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1차 공방전 (2)
4.
엄근식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긴 했지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몸 상태가 전반적으로 나빠진 만큼, 휴식이 필요하다고 주치의가 진단을 내리긴 했다.
물론, 그 진단을 받아들일 만큼, 엄근식의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았기에, 그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병상에서 업무를 이어갔다.
“어떻게 됐다고?”
9월 28일 화요일 오후 2시.
병상에 누운 채, 링거를 꽂은 상태로 엄근식은 장우진을 보며 역정을 냈다.
그것은 장우진을 향한 게 아니었다.
“이대식, 엄영광, 최기태 그리고 엄태욱 전무가 새로 이사로 임명됐습니다.”
“아니, 태욱이가 왜?”
“확인 중입니다.”
“그래, 태욱이는 그렇다 치고 나머지 셋은 누구야? 처음 듣는 놈들인데?”
“엄영광이나 최기태는 모르겠고, 이대식은 예전에 대산식품 사장으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대산?”
“조민석의 오른팔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최근에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서 말이 많았는데…….”
엄근식은 혼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산이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태욱이는 또 왜? 설마…… 대산이랑 태욱이랑 손을 잡고서 작당질이라도 한 거야?’
엄근식은 눈을 감았다.
“회장님. 일단 김 박사 말대로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십시오. 가능한 한 제 선에서 컨트롤 해보겠습니다.”
장우진의 말에 엄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조사를 좀 해 봐. 그 카우보이라는 것들도, 대산이랑…… 태욱이도.”
“네, 알겠습니다.”
장우진은 엄근식의 이불을 정리해준 후, 병실을 나왔다.
그가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 하나가 서류를 건넸다.
장우진은 경호원에게 병실 보안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명령한 후, 자리를 옮겨 옥상에서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게 전부야?”
서류를 보고서, 장우진은 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그게 전부입니다.”
“새로울 게 없잖아? 주총에서 카우보이 그 자식들이 제출한 서류랑 뭐가 달라? 용지 낭비한 것밖에 더 돼?”
“죄, 죄송합니다.”
장우진은 서류를 도로 넣고 봉투째 비서에게 넘겼다.
“더 디테일하게 알아 와. 부국광은 언제 이 자식들하고 붙어먹었는지, 이 자식들 진짜 소유주가 누구인지.”
“네, 알겠습니다.”
장우진은 비서에게 꺼지라 손짓한 후 가만히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대산하고 엄 전무가 진짜 손을 잡은 건가?’
엄근식이 엄태욱의 품위유지비를 동결한 건 어디까지나 엄태욱이 손주를 안겨다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만약 엄태욱이 그것에 앙심을 품고 대산과 연합하여 엄근식을 물먹인 것이라면, 불효도 그만한 불효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장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재계에서 평판도 안 좋아, 손주를 안겨다 주는 것도 아니야, 이사들한테 영향력을 키워둔 것도 아니야.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한 게 없는 인간이…… 이딴 식으로 회장님 뒤통수를 쳐?’
주주총회에서, 대주주인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의 대표자로 나온 사람은, 한국 지사장이란 직책을 단 부국광이란 금융맨이었다.
주로 저축은행 등지에서 임원으로 재직하며 소방수 역할을 많이 맡았던 그의 등장에 장우진은 살짝 당황한 게 사실이었다.
‘소방수만 하던 사람이…… 공격수를 한다? 그것도 재벌을 상대로?’
아직 확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국광은 아마 얼굴마담에 불과할 것이라고 장우진은 생각했다.
‘연봉만 20억을 받던 소방수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정도의 세력이라…….’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미국 와이오밍주 버펄로에 본사를 뒀다는, 딱 봐도 페이퍼 컴퍼니로 보이는 미국계 투자사.
장우진은 그 배후가 어쩌면 엄태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산이 그 정도로 머리를 쓸 조직은 아니야. 와이오밍주가 조세회피처라는 사실도 모를 것들이니까.’
[깡-!]
장우진은 라이터를 쥔 주먹으로 난간을 가볍게 쳤다.
‘아니야…… 속단은 하면 안 돼…… 엄 전무 말도 들어 봐야지.’
그러나, 이미 장우진의 마음속에서 엄태욱은 아버지를 배신한 천하의 불효자요 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 그룹을 흔들려는 배후중상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뒤였다.
이성적으로는 아직 그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자고는 해도, 감정적으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만약 엄 전무가 범인이라면…….’
장우진은 눈을 감았다.
‘회장님이 딸이라도 한 사람 더 낳아 뒀으면 참 좋았을 건데…….’
해 봤자 의미 없는 생각만 하며, 장우진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줄담배를 태우며 분을 삭였다.
5.
“허허허, 이 사람…… 내가 큰 사고를 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 스케일로 이렇게나 빨리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허허허.”
화요일 저녁 6시 30분.
강서구 방화동 한식당 VIP룸.
강철은 백두산, 부국광과 함께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백두산은 강철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그를 추켜세웠다.
“상대가 거목이니까 가능한 짓이기도 하지. 일신 정도만 되는 체급이었어도, 이 정도로 쉽게 어떻게 도모하긴 힘들었어.”
“허허허. 그래도 명색이 재벌인데 이렇게 갖고 놀고 말이야. 대단해.”
“이게 다 백 회장이 도와준 덕분이야. 나중에 잘 되면 백 회장 지분도 넉넉하게 챙겨주지.”
“아이고, 난 됐어. 괜히 재벌들 돈 먹었다가 배탈 나서 뒤지는 수가 있거든. 허허허. 자네나 실컷 드시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부국광은, 순식간에 양자 사이 힘의 관계를 파악했다.
그는 강철이 술잔을 비우자 곧장 술병을 들고 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이 백두산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알아서 기는 부국광의 모습이 강철은 마음에 들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부국광 지사장.”
부국광.
66년생에 올해 40대 중반에 들어선 이 남자는, 본래 저축은행을 비롯한 제2, 3금융권에서 소방수 역할을 하며 돈을 벌던, 그냥저냥 평판이 나쁘지 않던 금융맨이었다.
하지만 최근 소방수로서의 실적이 영 좋지가 않아 몸값이 많이 낮아졌고, 그랬기에 별다른 직장 없이 백두산의 식객으로 살고 있던 그를, 강철은 카우보이의 한국 지사장으로 영입했다.
“근데, 거목 엄 회장이 가만히 있겠나?”
부국광에 대해 생각하던 강철을 향해, 백두산이 살짝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강철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목그룹 순환출자 구조에서 개발계획이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높은 건 사실이야. 그리고 거기에 자네가 알박기한 이상, 거목 입장에서 난처해진 것도 사실이고. 근데, 또 그것만 먹고 있다고 해서 거목이 아무것도 못 하거나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백두산의 우려는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강철이 이번에 장악한 거목개발계획은 거목그룹 순환출자 구조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거 하나 없다고 해서 거목그룹 전체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는 건 또 아니었다.
“개발계획은 미끼야.”
그런 백두산의 우려에 대해 강철은 답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짠 작전의 일부 개요를 보여 주었다.
“엄근식이 조민석을 의심하게 하고, 엄근식과 엄태욱 부자지간에 금이 가게 하는 것. 그게 내 목표야.”
백두산과 부국광은 모두 흥미롭단 표정으로 강철을 바라봤다.
강철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 지사장은 알고 있겠지만, 거목에선 이번 개발계획 주총에 대해 무효소송을 걸 수 있어.”
“무효소송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주총 소집 통보 기한을 지키지 않았거든.”
“응?”
강철은 부국광을 바라봤다.
부국광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곧장 백두산에게 설명을 했다.
“주총 소집 통보는 통상 15일 전에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겨우 하루 전에 통보를 했습니다. 당연히 절차상 하자가 발생했고, 이것을 근거로 거목 측에서 주총 결과 자체를 무효로 돌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백두산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잖나? 어디까지나 대산과 엄근식 그리고 엄근식과 엄태욱 사이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고.”
“그래서, 엄태욱이하고 조민석 따까리들을 이사로 올린 거고?”
“그렇지.”
“허허허. 이거 참…… 주먹질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머리도 꽤 쓰는구먼. 허허허.”
이 아이디어는 최병천의 작품이었지만, 강철은 그 출처를 밝히진 않았다.
“그래서,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
백두산의 물음에 강철은 술을 쭉 들이켠 후, 의미 모를 미소만 지어 보이며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그때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6.
강철의 말대로 거목그룹 측에선 9월 28일 화요일 거목개발계획 주주총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기 위한 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에선 즉각적으로 심리에 들어갔고, 주주총회가 있던 그 주 금요일에 판결을 내렸다.
“절차상의 하자가 받아들여져서 오는 10월 16일 토요일에 다시 주주총회를 소집하기로 했습니다.”
10월 1일 금요일 오후 1시.
자신의 집 서재에서 엄근식은 장우진으로부터 법원 판결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카우보이 쪽에서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급하게 일을 처리하느라 디테일한 부분에서 실수를 범한 것 같습니다.”
장우진의 말에 엄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감히 내 돈을 함부로 먹는 간덩어리가 부어오르다 못해 부풀어 오른 짓을 했으니, 그런 법적인 부분은 깜빡했겠지. 개 같은 것들…….”
엄근식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장우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태욱이하고 대산은?”
그 물음에 장우진은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산 조민석이한테 물어보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자기네들이 들고 있던 통장이 모습을 감췄다고 하는데…… 솔직히 믿음은 안 갑니다. 조민석이 따까리들의 이사 임명도 자기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와서 발뺌을 하신다? 그래, 그 깡패 새끼들은 그렇다 치고, 태욱이는?”
“그…… 엄 전무도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전혀 모른다?”
“네.”
“전혀 모르는데, 그냥 그 미국 놈들이, 아니지 검은 머리 외국인 도둑들이 알아서 한 짓이다?”
장우진은 조심스럽게 엄근식의 앞에 놓인 찻잔을 살짝 치웠다.
“이것들이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엄근식은 찻잔 대신 그 근처에 있던 조그만 다용도 원통을 들어 벽에다 집어 던졌다.
옥으로 만든 것이었던 만큼, 그것은 벽에 부딪히자마자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당장 가서 태욱이 자식 잡아 와! 그리고…… 이바노프 중령하고 시간 좀 잡고.”
“네, 알겠습니다.”
장우진은 고개를 숙이곤 서재를 나갔다.
곧, 새로 뽑은 ‘머슴’ 하나가 들어와 바닥에 널브러진 옥 조각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엄근식은 생각했다.
‘이 개자식들…… 날 호구 취급했다 이거지?’
꽉 쥔 엄근식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