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분할상속 (2)
3.
2011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4일 금요일 오후 1시.
강남구 삼성동 단독주택가.
그곳에서 가장 큰 대지 면적과 건평을 자랑하는 집.
“우준이는?”
“내가 담당 검사한테 직접 찾아가서 겨우 기소유예로 만들었다. 하여간…… 약쟁이 새끼들 의리란…….”
2011년 현재 재계 서열 8위의 대기업 집단인 보국그룹의 회장 연승준의 차남이자 보국그룹 부회장인 연명진은, 자신의 집 거실 소파에서 구시렁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연명진을 향해, 그의 동생이자 일신그룹 부회장 한준영의 부인인 연은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우준이도 이제 철들 때가 안 됐나?”
“내 말이 그 말이다. 이 자식은 하여간 자기네 애미를 닮아서 그런가 나이를 처먹어도 양아치 기질을 못 벗고 있어. 해병대에라도 보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나…….”
“해병대 같은 소리 하네…… 군대나 보낼 생각은 있고?”
연은진의 물음에 연명진은 자기가 생각해도 웃겼는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리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연은진에게 물었다.
“군대 하니까 생각나서 그런데, 보성이는 잘 지내고 있고? 걔 공사에 있다고 했나?”
“아이고? 꼴에 외삼촌이라고 관심은 가지고 있네?”
“어허…… 보성이를 내가 얼마나 아꼈는데, 알잖아? 에효…… 그래도 보성이랑 우준이랑 같은 중학교 다닐 땐 그래도 새끼가 사촌형 무섭다고 얌전히 지내더니만…… 고등학교에서 갈라지니까……”
조카의 근황에 대한 질문에서 다시 자기 아들에 대한 불평으로 연명진이 화제를 바꾸자, 연은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한숨은 내가 쉬어야지, 왜 네가 쉬냐?”
그 모습을 보고 연명진은 그렇게 물었다.
연은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연명진을 바라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은…… 아니 왜 내가 저번에 물었던 거 있잖아.”
“뭐? 아, 그 뭐 거목그룹 대출 만기 연장 막는 거?”
“그래, 그거.”
“안 그래도 말해주려고 했는데, 어려울 것 같아. 거목에서 그냥 갚겠다고 했데.”
“그래, 나도 그 이야긴 들었어. 근데…… 내가 그 거목 때문에 지금 미치겠다.”
“왜? 한소영이가 뭐 일신그룹 지분까지 내놓으라고 하고 있어?”
“한소영이 그러는 게 아니라, 아버님이 그러고 계신다.”
“뭐?”
연명진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연은진은 자신이 한준영에게서 1차로 듣고 그 뒤에 2차로 따로 그룹 임원들에게 알음알음 물어봐 알게 된, 한경석 회장의 분할상속 계획을 알려주었다.
가만히 연은진의 이야기를 듣던 연명진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한 차례 감탄사를 터뜨리더니 한마디 던졌다.
“나도 아버지한테 그렇게 하자고 할까? 나하고 형님하고 분할상속하라고?”
그런 연명진의 말에 연은진은 고함을 질렀다.
“오빠!”
“아 깜짝이야! 나 귀 안 먹었어! 살살 말해!”
“나 지금 심각해.”
“아니, 심각할 게 뭐 있어?”
“심각할 게 뭐 있다니? 순식간에 남편이 빈털터리가 됐는데?”
연은진의 말에 연명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각설탕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녹여 먹으며 말했다.
“그러니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야? 못난 남편 뒷방으로 보내고, 아들 앞세워서 네가 일신 접수하면 되잖아.”
“…… 뭐?”
“너 정토그룹 정 회장이 아들이랑 딸한테 회사 나눠주는 거 알고 있지?”
뜬금없이, 자기들과 별 관계도 없는 다른 재벌 그룹 이야기를 연명진이 꺼내자 연은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 왜, 유통 쪽은 아들한테 주고 건설이랑 호텔은 딸한테 주고 있잖아.”
“그래, 알아. 근데 그게 왜?”
“차라리 이 기회에 일신에서 떼어낼 사업은 떼어내고 강점인 사업만 챙겨서 네가 아들이랑 같이 독립하란 말이야.”
연은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명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머리를 굴리고 있음을 알고서, 연명진도 추가로 뭐라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각설탕만 계속 주워서 먹었다.
그렇게 3분 정도가 지나고, 연명진이 각설탕 8개를 먹었을 무렵, 연은진은 입을 열었다.
“아가씨랑 어떻게 나눠야 할까?”
그 물음에 연명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건 네가 한소영이랑 이야기할 문제지.”
그 말에 연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4.
보국그룹은 2016년 2대 회장 연승준이 81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연경진과 연명진 두 형제가 공동회장으로 취임해 각자가 부회장 시절부터 이끌었던 사업 부문을 독립적으로 총괄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곧 보국그룹이 평화롭게 분할될 것이며, 방산과 중공업은 연경진이 가져가고 금융과 호텔·관광은 연명진이 가져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그 전망대로 일이 진행되진 않았다.
2016년 연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국정농단 사태에 보국그룹도 당연히 휘말렸고, 연명진이 보국그룹이 연관된 모든 뇌물공여 및 부정청탁 의혹의 주범으로 찍히면서, 자연스럽게 그룹 내에서 축출되었고 그 틈을 타 연경진이 보국그룹 전체를 집어 삼켜버렸다.
“그…… 하, 한 회장님은 어디 계십…… 니까?”
2월 7일 월요일 오후 4시.
거목그룹 본사 25층, 회장 집무실 옆에 딸린 조그만-그러나 20명 이상은 수용 가능한 크기의 비서 사무실에서 강철은 김덕흠과 대면하고 있었다.
김덕흠은 강철을 보며, 왼쪽 중지가 서늘하게 시려옴을 느꼈다.
그는 왼쪽 중지 부분의, 잘린 단면을 긁적이며 강철에게 한소영의 소재를 물었다.
“회장님이 뭐 그쪽이 보자고 하면 무조건 얼굴을 비추는, 그런 한가한 분인가?”
“아, 아, 아닙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회장님은 지금 외부 일정을 소화 중이시니까,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나한테 하면 돼.”
“아…… 저…… 그……”
김덕흠은 생각했다.
‘전속 경호원이라면서 왜 여기 남아 있어?’
그리고 그 생각은 그대로 강철에게 전달됐다.
“경호원인데 회장님 외부 일정에 안 따라간 게 이상한가?”
김덕흠은 화들짝 놀랐다.
“네? 아, 아…… 그, 그게…… 아, 아닙니다.”
“용건이 뭐지?”
“그게…… 사모님이 회장님과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미 관심법으로 김덕흠의 생각은 모두 읽고 있었지만, 그래도 절차는 필요했다.
“사모님? 연은진 씨를 말하는 건가?”
“네? 아…… 네. 맞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 그건 저도 잘……”
연은진이 한소영과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전령으로 보낸 사람이 김덕흠이다.
문제는 김덕흠은 그저 그 말만 전달받았을 뿐, 이유까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한소영한테 전화로 직접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강철은 그 부분이 의아했지만, 따로 캐묻진 않았다.
“뭐, 회장님의 친인척과 관계된 일이니까, 내가 잘 전달하지. 뭐, 더 할 말이나 볼 일이 있나?”
“네?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가 봐. 따로 내가 연락을 해 주지.”
“아, 알겠습니다.”
김덕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철은 그와 함께 비서 사무실을 나서서 직접 엘리베이터에 태워주었다.
“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김덕흠은 강철에게 물었다.
“그 직책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시는지?”
그 물음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경호실장이라고만 알아 둬.”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강 실장님.”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는 김덕흠의 모습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본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비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저 정도 감이 있으니까, 그리고 저 정도로 비굴할 줄 아니까 대기업에서 고위직까지 올라간 거겠지?’
김덕흠이 강철에게 직책을 물어본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그와 만날 때를 대비해 호칭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덕흠이 완벽하게 한소영에게 굴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덕흠의 반응만 봐도 대강 감이 오네.’
일신그룹 내부 사정을 아직 강철은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었다.
한소영이 누굴 심어둔 것도 없었고, 강철이 직접 조사를 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아직 제대로 그림조차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신그룹에서 나름대로 서열이 높고 중요한 역할을 맡은 김덕흠이 이렇게 한소영에게 굴복한 것은 강철에겐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김덕흠 같은 전향자들이 많아지겠지. 어쩌면 연은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말이야.’
강철은 폰을 꺼냈다.
한소영으로부터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누군가가 대출 부분에서 거목을 공격하려고 했어. 아마 한준영 쪽이겠지.’
금융 쪽으로 거목그룹을 공격하려는 시도가 거목으로부터 스폰을 받던 관료 및 금융권 인사들의 제보에 의해 파악됐고, 한소영은 그것의 해결을 위해 현재 거목에 대출을 해준 주요 시중 은행 은행장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다.
‘실제 업무에서 손을 놓은 진 오래됐다곤 하지만, 그래도 재벌 딸은 재벌 딸이야. 하긴 그러니 원래 역사에서도 이혼 후에 일신에서 한 자리 차지했던 거였겠지.’
한소영의 일 처리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물론 거목그룹 내부에서 한소영에게 충성을 맹세한 전문경영인 집단과 조언가 집단의 도움 덕분이긴 했지만, 어쨌건 서포트를 잘 받아먹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요 리더의 덕목이라고 강철은 생각했다.
‘한경석이 이대로 한소영과 자기 손자한테 분할상속을 한다면, 애매하게 일신그룹에서 주주 행세를 하기보단 일신그룹하고 거목그룹 사이에 빅딜을 추진하는 게 더 낫겠지.’
일신그룹의 주력 사업인 항공 방산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더 강화시켜주고, 나머지 거목과 부딪히는 부문 즉 건설과 화학 부문은 거목이 다 흡수하는 식으로의 빅딜을 구상해보며 강철은 가만히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어쩌면 연은진이 김덕흠을 통해 한소영과의 만남 의사를 타진한 것도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지.’
거목을 안정시키고, 몇 년 후에 있을 5대 재벌 그룹들의 빅 이벤트에 개입할 준비를 제대로 해 놓기 위해선, 일단 일신그룹과의 관계를 잘 정립해야 했다.
‘다 먹을 필요도 없고, 거목한테 도움이 되는 부문만 먹어 두면 충분히……’
한창 강철이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폰이 한 차례 짧게 진동했다.
한소영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강철이 막 그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할 때, 한소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 끝났어?”
[자기 문자 봤어?]
“보려고 했는데 당신한테 전화가 와서 못 봤지.”
[그럼 빨리 봐바.]
한소영은 다시 전화를 끊었다.
‘뭐지?’
강철은 뭔가 싸한 느낌을 받으며, 메시지를 열람했다.
사진 한 장이 한소영으로부터 날아와 있었다.
사진 속에는 임신테스트기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2개의 줄이 생겨나 있었다.
“…… 하아……”
강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양팔을 축 늘어뜨리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후…….”
그는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장만 바라보며 연신 한숨만 포옥포옥 내쉬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