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분할상속 (1)
1.
2011년 세계는 혁명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오랜 세월 튀니지를 지배해오던 독재자가 굶주린 민중의 혁명으로 물러났고, 그 영향을 받아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 독재 국가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리비아와 이집트처럼 독재자가 몰락한 곳도 있었고, 시리아처럼 세상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내전을 하게 될 나라도 있었으며, 사우디처럼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혁명을 잠재우는 나라도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2011년 1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일이었지만, 강철의 눈에는 이미 한 번 본 뉴스들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뉴스가 있을 예정이었다.
크게는 저축은행 파산 사태라든가, 동일본 대지진이라든가, 김정일 사망이라든가, 종편 채널 개국이라든가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작게는 그간 표준어로 인정되지 않았던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거시적 흐름 속에서 강철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기껏해야 미시적인 부분에서나 약간의 변형을 만들 수 있을 뿐, 강철이 역사에 개입한들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본래 역사에서는 승승장구했을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평범하게 살았을 사람이 승승장구하게 될 터였다.
대표적으로 평범하게 살 예정이었는데 승승장구하게 된 사람으로는 한소영이 있고, 승승장구하게 될 예정이었다가 평범하게 살게 될 사람으로는 엄태욱이 있었다.
거기에 본 역사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이제는 나락을 가게 될 사람이 추가됐다.
“뭐라고?”
1월 31일 오후 5시.
이태원동 자택 서재에서 한준영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덕흠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말 해봐.”
그 말에 김덕흠은 떠듬떠듬 했던 말을 반복했다.
“회, 회장님이…… 금융관리본부에 그…… 손자분한테 증여하는 방안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한준영은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다가 그는 소파에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머리를 감싸 쥔 채 한동안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만 더 숙이면 자기 배에 얼굴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좌절한 상태에서 한준영은 짧게 말했다.
“나가.”
김덕흠은 별다른 대답 없이 한준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갔다.
‘날 건너뛰고 보성이한테?’
한준영은 자신이 상속자가 될 거라고 늘 확신하고 살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경석이 이미 10대 시절부터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장유유서라고, 준영이가 오빠니까 가져가는 거야. 절대 소영이가 여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진짜인지는 몰랐지만, 어쨌건 한준영은 장자로서 일신그룹의 모든 것을 물려받기로 예전에 이미 확정이 난 상태였고, 그렇게 30년 가까이를 살아왔다.
하지만, 요 근래 몇 주간 번개처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상속권을 약화시켰다.
일신그룹 내에서 한준영은 모든 직함을 내려놓아야 했고, 공식적으로는 실업자 상태가 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준영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 말고 누구한테 상속하겠어? 아들이라곤 나 하나뿐인데? 설마 소영이한테 주겠어? 어쨌건 경쟁 업체 총수가 된 애한테?』
그러나 오늘, 김덕흠의 보고를 통해 한준영은 그 희망마저도 모두 잃고 말았다.
‘보성이가 날 건너뛰고 회장이 돼?’
물론 다행인 점은, 한소영이 아닌 그의 아들인 한보성에게 지분이 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여동생보다는 아들이 좀 더 편했기에, 무엇보다도 아직 한보성이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20대 초반의 어린 청년이었기에, 한소영에게 지분이 가는 것보단 나은 상황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그러나, 여동생이 아닌 아들에게 간다 한들, 어쨌건 한준영 입장에선 자신의 상속권을 모두 잃었다는 측면에선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대원군도 아니고…… 아들 눈치나 보면서 후견인 역할이나 하라고?’
한보성이 당장에 지분을 양도받는다고 해서, 회장으로 취임하기는 어렵다.
일단 군 복무를 끝내야 했고, 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일을 하면서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했다.
그게 모두 끝나려면 못해도 한보성이 30대 중후반은 돼야 할 터였다.
즉, 15년 정도는 한준영이 명예회장 비스무리한 역할을 하면서 경영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안정한 섭정일 뿐이었다.
흥선 대원군이 그랬듯, 결국 아들이 장성하면, 물러날 수밖에 없는,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추하게 쫓겨나야 할, 그런 자리였다.
‘강준식이 이 미친 새끼…….’
한준영은 이 모든 것을 강준식 탓으로 여겼다.
설마 한소영이 이 일의 배후에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가 탓할 건 양심선언을 한 강준식뿐이었다.
2.
한준영의 집에서 나온 김덕흠은 차에 올라타서 운전대를 잡기 전, 먼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저 김덕흠입니다. 네, 조금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그대로 김덕흠은 차를 끌고 이태원동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중구에 자리한 일신그룹 본사가 아닌, 그 옆 동네, 종로에 자리한 거목그룹 본사였다.
“오랜만이야.”
“헉-!”
지하주차장 VIP 방문자 전용 칸에 차를 대고 막 내렸을 때, 김덕흠을 반긴 것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강철이었다.
“내가 한 회장님 보좌하는 거 잊었나?”
“아…… 아, 네……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말을 거시는 바람에 놀라서…….”
“그렇게 새가슴이어서 어떻게 큰일을 하시겠나?”
그렇게 말하며 강철은 가볍게 김덕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았기에, 큰 타격은 없었지만 김덕흠은 마치 망치로 심장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숨이 턱 막힘을 느꼈다.
“가지.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강철의 말에 김덕흠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회장실에 도착했다.
“모셔왔습니다.”
강철의 격식 있는 말투에 한소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서, 손님을 소파까지 안내하라 손짓했다.
강철은 김덕흠을 소파 좌측 라인에 앉힌 후, 문 입구로 가서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여자 비서가 커피 2잔을 들고 들어오든 말든, 거기에는 시선을 두지도 않은 채,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기세로 김덕흠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굉장히 불편했고, 또 숨막히게 했기에 김덕흠은 감히 강철에겐 눈길조차 주지 못한 채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김만 멍하니 바라봤다.
“미안하게 됐어요, 김 본부장. 일이 좀 많아서.”
김덕흠이 자리에 앉고서도 계속해서 서류를 검토하던 한소영은 커피의 김이 사그라들 때쯤 비로소 소파로 와 상석에 앉았다.
“아, 아닙니다. 제, 제가 괜히 바쁜 시간에 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구요.”
한소영은 살짝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김덕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금융관리본부에서는 정확하게 뭘 하고 있다고?”
“네, 그게…… 이미 그쪽 조 본부장에게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거목그룹이 회장 비서실에서 일괄적으로, 약간 주먹구구식으로 총수 일가의 비자금을 비롯해 다양한 신변 관리를 맡았다면 일신그룹에선 경영지원실에서 그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일신그룹은 거목그룹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업무를 분배했는데, 그중 금융관리본부는 총수 일가의 지분과 비자금을 총괄하는 부서였다.
그 금융관리본부로부터, 한소영은 한경석이 자신과 조카인 한보성에게 지분을 분할상속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소영은, 직접 김덕흠에게 전화해 그 사실을 알린 후, 그중 절반의 사실-한보성에게 지분이 상속된다는 것만 한준영에게 알려주라고 명령했다.
“아마 그래서 최종적으로 회장님께서 통제하시는 40% 지분 중에서 22%는 한 회장님께 갈 것이고, 18%는 보성 도련님한테 갈 겁니다.”
금용관리본부에서는 그저 분할상속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만 해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김덕흠은, 한소영의 연락을 받고는 구체적인 분배 비율까지 알아내서 그녀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물론 아직 확정안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금융관리본부 쪽 시나리오가 거기로 수렴하고 있습니다.”
김덕흠은 힘의 균형이 어디로 갔는가, 그 냄새를 확실히 맡았다.
한준영에게 힘이 쏠려 있을 땐, 당연히 그에게 충성해야 했지만, 이제 힘의 균형추가 한소영으로 기운 이상,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아무래도 보성 도련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비단 그건 김덕흠만의 생각은 아닐 터였다.
조만간 분할상속 사실을 알게 될 모든 일신그룹 임원들이 김덕흠과 똑같은 판단을 내릴 터였다.
“그래,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한소영은 김덕흠을 내보냈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강철이 그를 지하주차장까지 데려다주고 떠나는 것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진짜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강철이 회장실로 돌아오자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한소영이 그렇게 말했다.
“손자한테 전부 다 물려주자니,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엇보다도 한준영이 장난질하기가 편할 거니까, 또 믿을 만한 다른 자식에게 함께 물려주는 게 낫겠다 싶었겠지.”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상 잊고 지내던 자식을 지분을 물려줄 정도로 믿음직스럽게 만든 사람한테 감사해야겠네?”
“그럼. 당연히 감사해야지.”
한소영은 그에게 다가왔다.
“사무실에서는 안 돼.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
“누가 뭐래?”
한소영은 강철의 허리를 껴안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생리가 멈춘 것 같아.”
그 말에 강철의 표정이 굳었다.
“응?”
“다음 주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맞는 것 같아.”
그러면서 한소영은 강철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는, 입김을 살살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축하해. 아버지가 된 거. 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야.”
강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뭔가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 좋은 건지 슬픈 건지 불안한 건지 편안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느낌이, 그의 온 정신과 몸을 휘감았다.
“하나만 낳을까? 아니면 둘? 어떻게, 우리 자식 대에서도 분할상속이냐 장자상속이냐를 두고 싸우게 할까? 아니면 깔끔하게 한 사람이 다 가져가게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줄까?”
그러면서 한소영은 가볍게 강철의 볼에 입을 맞추곤 그를 끌어안은 채 말을 마무리했다.
“고마워. 덕분에…… 나도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됐어.”
강철은 그런 한소영을 마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힘없이 말했다.
“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지.”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