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협정 (1)
1.
2022년 11월, 핵전쟁이 일어났고 세상은 멸망했다.
인류는 살아남았지만, 그들이 쌓아 올렸던 문명은 붕괴했고 긴밀한 국제 연결망은 파괴됐다.
비행기와 배는 녹이 슨 채 썩어들어갔고, 과학 기술이 만든 화려한 기계 장치는 아주 간단한 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못 쓰는 폐품이 돼 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핵무기는 주요 국가의 군 시설 및 기간 시설을 1차로 타격했고, 덕분에 기계 문명의 기반인 전기가 사용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멸망 이후 세계에서 해외와의 교류는 적어도 방사능 낙진이 주요 항구에서 사라지기 전까진 재개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랬기에 소위 ‘바벨’이라 불리던, 통역 초능력은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어찌어찌 살아남은 외국인이 있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한국어 패치가 완료됐거나 혹은 언어적 의사소통이 필요 없는 농노 계급으로 전락했기에,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었다.
“우, 우리도 속은 겁니다. 사장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우린 그저 저 해외정보국 놈들이 안보상 위해가 되는 인물이라고만 설명해서 그런 줄 알고 병력을 동원했던 겁니다.”
11월 26일 금요일 오후 3시 15분.
하바롭스크시 외곽 창고.
포크레인이 분주하게 흙을 메우고, 부상에서 정신을 차린 연방보안국 요원들이 삽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는 와중에, 연방보안국 대위 안나 프리마코바는 강철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하단 표정으로 해명하고 있었다.
“저, 저는 그냥 상관이 시켜서 한 것뿐입니다. 잘 알지 않습니까?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군대라는 거.”
미하일 킴도 안나 프리마코바 옆에 무릎 꿇은 채 모든 책임을 죽은 안드레이 말렌코프에게 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에겐 책임이 없다 주장한다는 것이었고, 차이점은 그걸 안나 프리마코바는 러시아어로, 미하일 킴은 한국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철은, 두 사람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러시아는 땅이 넓지. 세계에서 단일 국가 중에선 가장 넓어. 그러니 당연히 사람이 살아는 있었을 거고, 그중 초능력자도 있긴 했겠지만…….’
멸망 이후 한국에서, 한국 초능력자만 봐온 강철에게 러시아인 초능력자의 존재는, 비록 이번 생에는 그렇게 되기 전 죽여버리긴 했지만, 신선했다.
‘멸망 후에는 별 쓸모 없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요긴하게 쓸 수 있겠지.’
강철은 안나 프리마코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비밀 작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누구지?”
강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저 혼자뿐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방보안국 차원의 공적인 일이 아니라, 저 해외정보국 놈들에게 속아 우리가 사적으로 지원한 일입니다. 저 친구들도 다 제 직속 부하들입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하일 킴을 바라보며 물었다.
“해외정보국에선?”
이번엔 한국어였다.
“저, 저뿐입니다. 말렌코프 중령이 죽었으니까.”
마찬가지로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러시아어 화자니까 러시아어가 나오고, 저 남자는 한국어를 할 줄 아니 그냥 한국어로 나가는 모양이군.’
조금 전 강철이 한 것은 일종의 초능력 테스트였다.
테스트를 끝마친 강철은 뒤로 돌아 작업 중인 연방보안국 요원들을 바라보았다.
‘이 이상으로 러시아 정부를 자극할 필요는 없지.’
일개 분대 규모의 무장 조직과의 싸움을 통해 강철은 자신의 현재 힘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2개 소대. 최대 60명 정도가 한계야. 그마저도 60명이 풀로 중무장을 해버리면 직접 맞서 싸우는 건 힘들고.’
오거닉 메탈로 온몸을 두른 채 일부러 강철은 총알 세례를 온전히 받아냈다.
그것은 군과의 충돌을 가정한 일종의 테스트이자, 자신을 우습게 보는, 콧대 높은 러시아 보안기관 요원들의 기를 누르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테스트와 퍼포먼스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에너지 소모량이 칼을 막을 때보다 못해도 3배는 됐어.’
테스트 끝에 강철이 내린 결론은, 절대 총기로 무장한 조직과는 싸우지 말자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이 보유 중인 금을 모두 흡수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일단 강철은, 러시아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봐, 김씨.”
강철은 미하일 킴에게 말했다.
“극동개발탐사 지분, 전부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로 넘기는 작업을 진행해 줬으면 좋겠어. 오늘 안에 말이야.”
미하일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문제없습니다. 당장 연락해서 조치해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미하일 킴은 정말로 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자신의 명령을 준행함을 확인한 강철은 이어서 안나 프리마코바에게 말했다.
“프리마코바 대위. 그대가 진정 나를 적대할 뜻이 없었다면, 오늘 있었던 일은 조용히 묻혀야 할 거야.”
안나 프리마코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뭐 묻는 건 잘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안드레이 말렌코프가 묻힌, 이제 요원들이 작업을 모두 끝내 평평해진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실종된 겁니다. 그가 여자 문제가 있었고, 돈 문제가 있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맞춰 미하일 킴이 그에게 업무 보고를 올렸다.
“됐습니다. 저희 차를 타고 하바롭스크에 도착할 때쯤이면, 모든 작업이 완료돼 있을 겁니다.”
그렇게 강철의 짧았던 러시아 출장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2.
11월 29일 월요일 오후 5시.
거목에너지 주총이 열렸다.
1주일 전과는 달리, 그 누구도 참석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주총이 끝나지도 않았다.
“2010년 11월 29일 거목에너지 임시주총 결과 한소영 씨가 신임 대표에, 김명길 씨와 김형만 씨 그리고 서용태 씨가 신임 이사로 선출됐음을 확정합니다.”
엄근식은 자신의 압도적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기존에 거목에너지 대표를 맡고 있던 늙은 가신을 유임시키고 비서실 소속 중간 간부들을 대거 신임 이사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과반이 넘는 주주가 엄근식의 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다음날 열린 거목개발계획 주총에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됐고, 12월 1일 수요일에 열린 바움리조트 주총에서도 똑같았다.
대표 한소영, 신임 이사 김명길, 김형만, 서용태.
이 기본 틀 그대로, 마치 붕어빵 찍듯, 똑같은 결과가 사흘 연속 나왔다.
그제야 엄근식은 깨달았다.
누가 진정한 적이었는가를.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그는 바움리조트 주총을 끝으로 거목그룹에서 지니고 있던 모든 권력을 잃었다.
“…… 소영이 너……. 이게 다 네가…… 네가 꾸민 짓이었단 말이냐?”
12월 2일 목요일 오후 2시.
종로구 평창동 엄근식의 자택 서재.
그곳에서 엄근식은 한소영과 대면하고 있었다.
물론, 한소영은 혼자 오지 않았다.
둥근 원탁, 그의 옆자리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강철이 함께 앉아 있었다.
“죄송해요, 회장님.”
한소영은 정말로 죄송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엄근식에게 약간 미안해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극도로 혐오하는 건 엄태욱이지, 엄근식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근식은 떨리는 눈으로 한소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강철에게로 옮겼다.
“넌 뭐야?”
엄근식의 물음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 강철.”
“강철? 설마……!”
엄근식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우진이가 이야기했던 그 괴물?’
그제야 엄근식은, 한소영의 배신에서 받은 심적 충격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강철의 몽타주를 떠올릴 수 있었다.
“…… 허허…….”
그리고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우진이 말을 듣고…… 널 치는 데 집중했어야 했는데…….”
장우진은 줄기차게 강철이 수상하다며, 그에게 좀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엄근식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엄근식은 그런 장우진의 말을 무시했다.
그저 장우진이 강철에게 싸움에서 진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엄근식에게 있어서 강철은 그저 싸움 잘하는 해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 비서실 보고만 놓고 보면, 이 모든 사건의 배후는 윤준태 아니면 백두산이었다.
강철은 그 둘과 비교했을 때, 이런 거대한 자본 싸움에 끼어들 급이 아니었다.
적어도 엄근식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오판이었다.
그리고 그 오판은 엄근식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래…… 이제 너희는…… 뭘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엄근식은 한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은 강철이 대신해주었다.
“거목그룹을 지주사로 전환할 생각이야.”
“지주사?”
“그쪽도 잘 알겠지만, 순환출자보단 지주사 구조가 대기업 집단을 유지하고 관리하기엔 더 편하거든.”
“그러면 나는? 이제 물러나는 건가?”
“뭐, 그렇게 하는 게 순리에 맞는 거 아닌가? 그쪽은 엄밀히 말하면 이제 대주주도 아니니까. 뭐, 사실 원래부터도 공식적인 대주주는 아니었지만.”
“…… 태욱이는?”
“아내가 회장인데, 남편이 그 밑에서 전무나 계열사 사장 같은 걸 하는 건 안 어울리지 않겠나? 당연히 물러나서 내조나 해야지.”
“하!”
엄근식은 웃음을 터뜨렸다.
“50년 역사의 거목이…… 웬 족보도 없는 어린 깡패 자식 손에 넘어가는구나. 허허…….”
조금 전 대화를 통해서 엄근식은 마침내 깨달았다.
한소영조차도 중심인물이 아님을.
자신을, 거목의 오너인 엄씨 가문을 엿 먹인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은 바로 강철임을.
그리고 그것은, 엄근식에게 큰 자괴감을 안겨다 주었다.
“…… 그래. 나가 봐.”
한소영은 잠시 엄근식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확인한 강철은, 그녀를 대신해 엄근식에게 통보했다.
“당신하고 당신 아들 명의로 된 재산만 챙겨. 회사 명의로 혹은 차명으로 챙겨 놓은 부동산이나 금융 자산은 손댈 생각도 하지 말고.”
엄근식은 가만히 강철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만 챙겨도, 3대는 놀고먹을 수 있지 않나? 내가 파악한 건 그렇던데?”
엄근식은 씁쓸하게 웃으며, 눈으로는 강철을 바라보면서, 한소영에게도 들으라는 듯 이야기했다.
“3대라…… 엄씨 가문의 대가 태욱이를 끝으로 끊기게 생겼는데, 과연 그게 가능하겠나?”
그 말에 한소영은 움찔했다.
강철은 피식 웃으며 엄근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알빤가?”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