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1차 공방전 (3)
7.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회장님.”
10월 1일 금요일 오후 2시.
대산그룹 본사 회장실.
전 대산식품 사장 겸 전 거목개발계획 이사 이대식은 조민석 앞에서 반쯤 무릎을 꿇은 채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집에서 그냥 누워 있는데 갑자기 거목개발계획에서 연락이 와서 이사로 임명됐다고 해서 저도 당황했습니다, 회장님.”
이대식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랬기에 조민석은 차마 그를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정말 모르는 일인 거지?”
“네, 회장님. 진짜 저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거목에서도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서 배후에 누가 있느니 묻질 않나, 아니 제 배후에 이제 누가 있습니까? 끈 떨어진 지 오래인데.”
조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당분간 어디 나가지도 말고, 가만히 집에만 있어. 공기가 수상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대식은 조민석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회장실을 나섰다.
조민석은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반쯤 누웠다.
‘대식이도 그렇고 영광이나 기태는 도대체 왜?’
엄영광과 최기태.
두 사람은 대산그룹에서 임원은커녕 과장 직책도 달아보지 못했던, 그저 그런 건달에 불과했다.
조민석이 회장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손발이 다 잘린 채 반달 비스무리하게 생활하던 것들이 이대식과 함께 갑자기 거목개발계획의 이사로 임명됐다는 사실은, 조민석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영광이랑 기태는 엄밀히 말하면 내 라인도 아니고, 구삼이 형님 라인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애들인데…… 그런 애들을 도대체 왜, 누가?’
조민석은 아주 잠깐, 도구삼의 개입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아니야. 구삼이 형님이 그럴 상황도 아니고, 설령 몸이 건강했다 해도 그런 걸 할 수 있을 사람도 아니야.’
그러나 이내 그 가능성은 조민석의 뇌리에서 말끔히 지워졌다.
도구삼의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몸 상태가 올해 안에 부고가 안 날아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나빴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거동조차 못 하는 사람이, 이런 복잡한 일을 꾸민다는 것은 조민석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그 인간이?’
도구삼 다음으로 조민석의 뇌리에 떠오른 가능성은, 강철의 개입이었다.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그 인간이 개입한 거라면…… 이건 함정이야. 나하고 거목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함정.’
거목개발계획의 지분 중 47% 정도에 해당하는 차명 계좌를 대산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 전 감쪽같이 사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사단이 일어났다.
‘주총 소집 통지일을 어긴 건 고의로 그런 걸 거야. 그 인간이라면 그런 함정을 파고도 남을 놈이지. 애초에 대식이나 영광이, 기태를 이사로 임명하는 게 목적일 리가 없으니까.’
조민석은 곧장 폰을 꺼냈다.
그리곤 장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꽤 길게 갔다.
그리고 막 조민석이 일단 전화를 끊고 문자라도 넣어둘까 생각할 때, 장우진은 전화를 받았다.
[장우진입니다.]
“조민석입니다.”
[어쩐 일입니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떤가 해서 전화했습니다.”
[오늘 저녁이라…… 알겠습니다. 시간 빼놓겠습니다. 장소는 저희 쪽에서 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민석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안 돼. 더는 안 돼. 이 이상 그 인간한테 끌려갈 수는 없어.’
거목의 비자금으로 장난질을 하는 건,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 인간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할 인간이 없어.’
이미 조민석은 이 일의 배후에 강철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그 인간을 쳐내야겠어.’
8.
금요일 오후 3시.
엄근식의 서재.
“아버지, 전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엄태욱은 엄근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저는 그 카우보이인지 지랄인지 하는 놈들하곤 일면식도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대산그룹 전무인데, 미쳤다고 거목개발계획 이사 따위 앉겠습니까? 무슨 미련이 있다고?”
엄태욱은 최대한 논리적으로 엄근식에게 자신이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와 무관함을 설득하려 했다.
엄근식은 그런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없이 차만 홀짝일 뿐이었다.
“아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차피 제가 아버지한테 그룹을 물려받을 건데, 미쳤다고 이럽니까?”
그 말에 엄근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자식이…… 아주 애비더러 관짝에 들어가라고 노래를 불러라.”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그래서…… 진짜로 넌 관련이 없다, 이거지?”
“그렇다니까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오…… 제가 미쳤다고 그런 놈들하고 손을 잡겠습니까? 이건 다 음모입니다. 아버지하고 저 사이를 이간하려는 음모.”
그러면서 엄태욱은, 구태여 붙이지 않아도 될 사족을 붙였다.
“아마 분명히 배후에 한소영 그년이 있을 겁니다. 그년이 분명……”
그리고 그것은 누그러들던 엄근식의 의심과 분노를 다시 타오르게끔 만들었다.
“이 자식이 근데!”
엄근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태욱은 당황하며 움찔했다.
‘이런 못난 놈이!’
엄근식은 아들을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가.”
그리곤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저 진짜 아닙니다, 아버지.”
“아, 글쎄 나가라니까!”
엄태욱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그가 서재를 나가자 엄근식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차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전화기를 들어 장우진을 호출했다.
곧 장우진이 서재로 들어왔다.
“주총 때 우리 쪽에서 이사 임명을 해야겠다. 그동안 대충 바지만 앉혀뒀는데, 이번 꼬라지를 보니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지당하신 결정입니다, 회장님.”
“개발계획뿐만이 아니야. 그간 제대로 이사회 구성 안 돼 있던 곳에다가 모두 이사를 임명해야겠어.”
“생각해둔 후보라도 있으십니까?”
엄근식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장우진에게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장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 회장님…… 그건…… 자칫 잘못하면……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장우진의 우려를 엄근식은 충분히 이해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우리가 임명하는 얼굴마담일 뿐이잖아?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정식으로 임원에 임명하시는 건…… 자칫 우리 출자 구조가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노출된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나? 같은 식구인데?”
“그, 그건……”
“태욱이는 믿을 수가 없어. 저 아이가 이번 일에 얼마나 연루됐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있어.”
“……”
“걱정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민석이하고 만나면 똑바로 전해. 혹시라도 이번 일에 개입하고 있다면, 절대로 결말이 좋진 않을 거라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봐.”
그렇게 장우진까지 내보내고, 엄근식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그는 이내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장우진을 부른 게 아니었다.
“그래, 소영아. 지금 집이니? 아하, 그렇구나. 그럼 내 서재로 좀 와주거라.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대신 그는 한소영을 불렀다.
9.
금요일 오후 5시.
[네가 세운 작전대로 돼 가고 있는 거야?]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아니면, 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거야?]
강철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차례 내뿜은 후 말했다.
“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진짜 계획대로 흘러가는 거 맞아?]
“왜 이렇게 의심이 많으실까? 어쨌건 결과적으로 당신한텐 좋은 거 아닌가?”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해야 할까? 친정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이사를 시댁에서 하는 게 어떤 의미일까?]
한소영의 말에 강철은 씩 웃었다.
“일신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거목그룹 계열사 이사면 괜찮은 출발 아닌가? 아무것도 안 맡고 있다가 갑자기 회장이 되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지. 근데…… 진짜 계획대로인 거 맞아?]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고 해서, 내 대답이 달라지진 않아.”
[아무리 봐도 뽀록 같은데 말이야.]
“재벌가 사모님이 뽀록이 뭐야, 뽀록이?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 뭐 이런 고급진 표현도 있는데.”
[뽀록이 더 젊어 보이잖아?]
강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축하해. 보다 나에게 더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협조를 해줄 수 있게 돼서 말이야.”
[이제부터 나한테 잘 해야 할 거야. 내 몸값이 생각보다 높아진 것 같으니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더 잘해야 한단 말이지.]
“뭐, 얼마든지.”
그렇게 강철은 전화를 끊었다.
‘됐어. 계획대로야.’
강철이, 절차상 하자가 있던 주총에서 전혀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지도 않은 인간들을 대거 이사로 임명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대식과 엄영광, 최기태를 세운 것은 조민석과 거목 사이에 오해가 생기게 하기 위함이었고, 엄태욱을 이사로 임명한 건 엄씨 부자 사이에 의심과 반목의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강철은 엄씨 부자 사이에 의심과 반목이 생각보다 강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아들은 못 믿겠지만, 며느리는 믿을 수 있으니까.’
한소영과 엄근식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 한소영이 인공수정 이야기를 꺼낸 바람에 더 엄근식으로부터 호감을 얻었을 정도였다.
강철이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자기 자산을 훔친 외부인으로부터 그룹을 지키기 위해선 믿을 만한 사람을 올려야겠지. 그리고 이왕이면 그 사람이 혈연적으로 엮이면 더 좋을 거고 말이야.’
엄근식에게 한소영은 단순한 며느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엄씨의 핏줄을 낳아줄, 말 그대로 유전적으로 연결된 존재였다.
‘조민석 쪽하고도 분명히 관계가 어긋나겠지.’
물론 조민석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거라고, 강철은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조민석이 비록 최근 몇 달 동안 그에게 눌려 살았다곤 하지만, 어쨌건 그는 한 조직을 이끌던 보스였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존재가 노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강철은 개의치 않았다.
‘열아홉 살, 이제 겨우 운전면허를 딴 고아에게 대산이 휘둘렸고, 거목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조민석은 더 큰 의심을 받게 되겠지.’
자신의 존재.
즉, 사회적으로 아직 무언가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포지션이 방패가 돼 줄 것이었기에, 강철은 오히려 조민석이 자신을 노출시키길 바랐다.
‘엄근식 표정이 궁금하네. 조민석이 내 존재를 밝혔을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