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94화 (94/175)

094 예기치 못한 변수 (2)

3.

11월 25일 목요일 오후 5시.

중구 정동 주한 러시아 대사관.

“백의 동향은?”

미하일 킴의 물음에 나타샤는 두려움 가득한 기색으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또, 똑같아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저를 찾고, 비슷한 시간에 밥을 먹고, 비슷한 시간에……”

“나타샤 니콜라예브나 안드로바.”

미하일 킴은 정색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나타샤의 풀네임을 불렀다.

나타샤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당신 동생이 흰올빼미 교도소로 가는 걸 보고 싶은 모양이지? 아니야, 흰올빼미 교도소보단 차라리 흑돌고래 교도소가 더 나을 수도 있겠어.”

“아, 안 돼요. 그, 그건…… 그건…….”

“그러면 일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10살짜리 여자애를 동시에 둘이나 강간한 놈을 정신병원에 넣는 거로 끝내겠다고 우리가 해줬으면, 그만한 대가를 당신이 가져다줘야지?”

나타샤는 최대한 기억을 짜냈다.

자신의 단골인 한국인 사채업자 백두산과 관련된, 사소한 것조차도 떠올리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바, 방화동에 한식당이 있어요. 거기, 거기 자주 가요. 아주 큰 곳이에요. 가장 큰 곳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부하들이 아주 많아요.”

“또?”

“또…… 또……”

미하일 킴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정보를 읊는다고, 그게 당신이 노력하는 거로 보이게 만드는 건 아니야.”

“그리고…… 최, 최근에 어린 남자 애인을 만든 것 같아요.”

“응?”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미하일 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배, 백 회장 부하 중에 저, 저를 또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이야기해줬어요. 남자애랑 요즘 자주 단둘이서 밥을 먹는 일이 많다고요.”

“남자애?”

“이, 이제 스물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자세히 말해봐.”

나타샤는 최대한 백두산의 남자에 대해 미하일 킴에게 증언했다.

‘뭔가 있구만.’

나타샤는 그 남자를 백두산의 남자 애인이라 이야기했지만, 미하일의 생각은 달랐다.

‘타이밍이 묘하잖아?’

그렇게 나타샤는 미하일 킴에게 30분가량을 더 이야기한 끝에 대사관을 떠날 수 있었다.

미하일 킴도 나타샤가 떠나자 대사관을 나와 근처에 있는 러시아식 펍으로 들어갔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펍 내부에서 미하일 킴은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의자를 바닥에 내린 후 거기에 앉았다.

그러자 곧 어둠 속에서 안드레이 말렌코프가 나타났다.

“그래, 뭐 더 이야기한 게 있나?”

“백두산이 최근에 젊은 남자하고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젊은 남자?”

“안드로바는 남자 애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내 생각도 달라. 메신저일 가능성도 있지. 엄을 괴롭히는 사람의 메신저.”

“아니면 백두산이 엄을 괴롭히기 위해 활용하는 메신저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어쨌건, 엄이 백두산을 처리해달라는 이유가 결국 지금 자기가 겪는 어려움 때문이란 건 확실한 거구만.”

“네, 그렇습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든든한 물주야. 한국 장사꾼 중에 엄 만큼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없어.”

“조만간 작전을 시행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되도록 빨리. 단, 절대 들키지 말고, 설령 들켜도 빠져나갈 수 있게 면책특권 가진 애들 위주로 팀 구성하고.”

“네, 알겠습니다.”

미하일 킴은 펍을 나갔다.

그리고 그는 곧장 대사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펍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고물 라이터.’

그러나 담배를 물었음에도 라이터가 가스가 다 됐는지 불이 붙질 않았다.

미하일 킴은 인상을 찌푸리며 라이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화륵-!]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미하일 킴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미하일 킴은 흠칫 놀라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아주 젊은 한국인 남성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미하일 킴은 당황한 와중에도 능숙한 한국어로 고마움을 표했다.

‘잠시만, 방금 손가락에 불이?’

그리고 상대방을 살피다가, 상대방의 오른손 엄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걸 보고 그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그런 미하일 킴에게 남성은 물었다.

“나타샤 안드로바는 왜 계속 불러내는 거지?”

[탁-!]

미하일 킴은 곧장 담배를 남성에게 던졌다.

그리곤 그대로 등을 돌려 골목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빠악-!]

“커헉-!”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아 세 걸음 정도 달렸을 때, 그는 등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그만 피를 토하며 앞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크윽…….”

그리고 자빠진 미하일 킴의 등을 밟고서 남자, 강철은 말했다.

“도망치면 쓰나? 그래도 명색이 러시아 대사관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강철이 그 질문을 던진 순간, 미하일 킴은 머릿속으로 강철의 정체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은 고스란히 관심법을 통해 강철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약간 핀트가 많이 어긋나 있긴 했지만, 사실에 근접했다.

‘나타샤는 날 백두산의 남자 애인으로 보고 있고, 이 인간은 날 백두산의 메신저 정도로 보고 있다? 러시아 정보부가 마냥 허당은 아니란 건데. 근데 왜 우크라이나에선 그렇게 했지?’

강철은 씩 웃으며 미하일 킴의 뒷머리를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까앙-!]

그 순간, 미하일 킴은 미리 꺼내 놓았던, 조그맣지만 날카로운 칼로 강철의 배를 찔렀다.

그러나 그가 찌른 건 강철의 살이 아닌, 오거닉 메탈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함부로 칼질하면 쓰나? 면책특권 하나 믿고 말이야.”

[뻑-!]

강철은 그대로 미하일 킴의 면상을 주먹으로 쳤다.

미하일 킴은 그 일격에 정신을 잃었고,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쳤다.

강철은 그 칼을 수거한 후 미하일 킴을 어깨에 들쳐 맨 후 극한의 은신을 펼쳤다.

곧, 강철은 물론 미하일 킴마저도 모습을 감췄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골목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

강철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당장 오는 11월 29일 월요일 거목에너지 주총에서 자칫 잘못하면 엄근식이 다시 모든 권력을 회복하는 참사가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 강철은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빨리 움직였다.

백두산으로부터 나타샤라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연락처를 손에 넣은 강철은 곧장 그녀의 위치를 추적했다.

곧 그녀가 정동 주한러시아대사관에 있음을 확인한 강철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샤와 함께 나오는, 마찬가지로 사진 속에 담겨 있던 남자 미하일 킴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골목에서 그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강철은 미하일 킴을 하남 대마농장에 끌고 갔고, 그곳에서 약간의 물리적 완력이 동원된 설득을 한 끝에 중요한 정보를 모두 얻어낼 수 있었다.

“미하일 킴. 해외정보국 소속 대위입니다. 지금은 사업 비자를 받고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거목그룹 엄 회장이 우리에게 백두산 씨의 뒷조사와 적절한 처분을 부탁했습니다. 우린 백두산 씨가 엄 회장을 괴롭히는 장본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얼 하는가를 밝혔다.

“우린 그저 엄 회장과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의리나 인연은 없습니다. 직전에 엄 회장과 공생하던 연방보안국 소속 막심 이바노프 중령이 하던 걸 우리가 접수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왜 그걸 하는 가도 밝혔다.

강철은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관심법을 통해 교차 검증함으로써 확인했다.

“정보기관 요원이야. 그것도 러시아 정보기관. 무슨 짓을 해서 어떻게 탈출할지 모르니까,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네, 알겠십니다. 근데 이…… 뒤탈 없는 거 맞십니까? 암만 그래도 이 외교관인데 잘못하면 이 외교 문제가 벌어지는 거 아입니까?”

아주 오랜만에 이런 현장에 복귀한 김명길이 우려를 표하자 강철은 피식 웃었다.

“못 들었어? 자기 입으로 자긴 민간인 신분으로, 사업 비자로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말한 거?”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한 김명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십니다. 마 두눈 단디 뜨고 지키고 있겠십니다.”

그렇게 강철은 하남 대마농장을 떠나 다시 중구 정동으로 향했다.

“오늘 영업 안 합니다.”

목요일 밤 9시.

불 꺼진 러시아식 펍 내부.

강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 러시아 남성,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강철을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문을 잠가 놓든가 해야지 원.’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문을 잠가 놓든가, 아니면 영업을 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강철의 말에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살짝 짜증이 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안드레이 말렌코프에게 강철은 한마디 던졌다.

“안 그런가? 안드레이 말렌코프?”

그 순간, 안드레이 말렌코프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리고 그가 행동을 취하기 전, 강철의 주먹이 먼저 그의 턱에 날아가 꽂혔다.

[턱-!]

“억-!”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미하일 킴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철은 그를 들쳐 매고서 은신을 펼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1시간 뒤, 강철은 하남 대마농장에서 미하일 킴의 옆에다가 안드레이 말렌코프를 앉혀놓고 물리적 완력이 깃든 설득을 시도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미하일 킴보다도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 해외정보국 중령입니다. 사업 비자로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펍은 이전에 연방보안국이 관리하던 걸 우리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겁니다. 사업적인 용도는 없고, 그냥 안가처럼 쓰는 겁니다.”

그런 자질구레한 건 강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해외정보국에서 하바롭스크에 있는 극동개발탐사 신규 소유 증명서를 발급하는 데 힘을 썼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강철의 물음에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힘을 좀 썼습니다.”

“그럼 그 소유권을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로 옮기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안 그래?”

“그, 그건…… 힘듭니다. 그건 제가 여기서 어떻게 전화로 하기 힘듭니다.”

관심법을 통해 그게 사실이란 건 확인했다.

“카우보이가 미국 회사라면 당국에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습니다.”

“그럼 쉽게는 안 해준단 건, 해주긴 한다는 건가?”

“그, 그게…….”

그 순간,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의 꿍꿍이는 고스란히 강철에게 전달됐다.

“이, 일단 하바롭스크로 직접 가서야 합니다. 제가 사람한테 연락해 놓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적당한 성의를 보이면 늦지 않게 가능합니다.”

그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절반의 사실보단 절반의 거짓이 안드레이 말렌코프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음모의 핵심이었다.

“내일 오전 중으로 바로 떠나고 싶으니까, 빨리 항공편 알아놔. 러시아 쪽에 연락도 해 놓고.”

하지만 강철은 거기에 일단 보조를 맞춰주기로 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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