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불효자 (1)
1.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
처음 의사가 됐을 때, 강준식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부처님의 자비를 의술을 통해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의사가 됐고, 실제로 초창기에는 무료 의료 봉사도 많이 다니는 등 나름대로 자신의 꿈과 현실을 매치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처음 목표는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고,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는 마모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결혼하여 자식들이 태어나고 비용이라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완벽하게 옛 모습을 버리게 됐다.
『강 박사님. 그냥 박사님은 회장님의 질병을 못 본 척하고 계시면 되는 겁니다.』
2010년 연초, 정기 건강 검진에서 강준식은 한경석에게 간암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것을 본인이 아닌 아들 한준영에게 먼저 알렸는데,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입 다물라.’였다.
물론 한준영이 그냥 입을 다물게 하진 않았다.
입을 다문 대가로 강준식의 장남은 일신엔터테인먼트 상무가 됐고, 변호사인 차남은 일신그룹과 그룹의 모든 법률 자문을 담당하는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즐거웠다.
안 그래도 잘 나가던 자식들이 더 잘 나가게 된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럽게까지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잠들어 있던 그의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경석의 암세포가 점차 손을 쓰기에 늦을 만큼 자라났을 때쯤, 그의 번민은 수면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강해졌다.
“다, 당신 누구요?”
1월 17일 월요일 오후 5시 36분.
우신종합병원 지하주차장 자신의 차량 내부에서, 강준식은 갑자기 조수석에 나타난 청년 강철에게 물었다.
“어떻게 내 차에 들어온 거요?”
그런 강준식에게 강철은 말했다.
“말 돌릴 생각하지 마. 당신도 알고 있잖아? 지금은 그딴 비본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적인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강준식의 방어기제가 발동됐다.
“좋게 말할 때, 빨리 나가시오.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를 거요.”
그러나 강철은 말 한마디로 그걸 깼다.
“한경석 회장 간암이 초창기일 때 그걸 발견해놓고, 골든 타임을 고의로 보내버린 타락한 의사가 뭐? 누굴 불러?”
강철의 말에 강준식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내부 도어 락에 닿기도 전에, 강철의 손이 먼저 그의 멱살을 잡았다.
“1년 전, 딱 1년 전에 당신이 진단 결과를 한경석 회장에게 있는 그대로 통보만 했어도, 그의 수명은 분명히 몇 년은 더 연장됐을 거야.”
“이, 이거 놔!”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식들의 영달을 위해 의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고, 덕분에 한 노인이 영문도 모른 채 곧 암세포에 잠식돼 죽게 생겼어.”
강준식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강철에게서 백미러에 달린 염주와 핸들 바깥쪽 전면 유리 방향에 세워진 조그만 불상으로 향했다.
“불효자의 뜻을 따라, 한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 사형 집행인이 돼서 기쁜가?”
강준식은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걸 느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을 때 가슴 속에 품었던 이상의 시체 위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 고의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살인 방조자의 영혼이 서 있는 기분이 어때?”
“…… 그만…….”
“가족 때문이라고? 자식들을 위해 그랬다고? 정말로 그랬나? 당신 자식들이, 당신이 살인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풀리지 않았을까?”
“그만해……”
“결국 넌 살인자야. 너 개인의 욕심을 위해, 자식을 팔아서 그리고 너의 양심과 기술을 팔아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고.”
“그만 좀 해…… 제발…….”
결국, 강준식은 무너졌다.
그는 강철에게 멱살이 잡힌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그의 머릿속에선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울려 퍼졌다.
‘놀래라.’
그리고 관심법으로 갑작스러운 그 내면의 비명과 절규를 고스란히 전해 들은 강철은 흠칫 놀라며, 관심법을 살짝 풀었다.
‘작두 수준으로 관심법이 강해지면…… 진짜 말 한마디로 사람을 영혼까지 내게 충성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폭력과 돈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강준식이 그런 사람이었다.
폭력으로 그를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영구적으로 굴복시킬 순 없을 터였다.
돈으로 그를 사기엔, 이미 한준영에게 팔린 상태였다.
그랬기에 강철은 관심법을 통해 그의 내적 심리를 읽고, 그걸 이용해 그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이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2011년 1월 17일 월요일 오후 5시 41분.
강준식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난 1년간, 정확하게는 약 반년간 그를 괴롭힌 번뇌가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강철의 말을 통해 커다란 죄책감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 죄책감 속에서 강준식은 그렇게 한동안 아이처럼 흐느끼며 자신의 썩어빠진 악덕을 토해냈다.
2.
한준영은 한소영과 함께 한경석의 병을 은폐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정작 한소영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강준식은 철저하게 한준영 독단으로 이 일이 진행됐다고만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한준영과 독대한 적은 있어도 한소영과는 독대는커녕 삼자대면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뭐, 그때까진 내가 거목그룹의 회장이 될 거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1월 18일 화요일 자정.
침대에 함께 누워 강철에게서 강준식의 진술과 참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한소영은 그렇게 답했다.
“원래 오빠가 그래. 다 자기 혼자서 하려고 하고, 항상 내 이름은 그 어디에도 안 남기려고 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 덕에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움직이게 됐고 말이지.”
“그러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강철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접근이었다.
이러한 방식이 엄태욱이나 조민석 같은 사람에게는 먹히지 않았겠지만, 강준식 같은 사람에게는 충분히 먹혔다.
“원래 마음에 조금이라도 착한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이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무너지니까.”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 자기는 아예 무너지지도 않겠네?”
그 말에 강철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어머, 왜 이래? 난 그래도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어.”
“순수함이라…… 그래서 자살로 날 협박했었나?”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톡 건들며 말했다.
“옛날 일은 말하지 말자구.”
그 말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가볍게 손으로 한소영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소식은?”
“아직 없네.”
“흐음…… 원래 임신이 이렇게 어려운 건가?”
“노산이니까. 쉽진 않겠지?”
“내가 물으려던 말을 대신 해주니 고맙군.”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지. 노산을 노산이라 안 하면, 뭐라고 하겠어?”
오길동이 왜 그렇게 여자에 미쳐 살았는지, 강철은 그 기분을 요즘 확실히 이해하게 됐다.
“그럼, 좀 더 내가 힘을 내 줘야겠지?”
강철은 다시 한소영의 품속에 녹아들었다.
‘세상이 망할 때쯤,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태어날 것이다.
한소영의 생식 능력도 멀쩡했고, 그것은 강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이는 분명히 태어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한소영은 임신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소영의, 나이를 무색게 하는 탄력적이고 부드러운 살결 속에서 육체의 감각과 정신이 녹아들고 스며들면서도 강철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연방보안국 요원 15명하고 싸우는 데도 초능력 에너지가 금방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어. 별달리 힘을 쓰지도 않고 그냥 총알을 맞고만 있었는데도 말이지.’
한소영의 숨결이 얼굴을 뜨겁게 데웠다.
‘모스크바로 가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 인간들의 목을 딴다…… 그 전에 내 목이 따이겠지. 재수 없으면 생체 실험까지 당할 수도 있고 말이야.’
점차 한소영의 신음 위에 자신의 신음이 뒤섞이는 걸 귀로 감지하며, 강철은 생각을 멈추었다.
어차피, 생각해본들, 아직 자기 힘이 그 정도까지 성장하지 않았다는 결론만 내려질 뿐이었기에, 강철은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3.
1월 18일 화요일 저녁 8시.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줄 알았는데, 호로 새끼를 키웠구나?”
용산구 한남동 한경석의 자택 별채.
본채와는 분수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개량 한옥 건물 내부에서, 한경석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연거푸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아, 아버지. 저, 저는…… 저는…… 저는 그냥…… 그냥 아버지가 걱정하실 것 같아서…… 거, 걱정을 덜어드리려……”
“작년에 제대로 치료만 받았으면 수술 없이도 제거가 가능했을 암세포를, 그대로 방치한 게 날 위해서라고? 아이고! 고마워라. 내가 아주 아들에게 큰 빚을 졌네, 응? 아주 큰 빚을 졌어. 아주 큰 빚을!”
[쾅-!]
한경석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장인이 박달나무로 만든 책상은 크게 흔들렸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 애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죽길 바란 거지? 응? 어차피 회장 승계는 확정적이겠다,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회장직에 오르려고 말이야. 응?”
“아, 아버지……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나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었던 거야? 응? 왜, 내가 너 처음에 그 딴따라 기집년하고 결혼한다는 거 반대하고, 그 딴따라년 억지로 다른 딴따라놈이랑 결혼시킨 거, 그게 아직까지 불만이었던 거야!”
한경석의 목소리는 점차 고조돼 갔다.
“그것도 아니면! 네 공식적인 직함이 아직도 전무인 게 불만이었던 거야!”
한경석은 계속해서 한준영과 자신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언급해 갔다.
그러면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얼굴은 빨개졌으며, 입에서 튀어나오는 분비물의 양은 늘어났다.
‘씨발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한준영은 이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늦은 저녁에 한경석이 불렀기에 찾아와 봤더니, 자신이 지난 1년간 강준식 박사와 짜고 벌인 음모가 모두 드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강 박사 그놈이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더라! 꿈에 부처가 나타나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더라! 내가 내일 당장 조계사에다가 시주라도 듬뿍해야겠어! 어?! 부처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뒤질 뻔했는데, 간암으로 뒤진단 것도 알게 되고 말이야!”
분노에 찬 한경석의 샤우팅을 통해, 한준영은 사태를 대강 파악하게 됐다.
‘강준식 이 미친 새끼가!’
강준식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아, 안돼…… 이대로 가면 내가…… 내가 덤터기를 쓰게 생겼어!’
한준영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분노한 한경석, 모든 걸 털어놓은 강준식 그리고 한소영의 개입은 꿈에도 모르는 두 사람.
‘씨발…….’
[쿵-!]
한준영은 일단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세게 바닥에 갖다 박았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