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협정 (2)
강철은 한소영과 함께 엄근식의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녀와 나란히 발맞춰 걸으며 엄태욱의 자택으로 향했다.
“슬픈가?”
강철의 물음에 한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훌쩍이는 거지?”
“씁쓸해서.”
“씁쓸하다? 슬프진 않은데?”
“슬퍼하기엔 엄씨 가문에 그 정도 정은 없고, 기뻐하기엔 그래도 회장님하고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영은 그런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 엄씨 가문에게 여지를 남길 만큼 감정적으로 격앙되거나 한 건 아니니까. 그냥…… 그냥 좀 씁쓸한 거야.”
“누가 뭐라고 했나?”
한소영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사 갈까 해.”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가 말했잖아? 회장님이랑 그 새끼 명의로 된 재산은 챙기게 해주겠다고. 저 집, 그 새끼 명의거든.”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영도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엄태욱의 집 대문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소영은 멈춰선 채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 같이 살래?”
강철은 피식 웃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군.”
“…… 아직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는 못 한 건가?”
“사랑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거였다면, 세상에는 짝사랑도 그리고 그걸 애통해하는 노래도 없었겠지.”
“그렇지?”
그녀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굉장히 감정적으로 동요되고 있는 상태였다.
강철은 그걸 관심법을 통해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강철은 그녀를 바로잡아줄 필요를 느꼈다.
“감상에서 벗어나. 이제 당신은 엄연한 거목그룹 회장이야. 앞으로 언론에 거목을 대표해서 항상 당신의 이름이 나갈 거고, 재계에서도 거목의 대표자로 당신이 소개가 될 거니까.”
“…… 그래야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그리고 친오빠의 그늘에서 벗어나야지.”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거목그룹 회장 한소영과 일신그룹 회장 한경석은 동등한 대기업 집단의 대표야. 한소영 씨의 이혼을 비롯한 사생활에 한경석 씨가 관여할 수 없다는 거지.”
한소영은 한동안 가만히 강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점차 그녀의 복잡한 감정적 동요가 가라앉으며 심리적 안정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술이나 한잔할까? 승리를 기념해서?”
잠시 후, 눈을 뜬 한소영은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강철에게 제안했다.
“좋지.”
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그 제안에 화답해주었다.
“위스키로?”
“위스키로.”
“증류주를 좋아하는구나?”
“깔끔하잖아.”
그렇게 강철은 한소영과 함께 엄태욱의 집으로 들어갔다.
3.
모든 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3개의 주요 계열사를 강철이 장악한 순간, 거목그룹은 강철의 뜻대로 모든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언론에선 더 이상 거목그룹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고, 검찰을 비롯한 정부기관에서도 거목에 관해 추가적인 조사를 이어가지 않았다.
장우진의 혐의는 폭행과 협박으로 국한됐고, 그는 그것을 모두 인정했다.
한소영은 처음으로 언론에 그 얼굴을 공개했고, 인터뷰를 하건 보도를 하건 항상 그녀의 뒤에는 ‘대표’ 혹은 ‘회장 직무대행’이라는 직함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계열사 간 지분 정리가 시작됐고, 2010년이 끝나갈 때쯤, 지주사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확정됐다.
지주사 전환 로드맵이 나왔을 때, 비로소 한소영도 완벽하게 강철이 그린 그림을 보게 됐다.
그리고 한소영이 그 그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됐을 때, 조민석이 그녀를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산그룹 회장 조민석이라고 합니다.”
12월 24일 금요일 오후 1시.
종로구 거목그룹 본사 21층 한소영의 사무실.
“한소영이에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한소영은 조민석에게 앉을 것을 권유했고, 조민석은 감사의 의미로 한 차례 고개 숙여 인사하곤 소파에 앉았다.
곧 커피 2잔이 비서를 통해 전달됐고, 두 사람은 그것을 한 모금씩 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거목그룹의 새 회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조민석의 말에 한소영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한소영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조민석은 헛기침한 후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그녀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강철과 함께 일을 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한소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조민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가 무엇을 약속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한 회장님께서도 그에게 속았다는 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소영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후, 각설탕을 한 봉지 까 커피에 빠뜨리곤 티스푼으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아마 강철은 회장님을 허수아비로 만들 겁니다. 실무적인 일, 귀찮은 일, 의전, 일반 사무 그런 것들에서만 권한이 있는 그런 허수아비 말입니다.”
한소영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곤,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홀짝였다.
조민석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같이 행동하지만, 귀담아듣고 있음을 깨닫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든 건 그의 의도대로 계획될 겁니다. 새로운 이사회, 지분 구조 등등. 한 회장님의 뜻은 그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을 겁니다.”
조민석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빈 잔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소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한 회장님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 회장님에게는 있고 그에게는 없는, 그가 한 회장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제야 한소영은 조민석을 바라보았다.
“한 회장님께는 정통성이 있습니다. 우리 식대로 말하면 족보가 있다는 겁니다.”
“…… 족보?”
“한 회장님은 엄근식 회장의 맏며느리이자 일신그룹 한경석 회장님의 따님이십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도 족보가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어릴 때부터 범단에 몸을 담고 생활한 덕에 나름의 족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저를 강철이 택한 이유였습니다.”
조민석은 한소영에게 강철이 자신을 찾아온 일부터, 자신을 대산 회장에 올리기 위해 저지른 일들 그리고 대산 회장으로 올린 다음에 벌인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지금 저는 말이 회장이지 실질적으론 권한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또 제가 어쨌건 회장직을 들고 있는 덕분에 건달들 사이에서 대산이 여전히 존중받고 있습니다.”
“…… 하고 싶은 말이 뭐죠?”
한소영의 물음에 조민석은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한 회장님은 강철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 회장님이 안 계시다면, 강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한 회장님은 단순히 얼굴마담이 아닌, 강철이 뒤에서 마음 놓고 일을 저지를 수 있게 해주는 방패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한소영은 가만히 조민석을 바라보았다.
“강철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 한 회장님한테 고압적으로 나갈 거고, 일방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한 회장님이 마치 자신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처럼 보이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래서요?”
“강하게 나가십시오. 강하게 한 회장님의 뜻을 주장하시고, 관철시키십시오. 처음엔 물론 강철이 쉽게 들어주진 않을 겁니다. 때론 위협도 할 거고, 협박도 할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한 회장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 회장님 없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한소영은 가만히 조민석을 바라보더니, 한 차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담배를 꺼내 물고서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연기를 허공에 내뿜곤 조민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러는 우리 조 회장님은…… 왜 이 모양이실까?”
나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지만, 조민석은 당황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소영의 질문에 답할 뿐이었다.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한소영은 더 이상 웃질 못했다.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
한소영의 물음에 조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전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입니다. 이미 저를 대체할 사람이 나타난 상황입니다. 강철이 절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뭘 한다는 건 죽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 그럼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건…… 이런 식으로라도…… 강철, 그 인간의 일에 약간의 차질을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한소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만 태울 뿐이었다.
4.
12월 24일 금요일 저녁 8시.
“꼭 이사한 티를 내야 하나?”
서초구 잠원동 소재 거목 드림월드 아파트 1차 펜트하우스.
강철은 선물로 들고 온 와인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치워줄 거 아니면 잔소리는 하지 말지?”
그런 강철을 향해 집주인 한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오케이, 그렇게 하지.”
“웬 와인?”
“그래도 새로 이사 간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았으니, 선물은 사야지 않겠나?”
“자기가 그런 것도 생각하는 줄은 몰랐네?”
“기본적인 예의는 알고 있다고. 실천을 잘 안 할 뿐이지.”
이윽고 두 사람은 강철이 사 온 와인에 간단한 과일 안주를 곁들여 가벼운 술자리를 벌였다.
“낮에 조민석하고 만났어.”
1시간 후.
와인 1병에 위스키까지 1병을 마저 비우고 나서, 담배를 태우기 위해 두 사람 모두 테라스에 나갔을 때, 한소영은 낮에 있었던 일을 강철에게 말했다.
강철은 가만히 한소영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보고 그러더라? 자기한테 강하게 나가라고? 자기는 나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할 거라고?”
한소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강철을 바라봤다.
그리고 강철은 관심법을 통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내가 뭘 주장할 줄 알고?”
“임신은 안 돼. 난 사랑이 없는 잉태를 바라지 않아.”
예상했지만, 역시나 격하게 반대하는 강철의 모습에 한소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난간으로 가 담배를 아래로 집어 던졌다.
“내가 없으면…… 결국 자기는 아무것도 못 해. 거목을 지주사로 전환하건, 이대로 순환출자 상태에서 정체시키건, 결국 자기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한소영은 난간 아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기 말만 듣는 두 김씨를 전면에 내세우면, 꼰대 이사들이 난리를 피우겠지. 그리고 정치권의 압력에, 윤씨 삼 형제의 개입에…… 연기금까지 나서면 자기도 버티긴 힘들 거야.”
“…… 그래도 임신은……”
그 순간, 강철은 한소영이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관심법으로 포착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한소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향해 돌린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쳤어!”
한소영은 눈물 고인 눈으로 강철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 내 마음을 읽는 것도…… 마술이야?”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