 있었다.
비단 성경뿐 아니라, 최근 그는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같은 불경과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 기타 같은 힌두교 경전 등 다양한 종교 경전을 탐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의 경구를 읽고서, 한경석은 성경을 덮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은 날이 추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새로운 생명이 봄을 맞이하여 활짝 피어오를 준비가 돼 있는 것이 한경석의 눈에는 보였다.
‘길면 1년…… 짧으면 반년…….’
오늘, 복수의 의료진으로부터 받은 공통된 건강검진 결과 확인된, 남은 그의 수명이었다.
‘내가…… 그래…… 내가 신이 아니니까, 죽겠지. 죽긴 하겠는데…….’
한경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올라왔다.
‘믿었던 자식 새끼한테 뒤통수를 맞고 죽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한경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땐, 땅이 빗물에 젖어 있거나 혹은 눈이 약간 쌓여 있을 수도 있어 보였다.
한경석은, 그러한 구름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존재에게, 자신이 성경과 불경, 힌두교 경전 등을 통해 알게 된 존재들에게, 호소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씨팔.”
한경석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생에 자기네들하고 무관하게 살았는데…… 이제 와 따져본들 무엇하리오?’
한경석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삐-! 삐-!]
그리고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책상에 놓인 전화기에서 짧은 신호음이 울렸다.
한경석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김유경 본부장이 뵙길 청합니다.]
“들어오라 해.”
[네.]
잠시 후, 서재 문이 열리며 정갈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여성은 한경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책상으로부터 2m 정도 떨어진 거리의 자리까지 와서 멈춰선 후 입을 열었다.
“한소영 거목 회장과 연은진 씨가 오늘 접촉했습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진 알아냈고?”
“구체적인 이야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연은진 씨는 무언가를 제안하며 호소했고 한소영 거목 회장은 난색을 표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소영이 보여주었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일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본심을 숨기고, 상대방의 반응을 더 살피는 것.
겨우 집에서 오빠인 한준영이 독차지하던 장난감과 간식 등을 얻어내는 데에나 쓰이던 어린아이의 협상 방식이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쓰이는 것이다.
‘어릴 땐 준영이한테 뭔가를 얻어내려고 그랬는데, 이젠 반대가 됐네. 허허.’
한경석은 이것이 못내 씁쓸했다.
“보나 마나 소영이한테 지분이 간다는 소문을 듣고서, 뭐 어떻게 쇼부를 보자고 했겠지. 지분을 전부 보성이한테 주고 대신 거목하고 충돌하는 계열사 몇 개 가져가라,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러면서 한경석은 눈을 빛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어쩌면 그 지분을 보성이가 아니라 자기한테 넘기라고 했을 수도 있고. 연씨 집안 인간이니까, 그 정도 발칙함은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지. 안 그래?”
한경석의 물음에 김유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경석도 답변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준영이 쪽은?”
“계속 자택에서 칩거하며 숨 고르기를 하는 중입니다. 한 번씩 김덕흠 본부장이 찾아가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는 따로 인적 교류는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한준영 씨가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이후론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한경석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야. 정치하는 것들 믿지 말라고. 쯧쯧쯧.”
혀를 차며 자기 아들을 비웃는 한경석에게 김유경은 자신이 보고해야 할 마지막 사안에 관해 언급했다.
“그리고 한소영 거목 회장에게 따로 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경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 신원은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거의 24시간 한소영 거목 회장의 곁에 머무르면서 밀착 경호를 하고 있습니다.”
“…… 그냥 경호원이 아닌 것 같으니까, 유경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김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디?”
“못생기진 않았습니다.”
“잘생겼냐 물었는데 못생기진 않았다는 게 무슨 대답이야? 못생긴 게 아니면 잘생긴 거란 소리잖아.”
“남자답게 생겼습니다.”
한경석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그 남자 신상명세 뽑아서 나한테 가져다줘. 가능하면 일주일 내로.”
“네, 알겠습니다.”
김유경은 한경석이 별다른 말이 없자 그대로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곤 서재를 나섰다.
‘소영이가 남자 애인을 뒀다?’
한경석은 피식 웃었다.
‘하긴 남편이란 인간이 그 모양이니까, 뭐 이상할 건 없지.’
문득, 한경석은 한소영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크게 올라오는 건 느꼈다.
‘그냥 이혼하고 싶다고 할 때, 이혼하게 내버려 둘 걸 그랬어…… 괜히…….’
한경석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경석은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넣었다.
‘자나?’
신호음이 30초를 넘기자, 한경석은 전화를 끊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45초가 됐을 때, 신호음은 멈췄고, 상대방은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이 시간엔 어쩐 일이세요?]
“어, 소영아. 자고 있었어?”
[아니요. 이제 자려구요.]
“너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냐? 밥이나 먹자.”
[이번 주요? 일단 스케줄 확인하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그래. 잘 자고, 항상 몸 건강히 잘 챙겨.”
[네, 아버지도요.]
딸과의 통화를 끝내고, 한경석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죽을 땐 죽더라도…… 꼬인 매듭은 풀고 죽어야지.’
2.
한소영의 공식적인 직책은 거목개발계획 이사였다.
언론에서도 한소영을 소개할 땐 거목개발계획 이사, 혹은 거목그룹 이사 정도로만 소개했다.
그러나 그런 공식적인 보도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한소영을 회장이라 칭했다.
그리고 한소영이 거목의 회장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숱한 감시자의 눈길이 그녀 주위에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강철에게 걸렸던 게 김덕흠이었다.
그리고 김덕흠이 대표적으로 걸려서 강철에게 혼이 난 이유 중 하나는, 강철이 관심법으로 그 감시자의 생각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막무가내로 다 때려잡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단순히 취재 차원에서 혹은 개인 소장이라는 기괴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붙어 있는 감시자까지는 따로 강철이 떨궈내진 않았다.
『단순 취재원은 그냥 내버려 둬. 그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그것은 일정 부분 한소영의 뜻도 반영된 것이었다.
‘한소영을 감시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겠는데…….’
2월 17일 목요일 오후 2시.
헬스장에서 운동을 끝내고, 서용태와 미하일 킴의 만남 주선을 위해 막 용산으로 움직이려던 중에, 강철은 자신에게 붙은 감시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소영이 아니라 나를 감시한다고?’
강철은 그대로 차를 타고서 용산이 아닌 마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흰 세단도 그를 따라 다소 거리를 둔 채 마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추격전이 이어졌고, 그 추격전은 CCTV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인적 드문 일방통행 도로에서 강철이 차를 세우면서 일시 중단됐다.
‘감시자로서 자질은 좀 부족하네.’
강철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흰 세단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물론, 흰 세단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있는 두 남자가 본 것은, 그냥 차 문이 열렸다가 닫힌 것뿐이었다.
은신을 펼친 채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오는 강철의 모습 같은 건, 두 사람의 눈에도 그리고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은밀하게 두 사람에게 접근한 강철은 운전석 옆에서 은신을 풀고는 곧장 주먹으로 차창을 때렸다.
[펑-!]
차창은 산산 조각났다.
강철은 곧장 운전석에 앉은 감시자의 멱살을 잡고 그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
“크아악-!”
끌려 나오면서 깨진 유리에 몸이 긁히긴 했지만, 감시자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랬기에 강철은 마음 놓고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 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자, 잠깐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남자가 당황하며 양손을 들었지만, 강철에겐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펑-!]
강철은 이번에도 차창을 깬 후 조수석의 카메라맨까지 멱살을 잡아 차 밖으로 끌어내 도로에 패대기쳤다.
“크으윽…….”
“으으으…….”
고통에 신음하는 두 사람을 일단 내버려 둔 채, 강철은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그리곤 저장된 사진을 쭉 확인해 보았다.
모두 자신의 사진이었다.
“하-!”
강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카메라를 한 손에 든 채 두 감시자의 생각을 관심법으로 읽었다.
‘김유경 본부장?’
두 사람의 머릿속에 지금 떠올라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유경 본부장이었다.
‘일신그룹? 하!’
강철은 헛웃음을 한 차례 더 터뜨렸다.
그리곤 감시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뭐야?”
그 말에 카메라맨이 양손을 앞으로 내민 채 말했다.
“저기 그…… 이게 오해가 충분히 있을 상황이긴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카메라맨은 왼손은 여전히 앞으로 내민 채 오른손으로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강철에게 건넸다.
강철은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일신엔터테인먼트 캐스팅 총괄부장 오태규.’
강철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명함을 구겨 바닥에 던지곤 그대로 카메라맨, 오태규의 가슴팍을 발로 밟았다.
“컥-!”
강철의 거친 반응에 오태규는 화들짝 놀랐고, 바닥에 쓰러지면서 받은 충격에 고통스러워했으며, 자신의 가슴에 올라온 발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힘에 공포를 느꼈다.
“저, 저기요……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 저희는 그냥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캐스팅을 하려……”
오태규의 곁에 있던 운전자가 당황하며 어떻게든 강철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강철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신엔터테인먼트 캐스팅부서가 언제부터 본사 인사총괄본부장의 말을 들었지?”
순간 오태규와 운전자 모두가 당황했다.
특히 오태규의 안색은 완전히 사색이 돼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강철은 그런 오태규에게 물었다.
“김유경이 지금 어디 있지?”
“그, 그게…… 으아악-!”
오태규가 속으로 이 상황을 모면할 거짓말을 만들기 시작하자 강철은 발에 힘을 상당히 세게 줬다.
오태규는 심장과 허파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거짓말을 구상하지도 못한 채 진실을 말해버렸다.
“보, 본사! 본사 18층 사무실에 계십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