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불효자 (3)
5.
“너 손이 왜 그래?”
1월 20일 목요일 오전 9시.
한경석은 아주 오랜만에 서울 중구 일신그룹 본사로 출근했다.
미리 회장이 온다는 언질을 받지 못했던 보안팀 직원들은 모두 당황했고, 부랴부랴 의전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애초에 한경석은 그런 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7시에 출근한 한경석은 8시에 1차로 계열사 사장들과 대면회의를 했고 그 자리에서 당분간 거목그룹과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지시했다.
그리고 9시 현재, 한경석은 일신그룹 지주사인 ㈜일신 소속 이사들과 면담하고 있었다.
물론, 경영 총괄 전무 겸 부회장인 한준영은 참석하지 못했다.
애초에 통보하기를 “넌 얼씬도 하지 마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경석은 그간 한준영에게만 맡겨두었던 자기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경영지원실 시장조사본부장 김덕흠의 손을 본 것이었다.
“이리 와 봐.”
한경석은 김덕흠에게 손짓했다.
김덕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르게 한경석의 곁에 다가가 섰다.
“손 내밀어봐.”
그 말에 김덕흠은 망설이지 않고 양손을 내밀었다.
한경석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 하나 어디 갔어?”
그 물음에 김덕흠은 망설였다.
“저…… 그게…….”
망설이면서 그는 자신의 직속 상관인 경영지원실장 유진근의 눈치를 살폈다.
“야, 진근이. 너 일로 와봐.”
한경석의 말에 유진근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네, 회장님.”
“너 얘 때렸냐?”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근데 손가락이 왜 이래? 뭐 어디 공장 가서 기계에라도 꼈어?”
“그, 그게…….”
유진근은 난감했다.
‘나도 몰라요.’
자기도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게 부회장님하고 관련된 일이라 차마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한준영의 수족 노릇 하는 사람이었던 만큼, 직속 부하긴 했지만, 유진근도 거기서 더 캐묻질 못했다.
유진근은 김덕흠을 노려봤다.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던 김덕흠은 이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한경석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도리어 한경석이 당황했다.
“야, 네가 다친 게 왜 나한테 죄송할 일이야?”
순간, 약간 느슨해졌던 한경석의 촉이 팽팽하게 쪼여졌다.
‘잠시만, 얘 준영이 똥 닦아주는 애잖아? 설마?’
순식간에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한경석은 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따로 부를 거니까, 일단 다들 가서 일 보고 있어.”
그러고는 김덕흠에게 말했다.
“넌 좀 남고.”
곧 이사들이 우르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단 둘만 남은 상황에서, 한경석은 김덕흠에게 물었다.
“준영이가 무슨 일을 시켰지?”
“…… 하, 한소영 아가씨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기에 한경석은 크게 놀라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화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감시하다가, 거목그룹 쪽에 들키리가도 한 거야?”
“괴, 괴물 같은 놈이 있었습니다.”
김덕흠은 강철과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한경석에게 고했다.
“그, 그래서…… 그 인간이 제 손가락을 자르면서…….”
[퍽-!]
한경석은 김덕흠의 머리통을 발로 찼다.
김덕흠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렸다.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내 딸한테 파파라치를 붙이고 지랄이야!”
한경석의 얼굴은 이미 시뻘게져 언제든 터질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내 딸한테 그런 보디가드가 없었으면, 어디까지 찍으려고 했어! 내 딸 목욕하는 장면까지 찍으려고 했지! 이 변태 같은 새끼들아!”
한경석은 벌떡 일어났다.
“너 가서 한준영이 잡아 와. 빨리!”
“네, 네!”
김덕흠은 혹여나 더 맞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이 개 호로새끼가……”
한경석은 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걸 풀 길도 없었기에 그는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서서 한준영을 욕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5분 후, 바짝 긴장한 한준영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직 풀리지 않은 그의 분노가 한준영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야이 개 호로새끼야!”
그것을 시작으로, 한경석은 평생에 한준영이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을 퍼부어댔다.
젊은 시절, 중동과 동남아 건설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함께 부대끼고 일하며 배운 찰진 욕설에 한준영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약 10분간 욕을 퍼부어대던 한경석은 한준영에게 단호한 어조로 통보했다.
“꺼져. 앞으로 출근하지도 말고, 회사 사람들 사적으로 부리지도 마! 이 시간부로 넌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말투는 보다 차분해져 있었고, 낯빛도 원래의 살색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오히려 그 부분에서 한준영은 더 큰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아, 아버지!”
한준영은 곧장 한경석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가!”
“아버지!”
“야! 밖에 누구 없어!”
한경석의 부름에 곧장 회의실 문이 열리며 보안팀 직원들이 들어왔다.
“이 새끼 회사 밖으로 끌어내!”
한경석의 명령에 보안팀 직원들은 순간 당황했다.
그들이 잠시 우물쭈물거리자 한경석은 눈에 불을 켰다.
“뭐 하고 있어! 너희들도 같이 끌려나가고 싶어!”
그제야 보안팀 직원들은 한경석의 말대로 한준영을 양쪽에서 붙잡고 그를 끌어냈다.
“아버지! 아버지!”
한준영의 절규를 한경석은 무시했다.
그가 회의실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한경석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그것은 자기 일생에 대한 회의였다.
‘엉뚱한 인간한테 투자했어, 엉뚱한 인간한테.’
한경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는 간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한경석은 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했다.
“지금 내려갈 거니까, 차 대기 시켜.”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잡고 가야 해. 모든 걸…… 이 모든 걸…….’
6.
“오빠가 백수가 됐다네?”
목요일 저녁 8시.
종로구 거목그룹 본사 회장실.
한소영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며 강철에게 그렇게 말했다.
강철은 접객용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피식 웃었다.
“실업 급여 신청하면 되겠네. 아니지, 계약직이라서 그건 안 되려나?”
그 말에 한소영은 한 차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일신그룹은 지분 조정이 어떻게 돼 있지? 승계 작업 말이야.”
“아직 아버지가 지분 대부분을 들고 계셔. 오빠는 한 2% 정도 가지고 있나?”
“2%라……. 한 회장이 지주사 지분 40%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뭐, 정확하게는 24%지만 이런저런 꼼수로 확보한 걸 고려하면 그 정도 되지.”
꼼수.
명의신탁 계좌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차피 생전에 양도하지 않는 이상 24% 중 절반은 한준영 씨에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당신한테 가겠지. 생전에 양도한다면 한준영 씨한테 몰빵이 갈 예정이었겠지만.”
“그렇지?”
“중요한 건 나머지 16%인가?”
“그렇긴 한데, 일신은 거목처럼 그렇게 관리 안 해. 어떻게 빼돌릴 방법은 없을 거야.”
“빼돌릴 필요가 없는 거지.”
한소영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강철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나한테 줄 거란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졌지.”
한소영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강철 맞은 편으로 가 앉아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상황적인 근거로.”
“상황적 근거라…….”
한소영은 피식 웃었다.
“조기에 발견했으면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했을 암을 1년간 숨기고, 집 밖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는 여동생을 감시하다가 직원 손가락이나 잘리게 만드는 놈한테 자기가 평생에 일궈 놓은 가업을 믿고 맡길 수 있을까?”
“반대로 밖에서 성공하기 시작한 딸한테 맡길 수 있을까? 심지어 한때 영혼의 라이벌이었던 기업의 총수가 됐는데?”
“그러니 현명한 방법을 사용하겠지.”
“현명한 방법? 뭐, 나하고 오빠한테 분할상속이라도 해준다 이거야? 서로 적당히 견제하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려.”
한소영은 다리를 꼬았다.
커피색 스타킹끼리 슥슥 부딪히는 소리가 강철의 귀를 움찔하게 했다.
“분할상속을 하겠지. 다만 한준영한테는 지분이 가지 않을 거야.”
한소영은 잠시 눈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괜찮은 시나리오야. 근데…… 정말 그 시나리오대로 아버지가 움직일까?”
“그건 지켜보면 알 문제지.”
한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가더니,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곤 강철의 곁으로 와 앉아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기서?”
강철은 움찔했다.
“어때, 더 꼴리지 않아?”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살짝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계약 내용을 지금이라도 준수하라고……’
그러나 강철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한소영이 먼저 움직였다.
결국 강철은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7.
1월 21일 금요일 오전 9시.
공군사관학교.
“할아버지!”
공군 상병이자 공군사관학교 정비병이며 1년 후에는 다시 한경석의 장손으로 복귀할 한보성의 인사에 한경석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한경석 맞은 편에 앉아있던 공군사관학교장과 공군 참모차장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손자. 신수가 훤한 게 군대가 아주 편한 모양인가 봐? 허허허.”
한경석은 그런 손자를 끌어안아 주었다.
한보성은 잠시 공군사관학교장과 참모차장의 눈치를 살피더니, 한경석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부님들이 잘 해주셔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있어요.”
그 말에 한경석은 껄껄 웃으며 한 차례 사관학교장과 참모차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1년 남았지?”
“네, 할아버지. 뭐, 1년도 금방 갔으니까, 남은 1년도 금방…… 가겠죠?”
“허허허. 원 녀석. 원래 20대에는 시간이 빨리 안 가는 법이야. 그러니까, 그사이에 많은 걸 해 둬야지.”
한보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한경석은 그런 손자를 자기 옆에 앉힌 후, 사관학교장과 참모차장에게 손자의 남은 1년을 잘 보살펴달라 부탁했다.
“아이고, 이 나라의 아들 아닙니까? 당연히 무사히 보내게 해얍죠.”
“우리 국군은 항상 장병 복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한경석으로부터 소소한 용돈을 받은 만큼, 그리고 전역 후 그들의 노후를 이미 한경석이 보장해주기로 한 만큼, 그들은 한보성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껴주리라 서로 경쟁적으로 다짐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손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손자가 사관학교장과 참모차장을 대동한 채 나가는 것을 보며 한경석은 생각했다.
‘1년…… 아니…… 반년만 살아도 돼. 그러면 보성이한테…… 충분히…… 그 호로자식이 어떻게 못 하게…….’
그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