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99화 (99/175)

099 레짐 체인지 (1)

1.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저녁 7시.

강남 일신병원 장례식장.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 수백 명이 양옆에 도열한 가운데, 복도 사이로 김명길은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강동과 강남 그리고 강북 일대에서 활동하는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따르고 있었다.

김명길이 보스들을 대동한 채 복도를 지나자 양쪽에 도열해 있던 남자들이 모두 허리를 숙였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크게 소리 내어 인사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묘하게 묵직하면서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김명길은 그렇게 남자들 사이를 지나 한 사람의 영정 앞에 섰다.

2011년 1월 5일 새벽 4시, 폐얌 투병 끝에 사망한 도구삼 전무를 향해 2차례 절한 김명길은 유가족들과도 맞절한 후, 그들을 위로해주곤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김 이사님.”

그가 보스들과 함께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도구삼과 같은 세대의 원로 건달들이 그를 환대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잘 계셨지예? 제가 자주 찾아 뵜어야 하는데, 마 바빠가 못했십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한창 일하실 분이 우리 같은 늙은것들한테 시간을 쓰실 필요가 있습니까? 허허허. 자, 앉으십시오.”

원로 건달들은 김명길에게 허리만 안 숙였을 뿐, 그에게 설설 기었다.

“아이고, 오랜만에 뵙십니다, 회장님.”

김명길은 그런 노인들을 지나 먼저 도착해 있던 조민석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러게 말이요, 이거 서로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드네.”

“마, 여기서라도 봐서 다행 아입니까?”

김명길은 그렇게 조민석에게 인사한 후, 원로 건달들 틈에 앉아 그들에게 술을 받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조민석은 그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앉아 박용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씨발, 이거 뭐야?’

그리고 박용수는, 그런 조민석의 맞은편에서 불안한 눈으로 김명길을 바라보며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걸 느꼈다.

‘강철…… 그 인간이 분명 나를 회장 자리에 앉힌다고 했잖아. 근데 왜?’

도구삼의 장례식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었다.

이곳은 전국구 건달 조직인 대산 내부의 세력구도를 확인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 대산 내부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전국구 건달 세계에서 누가 우위에 서 있는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였다.

‘김명길…… 저 불독 새끼가…… 회장이 된다고?’

이미 회장은 김명길이었다.

직함만 이사였다 뿐, 원로 건달들부터 현역 건달까지, 모두가 김명길에게만 모여 있었다.

조민석에게는 그저 형식상 인사만 할 뿐이었다.

‘씨발…… 당한 건가?’

그제야 박용수는 자신이 강철의 이중 플레이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무언가를 하기엔, 박용수나 조민석이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젠장…….’

그렇게 박용수는 조민석과 함께 아무 말 없이, 우울하게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다가 그는 김명길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회장님.”

박용수의 말에 살짝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조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용수는 최대한 빨리 김명길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 박 실장님 아입니까?”

때마침 소변을 다 누고, 손을 씻고 있던 김명길이 박용수를 보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김 이사님.”

박용수는 그런 김명길의 젖은 손을 꽉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허리는 만다꼬 숙입니까? 민망하구로.”

김명길은 그런 박용수의 모습에 함께 마주 허리를 숙였다.

“그…… 조만간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랜만에 김 이사님하고 술 한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오랜만이랄 것도 없었다.

박용수는 단 한 번도 김명길과 단독으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그 속 보이는 말에 김명길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함 시간 내 보입시다. 마, 먼저 드가보겠십니다. 볼일 보고 나오이소.”

그렇게 김명길은 화장실을 나갔다.

박용수는 김명길의 등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후 그가 나간 걸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살려면 센 놈한테 붙어야지.’

그리고 지금, 센 놈은 김명길이었다.

물론 그 뒤에 진짜 센 놈이 있긴 했지만, 그건 논외였다.

한편,

“오랜만에 보네요?”

조민석과 박용수 그리고 김명길이 도구삼의 장례식장에서 서로의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있을 때, 강철은 잠실 조민석의 펜트하우스에서 오랜만에 유아영과 대면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어쩐 일이에요? 딱히 보고할 건 없는데…….”

유아영은 강철이 찾아왔을 때, 살짝 당황했다.

그간 그에게 연락도 없었고, 그랬기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찾아온 강철은, 그녀에게 자신이 여전히 그에게 구속돼 있음을 자각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게 그녀를 힘들게 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랬기에 유아영은 살짝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너한테 자유를 주러 왔다, 이 여자야.’

그리고 관심법으로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던 강철은 피식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유아영이.”

“네?”

“그동안 수고했어.”

그건, 분명한 의미에서, 강철이 위로할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유아영에게는 전혀 반대의 의미로 전달됐다.

“왜, 왜 그러세요? 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유아영은 강철의 그 말을 ‘처분’의 의도로 수용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을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였어. 이렇게 찾아올 것도 없이.”

그런 유아영을 강철은 안심시켜주었다.

“난 당신한테 자유를 주러 왔어.”

“…… 자유요?”

“당신은 이제 자유야. 나한테 조민석의 동향을 보고하지 않아도 돼. 더는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제야 유아영은 안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 오빠가 더는…… 위협이 안 돼서 그러는 건가요?”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제가 만약…… 그쪽을 배신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쪽은 내가 무서우면서도,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 질문을 가려 하질 못하네?”

“미, 미안해요.”

강철은 피식 웃었다.

“네가 날 배신해본들, 조민석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강철의 말에 유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되게 여유로워진 조민석의 일상을 보며, 늘 주말마다 접대를 나가다가 최근엔 늘 집에 있거나 혹은 자신과 어디 교외로 놀러 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조민석의 권력이 약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이 내 프락치였다는 걸 조민석이 알면, 아마 내가 아니라 조민석한테 죽을 거야.”

“…… 맞네요.”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내가 더 있길 바라나?”

“…… 조심히 가세요.”

“그래. 잘 살아. 행복하게. 다시는 누구한테 이용당하지 말고.”

강철의 말에 유아영은 분명히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아니면 날 이용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 생각을 읽은 강철은 활짝 웃으며, 그렇게 조민석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에서, 한소영이 뽑아준 골덴바움 RW-10 SUV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며 생각했다.

‘레짐 체인지. 권력 교체가 이루어졌으니까, 풀어줄 사람은 풀어줘야지.’

2.

“소영이 넌 플랜B가 따로 있었구나?”

2011년 1월 6일 목요일.

저녁 6시 30분.

가야호텔 레스토랑 VIP룸에서 한소영은 한준영과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상당히 놀라고 계셔. 네가 이렇게 거목그룹을 낼름 삼킬 줄은 몰랐다고 말이야.”

“안 그래도 연락받았어. 오랜만에 칭찬하시더라?”

“안 그렇겠어? 시집보낸 딸이 처가 가산을 모조리 자기 거로 만들었는데 말이야.”

“다 내 거는 아니지. 알잖아, 오빠도?”

“알지. 암. 아무리 재벌이 지주사로 전환한다 한들, 자기 지분만 가지고 경영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서 한준영은 한소영에게 윙크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숨겨진 차명 지분이 있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한소영은 그런 한준영의 모습에 가소로움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한준영은 자기 윙크에 대한 동의의 뜻을 받아들였다.

‘세상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순간이동 하는 놈이 있는 법이야. 오빠는 그걸 알아야 해.’

한소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걸 한준영에게 알려주진 않았다.

“그래, 엄 회장이랑 엄 전무는 뭐라고 해?”

“뭐…… 만족하던데?”

“만족이라…… 명예회장이랑 상임고문직에?”

“그러면…… 만족해야지 별수 있나?”

한소영의 말에 한준영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한경석 회장님의 딸이야. 하하하하하하!”

침을 튀겨가며 웃는 한준영을 향해 한소영을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침 튀어.”

“응? 아 그래. 조심해야지. 미안. 하하. 이거, 회장님 앞에서 부회장이 너무 무례했네. 허허허.”

그렇게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혼은, 안 할 생각이야?”

“뭐, 할 필요가 있겠어?”

“그럼…… 아버지 병은 어떻게 할까?”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할 문제 아닌가?”

“에헤이. 이거 공범이 왜 이러실까?”

“일신그룹 산하 병원이 거목그룹 회장 말을 듣진 않잖아?”

“그건 그렇지. 그건 그런데……. 뭐, 그래, 네 말 무슨 말인진 알겠다. 그럼 화제를 바꿔서 말이야.”

한준영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한소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거목 회장이 됐고, 곧 내가 일신 회장이 될 거잖아. 그럼 거목하고 일신은 단순히 사돈 관계에서 남매 관계가 된단 말이지.”

한소영은 가만히 한준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남매끼리는 서로 경쟁을 최대한 지양해야 하지 않겠어?”

한소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건설 쪽에서 요즘 말이 많아. 신도시랑 지방 쪽 물량을 거목에서 쓸어간다고 말이야.”

“건설경기가 안 좋다고, 부동산 전망 나쁘다고 다들 손 놓고 있는 거 그냥 우리가 정당하게 수주한 거뿐인데?”

“그래,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적당히 나눠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한준영의 말에 한소영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응? 그리고 이왕이면 석유화학이랑 에너지 부문에서도 서로 충돌 안 하게 조정 좀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한준영은 한소영에게 몇 가지 구체적인 비즈니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일신에게 거목이 살짝 굽히는 형국이었다.

“난 주주들이 싫어할 만한 짓은 안 해.”

한소영은 한준영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분명한 거절이었다.

“크흠. 뭐 누가 뭐라니? 그냥 서로 부딪히지 않게 잘 협의해보자는 거지.”

“그런 건 밑에 사람들한테 맡기고, 우린 그냥 오늘 밥이나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어.”

한소영의 말에 한준영은 일단 한 발 뺐다.

“그래. 그렇게 하자. 계산은 네가 하는 거지? 회장된 기념으로?”

“아직 정식으로 회장이 된 건 아니야.”

“에이, 그래도 사실상 회장인데.”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가벼운 탐색전을 뒤로 하고, 식사를 마저 마쳤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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