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2차 공방전 (4)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엄근식을 바라봤다.
“한국인 뒷조사를 왜 우리한테 부탁하는 것이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가 러시아도 아니고, 러시아의 우호국도 아닌데 러시아 정보부에 한국인 사채업자 처분을 부탁한다는 게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엄근식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내 말발이 안 먹히는데, 한국 공무원들이 퍽이나 해주겠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약점을 안드레이 말렌코프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엄근식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한국 정치가 민간인 사찰이니 뭐니 그래서 좀 말이 많아요. 그것 때문에 이 친구들한테 부탁하려니 상황이 안 좋아서 말이에요.”
“깡패들한테 부탁해도 될 문제 아니오?”
“백두산이라는 양반 자체가 깡패 중에서도 거물급이외다. 그런데 누가 그런 거물을 치겠어요?”
“흐음…….”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의구심을 가졌다.
막심 이바노프 측으로부터 획득한 자료에 따르면, 엄근식은 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다.
그런 사람이 고작 사채업자 하나 처리하는 데 외국 정보기관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한국 속담에 소 잡을 칼로 닭 잡는다는 말이 있다고 알고 있소. 지금 엄 회장이 딱 그렇게 하려는 모양인데 말이오.”
그 말에 엄근식은 씩 웃으며 응수했다.
“아무리 닭이라도, 확실하게 잡으려면 큰 칼로 쳐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허허허.”
일단 안드레이 말렌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확인해보겠소.”
역시나 확답은 아니었지만, 엄근식은 일단 사의를 표하였다.
“고마워요.”
6.
11월 18일 목요일 저녁 7시.
엄태욱의 자택 식당.
대리석으로 만든, 모던하면서도 호화로운 느낌의 식탁에 마주 앉아 강철과 한소영은 과일 안주를 놓고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자기는 수능 안 쳤어?”
한소영의 물음에 강철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퇴학당한 마당에 수능을 왜 치지? 접수조차도 안 됐을 건데?”
“아 맞다.”
“그러는 한소영 씨는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지?”
“나나 그 새끼나 멀쩡하대. 디테일한 소견은 좀 더 기다려 봐야 알겠지만.”
“건강하다니 다행이군.”
“그럼 뭐 해? 잘못하면 그 찌질한 새끼 정자가 들어오게 생겼는데?”
한소영은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싫으신가?”
강철의 물음에 한소영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새끼는 아마 회장님도 별로 안 좋아하실걸? 세상에 그 새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게 사실이라면…… 참 불쌍한 사람 아닌가?”
“불쌍하기는! 그 새끼가 지보다 약한 사람한테 하는 짓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 안 들걸? 자기도 보지 않았어? 그 인간이 최 비서한테 어떻게 하는지?”
“좀 과하긴 하지만…… 엄태욱이 정도면 그래도 재벌들 중에선 양호한 편 아닌가?”
“자기 너무 드라마를 많이 봤다. 엄태욱 그 새끼는 재벌 중에서도 특출나게 미친놈이야.”
부하 직원에 대한 상습적인 폭언과 구타, 여성과 개 사이의 수간을 관음하며 흥분하는 변태 성욕 거기다 다른 재벌 3세들과 비교되는 찌질함까지.
한소영은 무려 20분을 자기 남편을 성토하며 열불을 냈다.
“자기가 볼 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내가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해. 나, 그 자식이랑 신혼여행 가서 한 번 자고 난 뒤로, 남자랑 같이 잔 적 없어. 근데 그 자식은? 전혀 안 그렇잖아. 안 그래?”
그러면서 한소영은 은근슬쩍 강철에게 자신을 어필했다.
“실질적으로 난 처녀라고 봐도 무방한 거잖아. 안 그래?”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철은 괜한 걸 물었다는 후회를 하며 화제를 돌렸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사흘 동안 작업이 시작돼.”
“주총 말이지?”
“월요일 거목에너지, 화요일 거목개발계획 그리고 수요일 바움리조트까지. 세 회사 주총이 끝나면, 사실상 거목은 우리 것이 돼.”
그러면서 강철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의 전술 행동을 그녀에게 공지해주었다.
“일단 에너지 주총에 참여할 엄근식 측 주주 중 건설 쪽 주주들이 불참하게 될 거야.”
“사유는?”
“뭐, 일신상의 사정이지.”
한소영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죽이려는 건 아니지?”
“말했을 텐데? 난 내가 세운 원칙에 따라서만 사람을 죽인다고.”
“그, 그래.”
강철은 말을 이었다.
“에너지의 주요 주주인 개발계획도 불참하게 될 거야. 그건 뭐, 한소영 씨가 더 잘 알겠지.”
“잘 알지. 이사회에서 그렇게 두 김씨가 난동을 부렸으니까.”
“아무튼, 에너지를 우리가 장악하면 그다음부터는 사실상 고속도로야. 현재 거목개발계획 지분 중 에너지가 가지고 있는 걸 우리가 통제하게 되면, 이사회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나 표면적으로나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거목개발계획이 대주주로 있는 바움리조트까지 자연스럽게 강철의 소유가 된다.
“바움리조트까지 장악하면, 거목상사와 화학, 건설을 모두 장악하게 돼. 그럼 모든 게 끝나.”
강철의 말이 끝나자 한소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처럼 쉽게 됐으면 좋겠네.”
“쉽게 될 거야.”
“그래서, 끝나고 나면 우리 자기는 뭘 할 건데?”
“순환출자구조를 해체해야지.”
“응?”
한소영은 의문을 품었다.
“그건 거목그룹을 해체하겠다는 거 아니야?”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지주사로 전환할 거야. 한소영 씨도 알겠지만, 순환출자보단 지주사구조가 지배구조로는 더 안성맞춤이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 회장님도 그거 하려다가 자금이 말라서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 마른 자금을 누가 들고 있지?”
그제야 한소영은 강철의 말을 이해했다.
“아. 맞네.”
한소영은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강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탐나.’
‘마술’이라고 강철이 강조하는, 신비로운 능력은 일단 둘째치더라도 저 추진력이라든가 강단 있는 모습은 마땅히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 그런 기질이었다.
엄태욱에게선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기질을, 한소영은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철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강요한다고 먹힐 사람도 아니었고, 한소영 자신도 그런 식으로 남에게 억지로 사랑을 강요하긴 싫었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한소영은 일단 상념을 떨쳐냈다.
“혹시 변수 같은 건 없을까?”
그녀의 물음에 강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어.”
그런 강철에게 한소영은 한 마디 조언을 건넸다.
“너무 안심하진 마. 세상에는, 정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으니까. 더군다나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은 재벌 회장이니까, 얼마든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관심법을 통해, 그녀가 특별히 자신의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음을 파악한 강철은, 그런 순수한 그녀의 조언에 감사를 표했다.
“참고해두지.”
7.
11월 22일 월요일 오후 5시.
거목에너지 주주총회가 개최됐다.
강철의 계획대로 엄근식의 지분이라 할 수 있는 거목건설 측 대리인은 주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엄근식의 지분이라 할 수 있는 거목개발계획 측도 불참한 만큼,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가 과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거기서 변수가 나타났다.
“극동개발탐사 대표 바실리 말렌코프 씨입니다. 저는 이분의 통역 겸 변호사인 미하일 킴이라고 합니다.”
극동개발탐사.
거목그룹의 주요 지분을 계열사별로 5~10%씩 들고 있는, 엄근식의 해외 자산.
분명 강철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엄근식 쪽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그 회사에서 무려 대표를 보낸 것이었다.
“여기, 최근에 러시아 연방 정부로부터 갱신받은 소유 증명서가 있습니다.”
극동개발탐사 측에서는 자신에게 확실한 정통성과 정당성이 있음을 과시했다.
덕분에 주총장에서 엄근식과 강철의 지분 구도는 거의 5대5가 됐다.
그랬기에 거목에너지 신임 이사회 구성안은 격렬한 논쟁 끝에 부결됐다.
그나마 다행히, 그 자리에서 강철 측이 요구한, 주총 재소집 안은 통과가 됐다.
1주일 후를 기약하며, 그렇게 거목에너지 주총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이게 말이 돼!”
강철은 분노했다.
극동개발탐사의 참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런 게 예기치 못한 변수인 건가?’
강철은 당황했다.
그러나 마냥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로 다음 날이 거목개발계획 주총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연기해. 다음 주로.”
강철은 새로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한국 지사장이 된 서용태에게 주총을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23일 화요일 아침부터 본인이 직접 움직여가며 엄근식 측 대리인들을 주총에 참여할 수 없게끔 방해했다.
차량 바퀴에 펑크를 내기도 했고, 고의로 접촉사고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은신을 펼친 상태로 길에서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려 다치게 하기도 하는 등, 정말 최선을 다해 방해공작을 펼쳤다.
덕분에 거목개발계획 주총에서도 엄근식 측과 강철 측 지분은 팽팽히 맞섰고, 별다른 소득 없이 주총을 1주일 후로 미루는 결정만 내리고선 허무하게 산회했다.
그리고 그것은 23일 수요일에 개최된 바움리조트 주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방 먹었군.”
11월 23일 수요일 밤 9시.
엄태욱의 자택 식당에서 강철은 한소영과 마주 앉아 훈제 오리에 위스키를 마시며 자신의 실수를 책망했다.
“극동개발탐사 소유권 확실히 자기한테 있는 것 맞지?”
“그래. 아주 잘 고이 모셔져 있더라.”
“흐음…… 그럼 결국 회장님이 다시 러시아 정부하고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는 건데…….”
강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그 독한 향과 식도를 태우는 화끈함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었다.
‘러시아…… 러시아……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세상을 멸망하게 한 것도 러시아였고, 눈앞에 다가온 승리를 멀리 떠나보낸 것도 러시아였다.
‘젠장…….’
강철의 표정이 굉장히 좋지 않음을 보고서, 한소영은 그를 위로하고자 한마디 건넸다.
“일단 시간을 벌었잖아. 최대한 머리를 굴려 보자. 나도 회장님한테 최대한 정보를 받아볼 테니까. 응?”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일단 걱정하지 마. 나도 마냥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 방법은 있을 거야.”
그러면서 한소영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강철에게 말했다.
“정 안 되면…… 내가 그 새끼 아이를 가져서라도…… 회장님한테 지분을 받아낼 테니까. 내가 회장님한테 지분을 받고, 자기 지분이 거기에 합쳐지면…….”
그것은 강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강철은 한소영에게 자신과 대등한 지분이 가는 걸 원치 않았다.
강철은 엄근식이 현재 소유 중인 나머지 지분까지 모두 흡수하길 바랐다.
한소영에게 바라는 역할은 그저 얼굴마담이자 전문경영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강철은 차마 그런 본심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