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1차 공방전 (1)
1.
엄근식은 결국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다.
집안 내부에 CCTV가 없었던 만큼, 강철이 투명인간 상태로 문을 따고 들어가는 장면 자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집안 외부 CCTV와 차량 블랙박스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엄근식은 집안 ‘머슴들’을 집중 조사했다.
“저 새끼들뿐이야. 저 새끼들이 누구랑 내통해서 빼돌린 거야!”
엄근식은 ‘머슴들’을 닦달하는 한편, 집안 내부에도 CCTV를 설치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에 불과했다.
“어떤 새끼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우리를 이렇게 엿먹이는 거야!”
1주일이 넘도록 범인의 머리털 하나 찾지 못하자, 엄근식은 다급해졌다.
이미 여기저기서 돈맥경화에 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엄태욱에게 그랬듯 엄근식의 자금 사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일단 계열사 자금으로 어떻게 처리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우진과 그의 비서실 직원들이 정교한 수법으로 회사 자금을 횡령해 엄근식의 개인적인 지출을 위한 자본을 마련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우진아. 너밖에 없다. 네가 찾아야 해. 네가 반드시 찾아야 해!”
엄근식은 평정심을 잃었고, 마음이 흔들리며 판단력도 흐려졌다.
그는 장우진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우진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조사 중입니다.”
그저 그 말뿐이었다.
“회장님 상황이 많이 안 좋으셔.”
9월 12일 일요일 오후 3시.
가야호텔 VIP룸에서 강철은 한소영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달달한 디저트류 간식을 커피와 함께 곁들여 먹으면서, 강철은 가만히 한소영으로부터 엄근식 일가 내부 분위기를 전해 듣고 있었다.
“당장에 쓸 돈은 계열사에서 어떻게 장 실장이 끌어다 쓰게 해 주는 모양인데, 그게 얼마나 가겠어?”
“돈맥경화가 오기 시작했군.”
“그게 네가 원한 거 아니야?”
“내가 원한 현상이지.”
“잘됐네.”
마치 남일 이야기하듯 태평한 한소영의 모습에 강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댁에 대한 애정이 정말 하나도 안 보이시는구만.”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개인에 대해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도, 그 집안 전체에 대해선 그다지 뭐…… 아, 그런 일이 생겼구나 정도인 거지 뭐.”
“그 집안의 최고 어른이 엄근식 회장 아닌가?”
“그리고 곧 엄태욱이 최고 어른이 되겠지? 그러니 내가 왜 정을 주겠어?”
“집안이라는 집단과 엄근식 개인을 분리하겠다? 대단히 철학적인 질문일 수도 있겠어?”
“어머, 그런 이야기 좋아해? 존재론? 뭐 그런 거?”
“아니.”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자, 강철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한소영도 그다지 철학적인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기에, 한 차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 물음에 강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말했잖아? 거목을 접수한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접수할 거냐고.”
“디테일한 작전까지 설명해야 하나? 그냥 한소영 씨는 전략 목표 정도만 알아두라고. 나머지 전술적인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강철은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 보스는 자잘한 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법이라고.”
그 말에 한소영은 빵 터졌다.
“아하핫-!”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고, 그녀는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네 보스야? 그럼 네가 내 부하고?”
“뭐, 부하는 아니고 프리랜서지. 허드렛일은 다 도맡아서 하는.”
“허드렛일은 나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말했잖아. 보스는 큼직큼직한 걸 해결해야 한다고.”
“자잘한 건 아랫사람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거라고만 하지 않았어?”
“그 말이 곧 그 말이지.”
“말을 똑바로 해야지.”
한소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한소영을 향해 강철은 말했다.
“9월 말미부터 시작될 거야. 그때까지, 그쪽은 엄근식 회장 잘 달래주면서, 신임이나 얻어 두라고.”
“회장님한테는 이미 얻을 만큼 얻은 것 같은데?”
“좀 더 얻어야 해. 그래야 엄 회장이 엄태욱이가 폐급인 걸 알아차렸을 때, 그쪽한테 경영권을 나눠줄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강철의 말에서 한소영은 힌트를 얻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2.
엄근식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은, 재계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목과 딱히 크게 경쟁적인 관계가 아닌 기업들, 예컨대 삼우나 현성, 태성 같은 5대 재벌들은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거목과 경쟁 관계에 있는 재벌 기업에서는 그들의 치부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엄근식의 치부는 증권가 지라시를 통해 암암리에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거목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했다.
물론 그 하락세는 매우 일시적인 것이어서, 하락 바로 다음 날 다시 상승해 본래의 가치를 되찾긴 했다.
그러나, 자신의 치부가 그런 식으로 알려진 것 자체에 엄근식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요즘 태욱이 형 쪽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야?”
9월 13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
여의도 순댓국 맛집에서, 국정원 과장 윤경태는 자신의 동생이자 티렉스 금융투자 CEO인 윤준태와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주 소문이 쫙 났어.”
윤준태의 말에 순댓국을 앞접시에 푸며 윤경태는 답했다.
“개쪽인 거지. 재벌이 도둑을 맞았다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말이야. 뭐, 덕분에 거목 주가 잠시 떨어졌을 때, 내가 좀 주워 담았지. 중요한 계열사는 못 먹었어도, 이 정도면 뭐 나중에 딴지 정도는 걸 수 있을 거야.”
윤준태의 말에 윤경태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
“미련이라니? 이건 엄연한 우리 권리야. 우리 엄마가 여자라는 이유로 외할아버지한테 외면받았던 것을 복구할 권리라고.”
“새끼, 아주 대단한 페미니스트 납셨다. 그치? 그래서, 어제 따먹은 년들한테는 얼마나 권리를 챙겨주셨을까?”
윤경태의 비아냥거림에 윤준태는 씩 웃으며 말했다.
“씨바, 질질 싸게 만들어 줬으면, 충분히 권리 챙겨준 거 아니야?”
“에라이 철딱서니 없는 새끼야…… 순대나 처먹어.”
“헤헤헤. 형도 다음에 내가 부르면 와. 형수한테 못하는 거, 얼마든 할 수 있다니까?”
윤경태는 더 이상 이 이슈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가 않아 입을 다물고 순댓국을 퍼먹었다.
어제 먹은 폭탄주로 망가진 위장이 해독되는 걸 느끼며, 윤경태는 그렇게 말없이 앞접시에 담은 순댓국을 모두 먹었다.
그런 윤경태를 바라보며 윤준태는 말했다.
“형네 회사에서도 조사하고 있지?”
“응?”
“아니 왜, 외삼촌 집 털린 거 말이야.”
“알잖냐. BH에서 뻘짓하다 걸리는 바람에 지금 우리 회사부터 해서 전부 다 몸 사리고 있는 거.”
“에이…… 말이 몸 사리는 거지, 그래도 암암리에 할 건 다 하고 있잖아?”
“뭐…… 옆 부서에서는 따로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우린 아니야. 알잖아? 우린 국내 전문이 아닌 거.”
“에이…… 회사 업무에 국내, 해외 구분이 어딨냐고 노래를 부르던 형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윤준태의 말에 윤경태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윤경태의 말에 윤준태는 씩 웃으며 말했다.
“뭐겠어?”
윤경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하려고?”
“그럼, 당연하지.”
그러면서 윤준태는 주변을 살피더니,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내가 엄태욱이 옆에 쁘락치 하나 심어뒀다고 했지?”
윤경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맞고 사는 친구?”
“그래. 걔한테 어제 들은 건데, 비자금 관련 서류가 다 털렸데.”
그 말에 윤경태는 귀가 솔깃해졌다.
국정원 국내방첩국 소속 친구에게서는 그저 집이 털렸고, 아직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정도의 말밖엔 못 들었기에, 윤경태에게도 이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 엄씨 일가 전체가 돈맥경화에 걸렸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그 자식들 외부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이 됐다는 거야.”
“…… 그래서, 이틈을 타서 진짜 거목을 접수해 보겠다고? 단순히 흔드는 게 아니라?”
“흔들어 보고, 뿌리까지 뽑히겠다 싶으면, 뽑아버리는 거지.”
“될 것 같니?”
“뭐, 안 돼도 손해는 없잖아?”
그러면서 윤준태는 말했다.
“우리 티렉스가 굴리는 돈이 3조가 넘어. 3조. 이 중 절반만 투입해도, 거목을 자빠뜨리기엔 충분해. 특히 지금처럼 돈맥경화에 걸린 상태라면 말이야.”
윤준태는 순댓국을 한 숟갈 떠먹고 말했다.
“형의 정보력과 내 자금력이 만나면, 한국에서 우릴 이길 놈들 몇이나 되겠어?”
윤경태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윤경태에게 윤준태는 달콤한 미래를 속삭였다.
“나중에 형이 은퇴하고, 우리가 지정하는 거목 CEO가 되면 딱 그림 좋잖아. 안 그래?”
그 말에, 윤경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3.
9월 27일 월요일.
우울한 추석 주간을 보내고, 여전히 잡히지 않는 범인과 점차 조여오는 자금 유동성 경색에 따른 압박에 엄근식이 힘겨워할 때, 그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태풍 하나가 더 올라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월요일 오후 5시.
엄근식은 장우진으로부터 거목그룹 자회사이자 비상장사인 거목개발계획의 주총이 화요일 오전 9시에 열리게 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주총 소집 통보가 왔습니다.”
장우진은 엄근식에게 우편을 하나 건네주었다.
거목개발계획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지분 25%를 소유한 엄근식에게 주총 출석을 통지한 내용의 우편이었다.
“카우보이 에셋 트러스트?”
문제는 우편에 담긴, 주요 주주 구성표였다.
“이 새끼들이 뭔데 지분율이 47%나 돼?”
“저…… 그게…… 대산에 맡겨두었던 명의신탁 계좌가 전부 그쪽에 흡수된 것 같습니다.”
“뭐?!”
엄근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산에 맡긴 게 왜……”
순간, 엄근식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대산이야? 내 집을 턴 게?”
장우진은 그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이…… 이 깡패 새끼들이…… 주인 곳간을 털어?”
“일단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회장님.”
장우진은 당장 범인을 색출하는 것보단, 눈앞에 닥친 사태에 대한 대책 수립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대책…… 대책…… 나하고 태욱이 지분 합치면 얼마지?”
“45%입니다.”
“나머지 8%는?”
“그게…… 극동개발탐사입니다.”
엄근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극동개발탐사.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세워둔 페이퍼컴퍼니.
따지고 보면 엄근식의 소유였지만, 문제는 그 소유권을 행사하기 위한 증빙서류가 모두 도난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개 젖같은 깡패 새끼들…… 으윽…….”
불같이 화를 내려던 엄근식은, 올라오는 혈압에 그만 말을 잇지 못하고,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