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분할상속 (3)
5.
2월 7일 월요일 저녁 7시.
“표정이 왜 그래?”
한소영의 아파트에서, 그녀와 함께 밥을 먹던 강철은 그녀의 물음에 흠칫 놀랐다.
“응? 뭐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며, 강철은 한소영을 바라보았다.
“자기 표정이 별로 안 좋아서.”
“아…… 일신그룹 관련해서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말이지. 신경 쓰지 마.”
“눈앞에서 그런 표정 짓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어?”
그러면서 한소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내가 임신한 게 싫어?”
그 물음에 강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말했다.
“싫은 건 아니야.”
“싫은 건 아니다? 그럼, 좋은 것도 아니네?”
“좋고 싫고의 개념보다는…… 그냥 좀…… 아무튼 묘해.”
“묘하다?”
“이제 겨우 여자를 알게 된 지 1달이 조금 지났는데, 벌써 내 애가 생겼어. 당연히 기분이 묘하지.”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스물이지?’
강철과 만나고 나서,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과 잔혹함, 냉철함, 단호함과 같은 성격 때문에 한소영은 종종 그가 이제 겨우 스물이라는 사실을 잊곤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살아온 시간만 계산하면, 강철과 그녀의 나이는 똑같긴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한소영에게, 강철은 결국 스무 살 어린 청년일 뿐이었다.
‘이런 면에선 아직 그래도 청년 같네.’
한소영은 씩 웃었다.
“다들 그래.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럴 거야.”
“아이는 엄태욱의 자식이 될 거야. 그게 우리 계약이었고.”
“알아. 그래도, 실제론 자기 자식이잖아. 안 그래?”
강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소영도 더 이상 이 이슈로 대화를 길게 이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언니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연은진의 접촉에 대한 물음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일신그룹 분할상속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지. 어쩌면 빅딜을 추진하려 할 수도 있고 말이야.”
“빅딜?”
강철은 한소영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연은진 쪽에서도 생각 중일 수도 있는 거목-일신 빅딜을 이야기해주었다.
“흐음…… 일신에 대한 내 지분을 넘기는 대가로 건설과 화학 쪽 계열사를 받아온다? 나쁘진 않네?”
“하지만 절대, 분할상속이 확정되기 전엔 외부에 유출되어서도 안 될 구상이지.”
“언니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확답을 주지 말란 거지?”
“그렇지.”
“뭐, 그거야 당연하지. 어차피 애타는 쪽은 그쪽일 거니까. 내가 대답을 안 해주면 그쪽이 더 안달이 날 거야. 그럼 우린 더 좋은 조건을 받아올 수 있을 거고.”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씩 웃었다.
“한준영은 반격 능력을 아예 상실했다고 봐도 되나?”
“오빠? 당연하지. 거목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일신도 만만찮게 회장 독재거든. 아버지가 작정하고 오빠를 밀어내려고 하는데, 오빠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면서 그녀는 한준영의 현 상태에 대한 자신의 진단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서 강철에게 말해주었다.
“지금 오빠는 그냥 돈 많은 중년 남성일 뿐이야.”
“돈 많은 중년 남성이라…….”
문득 강철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일 안 그래도 그런 사람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한소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굴? 오빠를?”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포크로 한소영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속에서 태어날 아이의 법적 아버지가 될 사람 말이지.”
한소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싫다.”
“너무 그러진 마. 덕분에 그 아이에겐 정통성이란 게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그 말에 한소영은 피식 웃었다.
“정통성은 법적으로 엄씨 족보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의지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나?”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정하진 않겠어.”
잠시 후, 식사를 끝마치고, 오랜만에 길동으로 돌아가려는 강철을 한소영을 붙잡았다.
“임신했잖아. 그러면 자중해야지.”
“초기잖아. 그리고 임신한 상태에서 하는 게 아이한테도 좋데. 의사가 그러더라고.”
그리고 강철은, 그날 밤도 결국 한소영과 함께 그녀의 아파트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6.
2월 8일 화요일 오전 11시.
“오랜만이네? 그래, 한소영이랑은 지낼 만하고?”
도곡동 아파트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엄태욱은 강철을 맞이했다.
“그 여자가 아직도 만족하고 있는 걸 보면, 그쪽은 이게 아주 대단한 모양이야?”
엄태욱은 강철은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자기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몇 달 후에 한 회장의 임신 소식이 발표돼.”
그런 엄태욱에게 강철은 통보했다.
“결혼 20년이 지나서 생긴 자식이야. 언론 인터뷰가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 준비를 해 놔.”
엄태욱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강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을 내리고 가만히 강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아주 한 달 내도록 붙어먹은 모양이야? 아주 한소영 그년한테 쥐어 짜였겠어?”
엄태욱의 말에 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뻑-!]
그저 발로 그의 면상을 걷어차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크윽…….”
엄태욱은 코를 양손으로 쥐며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곧 방바닥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네가 돈 많은 중년 남자로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앞으로 그 아가리는 정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
“명심해. 네가 한 회장이 낳을 아이의 법적 부친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롭게 노동하지 않고도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삶을 허락받았단 걸.”
“…… 항상 잊지 않고 있어. 걱정하지 마.”
강철은 품에서 ‘위스키’ 100알이 든 지퍼백을 꺼내 엄태욱의 발치에 던졌다.
“그리고 이 약이 공짜로 공급되는 것도.”
엄태욱의 표정이 환해졌다.
“적극적으로 시키는 대로 다 하지. 헤헤헤.”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번들거리는 눈으로 ‘위스키’가 든 지퍼백을 집어 드는 엄태욱의 모습은 추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인성 수준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겠어.’
강철은 그런 엄태욱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현관으로 나갔다.
그가 현관으로 나가자 대기 중이던 최용대가 엄태욱에게 위스키 1병과 컵 하나를 가져다준 후 재빨리 강철의 뒤를 따라 현관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던 강철은 최용대가 나오자 그를 보며 물었다.
“요즘 엄태욱의 상태는?”
“그냥 두문불출입니다.”
“폭력적 성향이라든가, 기괴한 성적 지향 같은 건?”
“그…… 수간은 아예 안 보고 있고, 그냥 가끔 제가 강남 텐프로들 둘 정도 데려오면 같이 하루 종일 뒹굴 뿐입니다. 아, 그리고 요즘 저한테 손도 안 대고 있습니다.”
“흐음…….”
폭력적 성향과 변태 성욕이 모두 감소됐다는 보고에 강철은 흥미를 느꼈다.
‘약의 효과인가? 아니면, 모든 권력을 잃고 그냥 포기해서 성격이 유해진 건가?’
그러나 강철이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는 아니었던 만큼, 그리고 그 분야에 큰 관심은 없던 만큼, 그 이상을 생각하거나 하진 않았다.
“저기 그……”
일단 물어볼 건 다 물어봤고, 들을 대답도 다 들었고, 엘리베이터까지 도착했기에 강철은 그대로 최용대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막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최용대가 그를 붙잡았다.
“할 말이 더 있나?”
강철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때까지 발동하지 않고 있던 관심법을 발동했다.
“저는…… 계속 거목 소속인 겁니까? 공식적으로?”
그러나 최용대가 부른 목적이 자기 개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질문 때문임을 알고는, 이내 곧장 관심법을 풀었다.
‘이 새끼가 에너지 아깝게.’
강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전하고 달라진 건 없어.”
그 말에 최용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런대로 퇴직금은 챙길 수 있게 생겨서…….”
강철은 다시 관심법을 발동했다.
‘그만두고 싶으시다?’
그리고 그는 최용대의 퇴직 욕구를 읽고는 코웃음을 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 아니 왜, 왜 그러십니까?”
당황하는 최용대의 멱살을 강철은 붙잡았다.
그리곤 그대로 그를 들어 올렸다.
“크윽…… 아, 아니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이, 최용대.”
“네, 네.”
“옥상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이유는, 그쪽이 쓸모가 있어서야. 그런데 퇴직을 하면, 쓸모가 없어지겠지? 그러면, 다시 옥상 밑으로 던져도 되겠지?”
최용대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그를 향해 강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 입에서 그만둬도 된다는 말이 나오기 전까진, 절대 그만두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어?”
최용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은 그를 가볍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곧 강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고, 혼자 남은 최용대는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흐으으으…… 흐흐흐흐……”
엄태욱은 이미 ‘위스키’에 취해 환상의 나라로 떠난 뒤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최용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인간이 사라지면…… 그땐 나도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저 인간과 함께 사라지는…….’
최용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7.
연은진이 김덕흠을 통해 한소영에게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나서 딱 1주일이 지난 2월 14일 월요일에, 한소영은 연은진에게 오는 수요일 저녁에 보자는 연락을 김덕흠을 통해 넣었다.
“그냥 서로 직접 통화나 문자로 약속 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번거롭게 중간에 김덕흠을 끼고 소통하는 모습에, 강철은 한소영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 번호 몰라.”
그리고 한소영은 아주 깔끔하게 강철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소영은 2월 16일 수요일 저녁에 연은진과 강남 일식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자기 말대로야. 내가 받을 지분을 넘기는 대가로 건설이랑 화학 계열사 가져가래.”
그리고 한소영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강철에게 연은진과의 만남에 관한 구두 보고를 시작했다.
“근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지분을 보성이가 아니라 자기한테 넘기래.”
한소영이 전한 말에 강철은 코웃음을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보국그룹에 아버지 지분을 넘겨?”
순간, 강철은 한소영의 말에서 그리고 그녀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묘한 역설을 느끼며 씩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참 묘하네.”
그런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시끄러.”
그러면서 그녀는 마저 옷을 벗고, 강철의 곁에 누우며 말했다.
“어쨌건, 언니도 뭔가 야망이 있어 보였어. 단순히 보성이의 보호자로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닌 모양이야.”
그녀는 가만히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언니한테도 남자가 생긴 걸까?”
강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나 같은 남자는 아니겠지.”
그 말에 한소영은 격하게 공감했다.
“자기 같은 남자가 둘이나 있으면, 이 나라엔 재앙이지. 안 그래?”
그러면서 한소영은 강철을 꼭 껴안았다.
“자기 같은 남자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이 나라에도, 나한테도.”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