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불효자 (2)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한소영과 함께 저지른 일이라고, 어떻게든 동생과 책임을 나눠보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한준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한소영과 우애가 깊다거나 아니면 자존심이 강해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 걸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강 박사도 소영이가 연루된 걸 모르는데, 이 판국에 소영이를 이야기해봤자, 더 추해져.’
거기다 한소영은 이미 거목그룹을 삼켜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 또한 한준영의 판단에 영향을 줬다.
‘어차피 아버지가 소영이한테 책임을 물으려고 해도, 어떻게 방법이 없잖아? 거목이 무슨 중견기업도 아니고, 우리랑 레벨이 비슷한 기업인데…….’
결국, 한준영이 내린 결론은 무조건 바짝 숙이자는 것이었다.
“전 그냥 진짜…… 진짜 아버지가 괜히 걱정 안 하게 하려고…… 어, 어떻게든 그렇게 하면서 방법을 찾으려고……”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이 한경석을 죽이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려고 했다.
“제, 제가 미국 바이오 회사 몇 개 지분 취득한 거 알고 계시죠? 그, 그게…… 그게 다 아버지 병 낫게 하려고……”
그러나, 그런 변명이 먹히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음을, 한준영은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의 면상을 향해 직구로 날아오는 조그만 화분을 보고서 깨달았다.
[퍽-!]
“커흑-!”
한준영은 눈앞에서 별빛이 번쩍이는 걸 보며 뒤로 자빠졌다.
“나가 이 새끼야!”
코피를 흘리며, 깨진 화분병 조각과 흙을 얼굴과 옷에 묻힌 한준영을 향해 한경석은 축객령을 내렸다.
“아, 아버지…… 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다, 다 오해입니다.”
“면상에 책상이 날아가야 꺼질 거야! 빨리 안 꺼져!”
한경석이 진짜로 책상을 집어 던질 기세로 고함을 지르자, 결국 한준영은 꼬랑지를 말고 별채에서 도망치듯 나가고 말았다.
“내가 아주…… 호로 새끼를 키웠구나…… 아들이란 이유 하나로 모든 걸 줬더니…… 이딴 식으로 아버지 뒤통수를 쳐?”
한경석은 주먹을 쥔 채 한동안 가만히,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화분 조각과 흙더미 그리고 축 늘어진 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폰을 꺼내 곧장 딸에게로 전화했다.
“아이고, 한 회장. 하하하. 별일 없니?”
[네, 아버지. 덕분에 잘 지내죠.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애비가 딸한테 전화하는 데 꼭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
한경석은 한소영과 5분 정도 통화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통화를 끝내고, 폰을 내려둘 무렵, 그의 얼굴에는 후회로 인한 짙은 어둠이 깔렸다.
‘차라리 소영이를 밀어주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재계 서열 17위의, 항상 일신그룹과 부딪히며 신경전을 벌여왔던 거목그룹을, 시댁을 꿀꺽 삼킨 딸.
그런 딸에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일신과 거목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정략적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취급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한경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러나,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만 비탄에 잠길 뿐이었다.
4.
“마 오랜만에 이래 모이가 한잔 하이까, 옛날 생각도 나고 좋십니다, 고문님.”
1월 18일 화요일 밤 9시.
강철과 김명길, 서용태 그리고 최병천 이 네 사람은 오랜만에 길동 단란주점 콜걸 VIP룸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옛날 생각 같은 소리 한다. 반년은 됐냐?”
“마 반년이면 존나게 옛날 아이가?”
“하기사, 그저깨 이야기한 내용도 쳐 잊어 먹는 너 새끼 대가리 기준으로 하면 반년이면 고대 수준이긴 하겠다.”
“하여간 용팔이 새끼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마 니는 인마, 대산 이사면 이사답게 좀 임마.”
“좀 뭐? 넌 얼마나 이사답다고.”
서용태와 김명길, 두 친구가 티격거리는 걸 바라보며 강철은 피식 웃고는 잔을 비웠다.
“한 잔 드시죠.”
그런 강철의 잔을 최병천이 채워주었다.
“자, 우리 최 감사님도 한 잔 받으셔야지.”
강철은 그런 최병천의 잔도 채워주었다.
“이거, 최 감사님은 요즘 바쁘실 건데, 이런 자리 불러도 되나 모르겠어요?”
강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최병천의 눈은 퀭해져 있었고,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이 볼살이 쏙 들어가서 기아처럼 보일 정도였다.
“뭐, 휴식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명길에게는 대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폭력단을 장악하고, 그쪽 세계에서 전국구 회장 소리를 듣는 위치까지 오르라 강철은 명령했다.
서용태에게는 늘 하던 대로 해킹을 비롯한 정보 통신 기술 쪽 일에 열중하며 새로운 도구나 프로그램이 발명되면 즉각 자신에게 바치라 명령했다.
두 사람에게 강철이 맡긴 일은, 모두 두 사람이 기존에 다 하던 것들이었다.
서용태에게는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는 해외 조력자가 있었고, 심지어 조만간 미하일 킴-러시아 해외정보국 인맥을 붙여줄 생각이었다.
김명길에게는 일단 한때 강대산의 비서로서 미리 길을 닦아둔 김형만을 붙여주었고, 그 외에 충청도 조직부터 경상도 쪽 마약 총판까지 다양한 범죄자들을 붙여주었다.
두 사람 모두, 조력자가 있는 만큼, 일 처리가 수월했다.
하지만 최병천은 달랐다.
강철의 비즈니스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의 역할을 늘어갔지만, 조력자는 여전히 없었다.
대산그룹까지는 괜찮았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까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거목그룹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대산그룹보다 10배나 규모가 큰 재벌이었고, 강철이 기존에 오너 일가의 자산과 그룹 내부 순환 출자 구조를 관리하던 조직을 불신해 모조리 숙청함에 따라, 거의 혼자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일을 하게 됐다.
물론 강철은 최병천에게 조력자를 붙여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아직은 요원했다.
‘한소영하고 조만간 만나게 해 줘야겠어.’
거목 내부에서 강철이 믿을 만한 사람은 한소영 정도였다.
그리고 한소영에게는 자신에게는 없는 여러 인맥이 있었다.
“힘들겠지만, 이 시기만 잘 견뎌내면 아주 큰 게 떨어질 거예요.”
강철은 그렇게 최병천을 달래주었다.
“대산그룹 감사나 이사보다는, 아무래도 거목그룹 법무 총괄 전무 같은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강철의 말에 최병천은 아무 말 없이 힘겹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강철은 그런 최병천을 가볍게 위로한 후, 김명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철이 김명길의 곁에 앉자 서용태는 자연스럽게 최병천의 곁으로 가 그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김명길과는 달리 어쨌건 전문 지식을 가진 인텔리였던 만큼, 서용태는 그런대로 최병천과 대화가 됐다.
그리고 덕분에 김명길과 최병천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가교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서용태와 최병천의 모습을 잠시 본 강철은 이내 김명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례식장 이후로 박용수는?”
“마, 맨날 제 사무실에 찾아와가 인사하고 갑니다. 어제도 술 마시자 카든데 일단 바쁘다고 주말에 함 시간 잡아보자 했십니다.”
“아마 허파가 지금쯤 엄청 간지러울 거야. 평생 조민석한테 충성하면서 충실한 따까리로 살았는데, 같이 새 되게 생겼으니까.”
“박 실장은 우예 처리하실 깁니까?”
“일단 뭐, 조민석이 은퇴할 때 같이 은퇴시켜야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다고, 괜히 옛날 사람 계속 쓰다간 우리 김 회장 힘만 빠져.”
김 회장이란 말에 김명길은 씩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강철은 오랜만에 그의 별명을 불렀다.
“불독 닮은 양반, 너무 우쭐해하지는 말어. 수도권 조직도 아직 30% 정도는 당신 편이 아니고, 경상도 쪽 조직은 마약 총판 정도 빼면 당신 편이 하나도 없잖아?”
“마, 열심히 노력하겠십니다.”
“그래, 노력해야지. 그래야지 2013년에 진짜 회장 소리 들을 수 있지 않겠어?”
강철이 구체적인 시기를 찍어주자 김명길의 얼굴이 상기됐다.
강철은 그런 김명길과 건배한 후 술을 넘겼다.
[똑똑-!]
곧 종업원이 노크한 후 접대부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즐기라고.”
접대부는 총 여섯이었다.
강철은 두 사람 씩을 세 사람에게 배분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벌써 가실깁니까?”
“일정이 있어서 말이야.”
“아이고…… 다음엔 꼭 좀 더 같이 놀았으면 좋겠십니다.”
“그래, 기회가 오겠지.”
강철은 세 사람을 뒤로하고 룸을 나왔다.
‘비즈니스가 본궤도에 오르면, 김명길이 장악한 건달과 서용태의 정보 통신 기술 그리고 최변의 지능이 제대로 시너지를 내야 해.’
세력이 없다는 것.
그게 지금 강철의 큰 약점이었다.
‘아직은 내가 발로 직접 뛰면서 일일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긴 해. 하지만…… 일신그룹까지 범위에 들어오면 그때부턴 나 혼자서 뭔가를 하기가 힘들어져.’
한준영이 위기에 빠졌다.
자신을 대하는 한경석의 모습이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 두 이야기를 한소영에게 듣고서, 강철은 곧장 세 사람을 소집했다.
단순히 가장 오래 일한 사람들과 술잔이나 기울이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그럴 거였으면 접대부들이 들어왔을 때 그냥 남아서 놀았을 것이었다.
‘잘 다져놔야 해. 사람은 언제 어떻게 배신할지 모르니까.’
2011년 1월 18일 현재, 강철에게 있어서 자기 사람이라 할 만한 사람은 저 셋과 한소영 그리고 백두산과 충청도의 마약왕 곽기명이 전부였다.
그중 백두산은 전략적 제휴에 가깝고, 언제든 강철과 갈라설 수 있는 사람이다.
곽기명은 사람이 소탈하며 배신할 상은 아니었지만, 한국 마약 시장을 지배하는 일을 제외하면 큰 야망이 없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시키기엔, 약을 만들어 파는 것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문외한이었다.
한소영은 강철과 살을 섞고 정욕을 공유한 사이였으며, 현시점에서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강철은 이 또한 언제든 식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원한 건 없지.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면 남는 건 저 셋이었다.
가장 초창기에 강철이 흡수해 자기 세력으로 삼은 저 셋.
저 셋을 잘 단도리해 놔야, 그리고 잘 키워놔야 했다.
‘11년하고도 10개월 정도인가?’
단란주점 ‘콜걸’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고 손가락으로 불을 붙이고서, 강철은 가만히 자신의 차 후드에 기댔다.
‘거목, 일신 그리고 가능하다면 보국까지. 그렇게만 영역을 확장해 놔도 정부에 충분히 제대로 된 로비를 할 능력은 갖추는 거야. 거기다 대통령이 될 사람들한테 미리미리 스폰을 해주면…….’
강철은 가만히 자기 손을 바라봤다.
조용히 초능력 에너지를 끌어올리자, 곧 오거닉 메탈이 발동되며 그의 손을 금속으로 변형시켰다.
매끈매끈한 금속 재질의 손과 거기에 조명이 반사돼 영롱한 빛을 내뿜는 것을 보며 강철은 생각했다.
‘금을 한 50t 정도만 흡수하면……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