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악재 (2)
“그게 무슨 말이오?”
엄근식이 러시아대사관 근처 식당에 들어섰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이바노프 중령이 아닌 일반 외교관이었다.
자신을 안톤 막시모프 2등 서기관이라 소개한, 주한러시아대사관 소속 외교관은 이북억양이 약간 섞인 한국어를 구사하며 엄근식에게 이바노프 중령의 본국 송환을 통보했다.
“아니, 이바노프 중령이 왜? 무슨 사고라도 쳤단 거요?”
엄근식의 말에 안톤 막시모프는 양팔을 팔걸이에 걸치고 다리를 꼰 채 턱을 치켜든 자세에서 대답했다.
“국내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됐소.”
“아니, 러시아에 국내 정치적인 문제가 뭐가 있단 거요? 어차피 다 푸틴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니요?”
엄근식의 말에 안톤 막시모프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발언은 삼가시오. 그대가 민간 영역에 있다곤 해도,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란 것을 자각하시오.”
가르치려 드는 안톤 막시모프의 행동이 엄근식의 신경을 계속해서 긁었다.
그러나 아쉬운 쪽은 엄근식이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오? 다시는 이바노프 중령을 볼 수 없다든가?”
엄근식의 물음에 안톤 막시모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밥부터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대신 그는 그렇게 말하며, 때마침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음식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썅놈의 흰 짱개 새끼가!’
그런 안톤 막시모프의 모습에 엄근식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을은 엄근식이었고 갑은 안톤 막시모프였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에서, 외모가 노안이라는 걸 가정하면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저 젊은 러시아 공무원의 모습은, 장우진이 이야기했던 하바롭스크 당국자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참자. 지금은 이 새끼들의 힘이 필요해.’
그러나 엄근식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시간대를 80년대로 돌려놓은 것처럼 만들어준 러시아 외교관과의 불편한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안톤 막시모프의 술값까지 계산해주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건 올해 안에, 늦어도 내년 초에는 이바노프 중령을 대신할 사람이 올 거니까, 그때까진 나하고 소통하면 된다고. 잘 해봅시다. 까레예츠!”
대낮부터 보드카와 위스키를 2병씩 마시고서 대사관 관용차를 타고 돌아가는 안톤 막시모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결국 엄근식은 담아 두었던 욕을 내뱉고 말았다.
“저 호로새끼.”
바닥에 침을 뱉고서, 엄근식은 차에 올라탔다.
“회, 회사로 모셔다드리면 되겠습니까, 회장님?”
어벙한 신입 비서의 얼빵한 질문에 순간 엄근식은 부아가 확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잠시 생각하더니, 신입 비서의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그래, 오랜만에 회사로 좀 가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이건 내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
엄근식은 신입 비서에게 운전이나 제대로 하라 명령한 후, 직접 폰을 꺼내 거목상사 사장에게 연락을 넣었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굉장히 황송해하며 전화를 받은 상사 사장에게 엄근식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했다.
“러시아 쪽 정세 당장 파악해서 오늘 오후 5시까지 회장실로 와. 자네가 직접 오건, 밑에 애를 시키건 알아서 하고.”
[네, 회장님. 당장……]
뒷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은 엄근식은 시트에 등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간 비서실에서 전담하던 일을, 각 계열사에 분산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엄근식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고 있는 거지?’
장우진은 강철이라는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엄근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러나 이미 장우진이 정답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아직 그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4.
거목그룹에서 상장된 회사는 상사와 건설, 화학 3개 자회사뿐이었다.
나머지 회사들은 모두 2010년 현재 비상장사로 남아 있는 상태였으며, 이들은 모두 2017년 엄태욱이 회장이 된 이후에야 상장사로 전환될 예정이다.
“아무래도 죄다 비상장사인데 그 비상장사끼리 또 어떻게 순환출자 구조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간 윤준태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0월 4일 오후 1시 30분.
한창 엄근식이 안톤 막시모프에게 갑질을 당하고서 화를 삭이며 거목그룹 본사로 가고 있을 때, 강철은 여의도 부대찌개 집에서 부국광과 함께 밥을 먹으며 그에게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 친구가 자기가 굴리는 펀드랑 자기 개인 재산 그리고 형수들 재산 가지고 어떻게 거목그룹 상장사 세 군데에다 지분 투자를 해놓기는 했는데 뭐 미미한 수준이고 말입니다.”
라면 사리에 햄을 올려 한입 듬뿍 먹고서, 강철은 그걸 씹어 넘긴 후 부국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친구는 뭘 제안했나?”
“뭐, 금융맨이 제안할 게 뭐 있겠습니까? 쩐주가 돼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쩐주가 돼 주겠다?”
“네.”
“웃기는 친구로구만.”
쩐주는 이미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강철이 장악한 대산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두산이었다.
그 둘만으로도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그 회사가 엄씨 일가의 비자금 일부를 흡수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일단은 뭐 대충 둘러댔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좀 귀찮게 할 모양인 것 같습니다. 계속 연락이 옵니다.”
부국광은 그러면서 윤준태와 자신의 인연, 윤준태가 굴리는 펀드 규모, 윤준태의 배후, 윤준태의 취향 및 사생활 등등, 별로 쓸데가 없는 정보까지 강철에게 일일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그리고 그 시점에서 강철은 뭔가 수상함을 느꼈다.
부국광의 태도는 단순히 TMI로 치부하기엔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강철은 가만히 초능력 에너지를 끌어올려 관심법을 발동시켰다.
관심법이 발현됨과 동시에 부국광의 속마음이, 그 핵심 내용이 강철에게 전달됐다.
‘이 정도로 양념을 쳐 두면, 내가 앞으로 준태하고 자주 만나도 의심하진 않겠지?’
‘준태 말대로야. 이 어린 깡패 새끼 밑에서 일한들, 백 회장 밑에서 똘마니 노릇을 한들 무슨 미래가 있겠어?’
‘깔끔하게 먹고 미국으로 날라야지. 언제까지 한국에서 소방수 역할만 할 건 아니잖아?’
부국광은 벌써부터 배신을 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니, 그의 속마음 속 핵심 내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미 그는 윤준태와 손을 잡고 배신을 한 상태였다.
‘어째 하나같이 이 모양일까?’
강철은 냉소를 머금었다.
‘금융맨은 어떻게 파묻어야 할까? 10원짜리를 가득 챙겨서 그 밑에 깔려 죽게 해야 하나?’
강철은 가만히 물을 마셨다.
‘일단…… 덕분에 백두산한테 챙겨줄 물량을 내가 먹을 수도 있게 생겼군.’
강철은 당장에 부국광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는 부국광의 배신을 최대한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백두산한테는 당신이 소개해준 인간이 이딴 배신자였으니, 그 책임도 당신이 져야 한다고 하면 뭐 그쪽에서 할 말은 없겠지.’
물론 백두산은 그가 투자한 원금과 이자는 받을 것이다.
대신 그는 거목그룹의 지분은 1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준태…… 잘만 활용하면 이 인간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볼 수도 있겠어.’
백두산과의 정산 문제를 넘어서, 강철은 윤준태라는 존재를 활용한 반간계까지 떠올렸다.
‘장우진도 그렇고 아마 엄근식도 그렇겠지만, 다들 내 배후에 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리고 부국광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한국 지사장으로 있는 이상, 부국광과 윤준태의 회동은 강철의 배후에 윤준태가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확실하게 엄근식 쪽에게 던질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우리 젊어 보이려는 사모님이 개발계획 이사로 들어갈 예정이니까. 적당히 사모님이 공을 세울 수 있게 도와준다면, 딱 그림 좋게 나오겠지.’
그렇게 강철은 다음 공세를 위한 작전 계획을 세우며,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5.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 사이의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주요국 재외공관에 나가 있는 푸틴 라인의 무관들을 불러들였고, 곧 그들의 자리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울 것이다.
이바노프 중령의 본국 송환은 그가 바로 푸틴 라인의 무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서, 엄근식은 한 차례 뒷목을 잡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바노프 중령의 친형이 하바롭스크에 본사를 두고 있는 페이퍼컴퍼니 극동개발탐사의 대표인 이반 이바노비치 이바노프였고, 극동개발탐사의 실소유주는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바노프 중령이 권력투쟁에 휘말려 잠시 좌천됐다는 것은, 극동개발탐사의 지위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주총 전에 극동개발탐사를 이용해 역전해보려던 엄근식의 계획은 확실히 다 꼬여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거목개발계획 주총은 생각보단 엄근식에게 덜 불리하게 돌아갔다.
10월 16일 토요일 오전 9시에 시작된 거목개발계획 주총은 2시간 만에 끝났다.
주총에서는 이사 5명을 선임했는데, 그중 3명이 엄근식의 뜻대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엄근식이 최근 들어 총애하기 시작한 한소영이었다.
나머지 둘은 엄근식의 뜻과 무관하게 임명된 사람이었다.
“김형만이하고 김명길이라…….”
“김형만은 예전에 강대산의 비서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고, 김명길은 현재 대산그룹 이사입니다.”
10월 16일 토요일 오후 1시.
엄근식은 자신의 서재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양팔의 깁스는 풀었지만 아직 오른쪽 다리의 깁스는 풀지 못한 장우진이었다.
“근데 우진이 너, 괜찮은 거 맞아?”
엄근식은 장우진에게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움직임이 둔해지긴 했지만, 회장님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다면, 괜찮습니다.”
“허허, 자식…….”
장우진은 양손을 쓸 수 있게 되자마자 퇴원해서 업무에 복귀했다.
목발 투혼을 보이면서, 이전처럼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장우진의 모습을 보며 엄근식은 기특함을 느꼈다.
“아무튼, 근데 김형만이란 놈이야 그렇다 쳐도, 김명길은 어떻게 내쫓을 수 있지 않겠어? 얘 대산 이사잖아.”
“그게…… 지주사 이사라서 개발계획하고 업종이 겹치지 않아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흐음…….”
“개발계획의 정관을 바꿔서 공식적으로 지주사로 삼지 않는 이상 일단 법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반격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래,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그래도 소영이가 있으니까, 잘 해주지 않겠어?”
그 부분에 대해 장우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건 아직 회장님의 피붙이도 낳지 않은 외부인에 불과한데…….’
그러나 장우진은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내진 못했다.
어쨌건 한시름 돌린 엄근식에게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으니까.
“다 잘될 겁니다, 회장님.”
그저 그렇게 엄근식을 위로하고자 속에도 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