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예기치 못한 변수 (1)
1.
11월 23일 수요일 밤 9시.
종로구 평창동 엄근식 자택.
3층에 자리한 은밀한 공간에서, 엄근식은 안드레이 말렌코프와 바실리 말렌코프 그리고 미하일 킴을 접대하고 있었다.
특별히 엄근식이 엄선한 강남 텐프로들이 세 러시아인의 곁에 둘씩 붙어서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물론 엄근식에게도 둘이 붙어 있었지만, 엄근식은 그녀들에게 신경을 쓰진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어요. 하하하.”
엄근식의 말에 안드레이 말렌코프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한 손으로 텐프로 접대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엄근식을 향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즉에 말씀을 하셨어야지. 그랬으면 우리가 좀 더 제대로 도와줬을 거 아니오?”
그 태도가 거슬렸지만, 지금 엄근식에겐 그런 예의범절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하하. 이거 초면에 복잡한 속사정 이야기하는 게 또 예의가 아니잖습니까. 하하하.”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미하일 킴의 통역을 통해 듣고 있던 바실리 말렌코프가 러시아어로 무어라 크게 이야기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그런 바실리 말렌코프의 어깨를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대표께서는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먼저 방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미하일 킴의 통역에 엄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허허.”
엄근식은 문가에 서 있던 집사에게 바실리 말렌코프와 그를 접대하는 두 텐프로를 게스트룸으로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바실리 말렌코프가 두 여인과 함께 사라지자, 안드레이 말렌코프가 혀를 차며 한국어로 엄근식에게 말했다.
“바샤 저놈은 어릴 때부터 저랬소.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보단, 단순하면서도 즐거운 일만 찾았지.”
그러면서 그는 이젠 양손으로 양쪽에 앉은 텐프로녀들을 끌어안은 채 두 여인의 가슴을 쪼물락거렸다.
“그러니 평생 형한테 얹혀사는 거 아니겠소? 형처럼 즐거움과 진지함을 모두 챙기질 못하니 말이오.”
“하하하. 원래 형이 아우를 챙기는 게 도리 아니겠어요? 허허허.”
“하하하! 난 이런 건 미국이 좋단 말이오. 형이건 동생이건 자기 능력껏 사는 거 말이오. 하하하!”
그렇게 술자리는 기분 좋은 가벼운 이야기와 살짝 진지하지만 긍정적인 대화가 섞이며 분위기가 고조돼 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정을 살짝 넘겼을 때쯤, 안드레이 말렌코프와 미하일 킴 모두 접대부들과 함께 게스트룸으로 들어가면서 술자리는 파했다.
“너희들은 먼저 돌아 가.”
세 러시아인이 모두 각자에게 배정된 게스트룸으로 들어가자 엄근식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채 텐프로 접대부들을 돌려보냈다.
여인들은 2차 접대가 없었음에도 그만큼의 돈이 들어오자 오히려 좋아하며 엄근식의 집을 떠났다.
“후우…….”
엄근식은 서재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늘 앉아 집무를 보는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가다간…….’
엄근식은 최근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예기치 못한 스트레스, 장우진의 부재로 인한 업무 마비 그리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직접 자신이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하면서 부쩍 체력이 바닥나는 것을 엄근식은 느꼈다.
‘일단 죽을 땐 죽더라도…… 거목을 다시 내 걸로 만들어 놔야 해. 그래야…… 그래야 손주한테 온전히 돌아갈 거니까.’
엄근식은 지난 수요일 엄태욱과 한소영이 함께 받은 검사 결과를 떠올렸다.
‘다행히 둘 다 임신이 가능해. 특히 소영이는 건강 상태가 아주 양호해서 인공수정 시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엄태욱은 함량 미달이었다.
반면 한소영은 괜찮은 인재였다.
거목개발계획 이사 자리를 한소영에게 맡긴다고 했을 때, 장우진은 우려를 표했지만 그녀는 그 일을 제대로 잘 수행해냈다.
거기서 엄근식은 그녀에게 회장직을 물려줘도 되겠단 확신을 굳혔다.
남은 건, 그녀가 엄태욱의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가 자신의 품에 안기는 것뿐이었다.
‘거목만 정상화되고, 손주만 품에 안으면, 그날부로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지. 암.’
그렇게 하기 위해선, 저 러시아 놈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극동개발탐사 지배권을 내가 다시 행사하게 된 걸로 끝난 게 아니야. 백두산. 그 인간을 족쳐야 해.’
여전히 엄근식은 백두산을 본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백두산의 존재를 보고한 장우진은, 백두산마저도 누군가의 하수인이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엄근식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명동 백 영감 아들이야. 충분히 우릴 엿먹일 수 있는 인간이지.’
술자리에서, 엄근식은 안드레이 말렌코프에게 정확하게 백두산의 처분 방법을 알려주었다.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시간은 걸리겠지만 문제는 없다며 믿고 기다리라 답했다.
‘그래, 일단 지금은 저 러시아 놈들을 믿어 봐야지.’
2.
11월 23일 수요일.
연평도에 북한이 포격을 가해 민간인과 해병대 군인이 사망한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난 날.
강철과 엄근식은 각자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각자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국가 안보라던가 동북아에서의 전쟁 긴장감 고조 따위는 두 사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그 이유는 달랐다.
강철은 어차피 이 도발 사태가 전면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무관심했다면, 엄근식은 정부에 꽂아 둔 빨대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중재로 대통령이 더 이상의 군사적 반격을 가하진 않을 것이란 정보를 얻었기에 무관심했다.
여하간 두 사람 모두, 연평도에서의 포화와 그 속에서 죽어간 사람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 사람은 그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덕분에 주가가 빠졌을 때 싸게 살 수 있었어. 허허허.”
강철의 주변 인물인 백두산은,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23일과 24일 양일간 주가가 하락하자 그 틈을 타 싸게 우량주를 매입했다.
“3월에 북한 놈들이 군함 가라앉혔을 때, 그때 미리 사둔 방산주도 이번에 쭉 올라서 상한가에 팔았어. 허허허.”
11월 25일 목요일 정오.
강서구 방화동 한식당 VIP룸에서 강철은 백두산의 주식 매매 이야기를 들으며 청주를 마셨다.
“거목그룹 주가도 빠졌을 때 좀 사두긴 했는데, 이게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구만, 허허허.”
백두산의 입에서 거목이 나오자 강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엄근식이한테 한 방 먹었다면서?”
그 말에 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벌써 소문이 강서구에까지 전해졌나?”
“허허허. 자네처럼 버르장머리없는 유능한 청년이 패배한 이야기만큼 즐거운 이야기가 어디 있겠나?”
강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 회장은 내가 엿 먹은 게 즐겁나 봐?”
“어허. 오해는 하지 말어. 나 말고, 최 기자가 즐거워한 거니까.”
“최병욱이?”
“나야 뭐, 자네가 손에 사람 피 묻힌 걸 봤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그 친구는 그게 아니잖나.”
강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최병욱이가 내 실패를 보고 고소해한다는 거 그거 고자질하려고 날 부른 건가? 아니면, 백 회장이 당일치기로 주식 시장에서 돈 번 이야기 하려고?”
강철의 살짝 가시 돋친 물음에 백두산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술을 한 잔 마신 후, 강철을 바라보며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실은 자네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부른 걸세.”
그러면서 백두산은 강철에게 사진을 한 장 건네주었다.
강철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백인 여자?’
사진 속에는 웬 젊은 백인 미녀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아들인가?”
강철의 물음에 백두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 이름은 나타샤일세.”
“나타샤?”
“내가 자주 찾는 러시아 안마사인데, 아주 이 손맛이 기가 막혀서, 이 늙은이의 물건을 10대 소년 시절처럼 불뚝불뚝하게 만든단 말이야. 그래서 자주 찾았는데……”
백두산의 눈빛이 살짝 차갑게 변했다.
“최근에 이 년이 좀 이상해서 사람을 좀 붙여 봤거든? 근데 이번 주에 저 남자하고 벌써 세 번이나 만났더라고.”
강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난 흥신소가 아니야.”
“어허. 거 끝까지 말 좀 들어 봐.”
강철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미 관심이 식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어진 백두산의 말에 강철은 다시 사진 속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남자하고 나타샤가 들어가는 곳이 바로 러시아 대사관이야.”
강철은 도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러시아 대사관?”
“그래서 내가 그 대사관에다가 청소부 보내는 친구한테 알아봤는데, 그 남자가 최근에 부임한 외교관이라고 하네?”
그러면서 백두산은 강철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서류에는 남자의 사진과 이름, 나이 그리고 약력이 러시아어로 적혀 있었다.
“미하일 킴이라고, 고려인 출신이야. 일단 공식적으론 외무부 소속 외교관이라곤 하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강철은 호기심을 품었다.
그런 강철의 감정 변화를 파악한 백두산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부탁했다.
“자네가 그 친구 뒤를 좀 밟아 줬으면 좋겠어. 나를 대상으로 뭔가 작업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내 오해인지를 좀 알아봐 주면 좋을 것 같아.”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아, 물론 공짜는 아닐세. 돈이야 당연한 거고, 자네한테 돈보다 더 귀한 사람 하나를 소개해주려고 해.”
강철은 백두산을 바라봤다.
백두산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지금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그 양반의 최측근이야. 야당도 지리멸렬에, 그 양반 말고 또 누가 되겠나?”
백두산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2년 후 대통령에 당선될 사람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강철은 그 사람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됐고, 돈이나 잘 챙겨 줘.”
“아니, 왜? 거목그룹 상대할 때, 이 사람이 힘이 돼 주면 좋을 건데?”
백두산은, 아니 백두산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사람이 미래 대통령의 최측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강철에게, 그 사람은 미래 대통령의 충신에서 적대자로 전락할, 결과적으로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할 개살구에 불과했다.
“차라리 청와대 비서관이 더 나아. 미래 권력보다는, 지금 당장의 권력이 거목을 상대할 땐 더 편하니까.”
“아하, 그런 의미로구만. 허허허. 진작에 말했어야지. 알겠네. 내 조만간 자네한테……”
“그냥 해본 말이야. 정계 쪽 인맥은 당장에는 필요 없어.”
그런 강철의 모습에 백두산은 의구심을 가졌다.
“재벌을 상대하려면 정치인하고는 필히 친해야 할 건데?”
그 말에 강철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10대 재벌 상대할 일 생기면, 그때 알아보지.”
백두산은 더 이상 강철에게 정치인과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구태여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강철을 소개해주는 것도 백두산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아무튼, 잘 부탁하네. 나타샤. 나타샤일세.”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