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1차 공방전 (4)
10.
10월 1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강남 논현동 일식집 VIP룸.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장우진은 테이블 위로 서류 뭉치 하나를 던지며 조민석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황당함과 조민석의 얄팍한 술수를 비난하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조민석은 예상했다는 듯, 거기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류를 들어서 손가락으로 일일이 내용을 가리키며 자기 주장을 펼쳐나갔다.
“우리 쪽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 인간, 강철은 현재 고3입니다.”
“그러니까, 조 회장 말씀은, 열아홉 살짜리 고아가 대산을 쥐락펴락하고 있고 더 나아가 지금 거목을 흔들고 있다, 이겁니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조민석이 장우진에게 보여준 것은 강철의 학생생활기록부 사본이었다.
그리고 그걸 본 장우진은, 당연히 조민석을 정신병자 내지는 얄팍한 수로 거목을 속이려는 무식한 깡패 두목 정도로만 취급할 뿐이었다.
“만약 이 서류 자체가 가짜라면,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부러 이런 가짜 서류를 입수하게 만든 거라면,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조민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장우진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조민석의 추리는 장우진의 표정을 살짝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다.
“엄 회장님 조카분 중에 국정원 요원이 있는 걸로 압니다.”
장우진은 살짝 조소를 거두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민석은 말을 이었다.
“그분이 만약 엄 전무의 승계를 방해하기 위해 공작을 하는 중인 거라면, 그래서 거목과 긴밀한 관계인 우리 대산을 먼저 장악해 비자금 장부에 관한 단서를 얻고, 더 나아가 엄 회장님 차명 주식 계좌를 습득해 해외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로 장난질을 하는 거라면,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시나리오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윤 과장이 그럴 의지가 있을까? 아니, 의지는 있겠지. 근데, 그럴 능력이 있을까?’
윤경태의 커리어는 절반 이상이 거목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근식은 조카가 국정원에 들어가자마자 그를 후원했고, 꽤나 정석적인 코스를 밟으며 승진하게끔 도왔다.
그것은 군에 들어간 첫째도 마찬가지였다.
‘개가 주인을 무는 경우야 종종 있지. 근데…… 윤 과장이 과연?’
장우진은 조민석의 주장에 크게 동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번 마음속에 생긴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는 강대산 회장 때부터 거목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비자금 관리 중 일부는 제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거목과 척지는 일을 하겠습니까? 거목과 척을 져서 대산이 얻는 이득이 뭐가 있겠습니까?”
조민석은 그것을 간파하고 장우진을 설득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장우진에게 건넸다.
“강철에 관한 우리 쪽 자료입니다. 현재 사는 곳, 타고 다니는 차량, 피우는 담배 브랜드, 자주 가는 식당 그리고 그 외 여러 인간관계까지. 최선을 다해 우리가 조사해놓은 겁니다.”
장우진은 가만히 조민석의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는 그것을 받아 챙겼다.
“일단, 조 회장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따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다.
조민석은 여기서 장우진이 자신의 증언을 믿고 자신과 함께 움직여주길 원했다.
그러나 일단 조민석은 이 정도 선에서 오늘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결국 믿게 될 거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조민석은 믿었다.
조만간, 장우진도 이 사실을 믿게 되리란 것을.
‘그 인간의 습격이 현실이 됐으니까.’
11.
10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요즘 너무 쉰 거 아니야? 오버파가 뭐야, 오버파가? 엉?”
동생 윤준태의 말에 윤경태는 피식 웃었다.
“그냥 운이 안 좋았던 거야. 내가 칠 때마다 역풍이 불었는데 뭐 어쩌란 거야?”
그러면서 그는 음료를 쭉 들이켰다.
“운도 실력이야.”
윤준태는 그렇게 말하며 음료를 쭉 들이켠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곤,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윤경태에게 말했다.
“소식 들었지?”
윤경태는 그가 무얼 이야기하려는지 익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일단 모르는 척했다.
“무슨 소식?”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말이야.”
“그래, 들었지.”
“이 새끼들, 아주 제대로 외삼촌 야마 돌게 만들었던데?”
“자식이…… 야마 돌게 만들다가 무슨 말이냐? 외삼촌한테?”
“이만큼 직설적인 표현도 없잖아? 아니면 뭐, 꼴받게 만들었다고 해?”
“하여튼 자식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거기 한국 지사장이 부국광 씨인 거 알고 있지?”
“그래, 알고 있지.”
“그러면 그 양반하고 나하고 예전에 크흠. 루비오토로 재미 좀 본 것도 알고 있겠네?”
루비오토.
2008년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흔들렸을 때,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상한가를 쳤던, 경북 구미에 본사를 둔 중소기업.
결과적으로 주당 15만 원이라는 경이로운 신고가를 형성한 후 쭉 하락하여 2010년 10월 현재 주당 5,600원을 지키고 있다.
“아주 국정원 요원 앞에서 주가조작했다고 자백을 하는구나?”
“크흠. 아무튼 그때 그 양반하고 나하고 그것 덕분에 살아남았잖아?”
“그래서, 그 양반하고 친하다고?”
“오늘 저녁에 밥을 먹기로 했어.”
윤경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미국 쪽에 내가 알아보니까, 본사 주소지가 도로 한복판이더라. 누가 봐도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회사인데, 그런 곳 지사장이랑 만난다고?”
“그러니까 만난다는 거 아니야. 응?”
윤준태는 씩 웃었다.
“저번에 외삼촌 집에 든 도둑이 부국광 씨 배후에서 일하는 실소유주일 거야. 부국광 씨는 어디까지나 얼굴마담이자 전문경영인에 불과한 거고 말이야.”
“그래서, 부국광이를 통해서 실소유주와 만나보겠다?”
“그동안 내가 준비한 것들로 미끼를 던지면, 만나주겠지. 그쪽에서 거목을 접수하길 바라고 있다면 말이야.”
윤경태는 걱정됐다.
“외삼촌이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인가?”
윤준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돈맥경화 걸린 재벌이 뭐가 무서워? 결국, 재벌은 돈 때문에 대우받는 거잖아?”
윤준태는 음료를 쭉 들이켜고 한 차례 트름한 후, 필드를 바라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여의도에도 소문이 퍼졌어. 이미 각당 대표랑 사무총장은 외삼촌하고 안 만나려 하고 있고, 그 밑에 최고위원급들도 슬슬 외면하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진, 형이 더 잘 알겠지?”
윤경태는 그런 윤준태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조심해. 재벌은 재벌이니까.”
12.
10월 3일 일요일 밤 9시.
오피스텔 공동현관을 나서며 강철은 전화로 부국광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윤씨 삼 형제도 거목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윤준태가 이런저런 제안을 했는데, 이게 전화상으로 설명하기엔 좀 많이 힘들어서,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내일 점심때 보자고.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강철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손가락으로 불을 붙였다.
‘예전엔 명길이한테 담배 심부름 시키면 됐는데, 이젠 그 양반도 바쁜 몸이 됐으니…… 이거 거목을 접수하고 나면 내 전용 비서 하나를 둬야 할 것 같아.’
빈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강철은 터덜터덜 연초를 태우며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윤준태…… 첫째 윤상태가 군인이고 둘째 윤경태는 날 감시한 국정원 요원이고, 셋째 윤준태는 금융맨이라고 했지?’
군부와 정보기관, 금융권의 조합.
재계 서열 17위의 거목그룹 정도는 한 번 흔들 순 있을 조합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진짜 휘청거리고 있을 땐 말이지.’
그렇게 강철이 부국광의 보고-윤준태와의 만남에 관해 생각을 하며 막 편의점으로 가는 지름길인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응?’
두 명의 남자가 골목길 사이드에서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곧, 강철의 배후도 두 명의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차단했다.
강철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땅바닥에다가 버렸다.
‘지금 이 시점에 날 노릴 만한 건…….’
강철은 전면에 선 두 남자에게 물었다.
“거목에서 보냈나?”
그 말에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꼭 맞아야 입을 열…… 잠시만.’
강철은 오거닉 메탈을 손에 두르려다 말고, 힘을 풀었다.
‘얘네들 규율이 대산 수준은 아닐 거 아니야?’
재벌은 돈으로 모든 걸 산다.
그리고 그 구매 목록에는 사람의 생명도 포함돼 있다.
오너 일가 비자금 의혹으로 검찰이 수사할 때면, 으레 중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머슴’ 하나가 자살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을 강철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이 인간들을 족친다고 해서, 순순히 입을 열 거란 보장은 없어. 대신…… 내가 그냥 조용히 잡혀간다면?’
강철은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가만히 포기한 자세로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빠악-!]
뒤에서 다가오던 사내 하나가 강철의 뒤통수를 곤봉으로 쳤다.
곤봉이 뒤통수를 치려는 순간, 강철은 오거닉 메탈을 살짝 끌어 올려 두개골을 보호했다.
덕분에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오히려 소리가 더 둔탁하게 났기에 효과는 좋았다.
강철은 그대로 쓰러지는 척, 연기했다.
“죽은 거 아니야?”
“살아 있습니다.”
“끌고 가. 실장님 기다리신다.”
곧 사내들은 강철을 들어서 골목을 나가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승합차에 태웠다.
‘연기도 힘들구만.’
강철은 자신의 손발을 묶는 손길에 간지럼을 살짝 느끼며, 애써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실장님이라. 장우진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렇게 강철은 끝까지 기절한 척 연기하며, 사내들에 의해 양주 거목그룹 소유 시멘트 공장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사내들은 강철에게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그 조치가 모두 끝났을 때, 강철은 깨어난 척, 눈을 떴다.
“어려 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10대로는 안 보이고…… 노안인가?”
장우진이 강철에게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강철은 가만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양손은 의자 팔걸이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으며, 발은 시멘트를 담은 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시멘트는 이미 굳어 있었다.
“조민석이 말로는 네가 이 모든 일의 배후라던데, 맞니?”
장우진은 아이 다루듯 강철에게 물었다.
강철은 그런 장우진을 바라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조민석이가 그 말은 안 해줬나?”
“응?”
“내가 괴물이라는 이야기.”
장우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철은 그런 장우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직접 확인하면 되겠네.”
그리고, 팔다리에 오거닉 메탈을 두른 채 강하게 힘을 줬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