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도둑 (2)
거목그룹 오너 일가 비자금의 총액이 얼마인지는, 아직 강철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산그룹에 세탁 하청을 맡긴 금액이 5천억인 것으로 미루었을 때, 그 이상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거목을 접수하기 위해선, 그 비자금을 확보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총수 일가의 비자금이라곤 하지만, 법적으로는 본사와 계열사 임원들 및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명의로 분산돼 있는 형태였던 만큼, 그것을 통제하게 된다면 당장에 거목 엄씨 일가가 어찌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신분증, 인감도장, 인감증명서, 자필 위임장 등이 엄근식의 서재 금고에 고이 보관돼 있었다.
강철은 두툼한 서류 봉투 3개와 커다란 장부 4개를 챙겨 가방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비자금만이 아니라, 거목이 그간 로비한 내역까지도 확보가 가능하겠어.’
대산보다 그 규모가 10배는 큰 조직이 거목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접수하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비자금을 통제해 오너 일가의 자금 유동성을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목이 그간 저지른 치부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했다.
‘이제 남은 건 한소영이 협조를 지금처럼 계속 잘 해주면 된다는 건데…….’
챙겨야 할 물건을 모두 챙기고서, 강철은 금고문을 대충 닫고 액자를 도로 걸어 위장을 복구했다.
그리곤 다시 은신을 펼친 채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서재 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보물 창고에서 금불상만 챙기면 오늘의 쇼핑은 끝이야.’
강철은 그대로 계단을 타고 보물 창고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곳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강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며, 무난하게 보물 창고 문고리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흐음. 아, 저기 있네.’
보물 창고-엄근식에게는 ‘작은 박물관’으로 불리는 공간 내부에는 옥이나 금, 은 등으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이 즐비했다.
그것들의 예술적, 문화사적 가치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철에게 그런 예술성이나 역사적 가치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대신 강철에게 의미가 있는 건 조각품, 특히 금으로 만든 조각품의 순금 무게였다.
‘묵직하구만.’
한소영이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엄근식의 소개를 토대로, 강철은 황금 불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높이 30cm에 달하는,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졌다는 불상은 추정되는 무게만 15kg은 돼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 불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금에서 엘릭서를 추출하면…… 100% 효율로 추출이 된다면 드래곤 하트 하나에서 추출하는 것보다 약간 모자란 정도가 될 거야.’
새삼, 아직 불완전한, 황금태를 죽이고 흡수한 연금술 능력에 아쉬움을 느끼며, 강철은 불상을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일부러 큰 가방을 챙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가방은 포화상태였다.
그만큼 서재에서 챙긴 물건의 부피와 크기가 크기도 했고, 불상의 사이즈가 대단하기도 했다.
물건을 챙긴 강철은 곧바로 보물 창고를 떠났다.
그리곤 늘어진 엄근식의 ‘머슴들’ 사이를 지나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응? 왜 열리지?”
문 근처에 있던 가정부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로 문을 닫기만 했을 뿐, 그 누구도 감히, 엄근식의 집을,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습격해 털어갔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로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을 뛰어넘어 엄근식의 집에서 탈출한 강철은 빠르게 달려 엄근식의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골목길에 주차해둔 자신의 차로 갔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강철의 은신은 풀렸다.
강철은 그대로 불상과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 놓고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가 시동을 걸자마자, 한소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시라도 하고 있나?’
강철은 차량 내부를 한 차례 쓱 훑은 후,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어떻게 됐어? 잘 됐어?]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거 회장님 생신상이나 잘 챙겨드려.”
[우리 파트너라고 안 했나? 그럼 정보 공유를 제대로 해야지.]
“다 됐으니까, 나중에 엄 회장 충격받아 쓰러지면 병간호나 잘 하라고.”
[진짜 성공했구나?]
한소영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대견함 그리고 즐거움의 감정이 녹아 있었다.
“시아버지의 집을 털었다는데 그렇게 즐겁나?”
[즐거운 게 아니라, 흥미롭잖아. 이때까지 재벌의 집이 털린 역사가 없는데 말이야.]
“앞으로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 나갈 거야. 도파민이 적당히 분비되도록 잘 조절하라고. 그래야 나중에 거목 회장이 됐을 때,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언제 얼굴 볼까? 내일?]
“너무 이르지 않나? 아마 당분간은 엄 회장 심기 경호해야 해서 그쪽이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 거야. 나도 조사를 좀 더 해야 할 게 있고.”
[다음 주에 봐. 너무 길게 끌어도 좋을 건 없으니까. 우리 새 계약 사항, 아직 잊지 않았지?]
강철은 피식 웃었다.
“오케이. 그렇게 하지.”
[수고했어, 꼬맹이.]
“더 수고하라고, 이모님.”
[이게 진짜……]
강철은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역사…… 그래, 역사는 분명 바뀌게 될 거야.’
원래 역사대로라면 회장이 돼야 할 엄태욱은 부인과 권력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정점에는 자신이 서게 될 것이다.
비단 거목뿐만이 아니었다.
오너 일가조차도 어찌 통제 못 할 만큼 출자 구조가 엉망인 시그니엘그룹이나, 이미 지주사 체제로의 전환을 깔끔하게 완료한 태성그룹을 제외하면 나머지 재벌 그룹의 역사에도 변화가 생길 터였다.
‘그리고 새로 쓰여진 역사는, 결국 예정대로 2022년 11월에 핵 폭발과 함께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게 되겠지.’
그리고 그 잿더미 속에서, 강철은 한반도 남부의 유일무이한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될 터였다.
‘잿더미 위의 권력도 어쨌건 권력이거든.’
4.
9월 4일 토요일, 엄근식의 칠순 잔치는 성대하게 끝났고, 그의 팔순 잔치를 예고하며 마무리됐다.
재계와 정관계 그리고 언론과 연예계까지, 대한민국 탑 클래스에 있다고 자부할 만한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서 엄근식의 기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 상승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이, 이, 이게 뭐야!”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근식은 자신의 서재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오로지 엄근식만이 구별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변화 때문이었다.
엄근식은 곧장 금고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잠금장치가 망가지고 내부가 텅 빈 금고를 보고서 아연실색했다.
“작은 박물관도 털렸습니다. 불상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엄근식은 집안 ‘머슴들’과 비서실 직원들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곧 ‘작은 박물관’, 즉 보물 창고도 털렸음이 확인됐다.
“당장 찾아내! 어떤 개새끼가 내 집을 털었는지, 당장!”
엄근식은 비서실 직원들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비서실 직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 팀은 엄근식이 집을 비운 사이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머슴들’을 조사했고 다른 한 팀은 엄근식의 집과 주변에 설치된 모든 종류의 카메라-CCTV부터 블랙박스까지를 확인하고 다녔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회장님. 너무 격해지시면 또 심장에 무리가 옵니다.”
9월 5일 일요일 새벽 2시.
턱시도를 벗지도 않은 채 서재 소파에 앉아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엄근식에게, 비서실장 장우진 전무는 신경안정제와 물 한 컵을 대령했다.
엄근식은 신경안정제는 내버려 두고, 물만 한 모금 들이켠 후, 장우진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장우진은 가만히, 엄근식의 오른쪽 라인 소파에 앉았다.
“우진아.”
“네, 회장님.”
“우리가 은행에다가 빌린 돈이 얼마라고?”
“각 계열사별로 빌린 돈만 1조 원입니다.”
“그럼, 우리가 비자금 명목으로 가지고 있는 돈은?”
“…… 1조입니다.”
“이거 노린 거야. 그렇지? 누가 우리를 엿먹이려고 노린 거라고.”
은행에서 거목그룹 계열사들이 대출받은 금액 1조.
그것은 음지에 넣어 두었던 비자금을 양성화하고 더 나아가 그 양성화된 자금을 토대로 거목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그것 때문에 거목그룹이 망할 일은 없었다.
비록 거목그룹 자산 총액의 10%에 해당하는 액수라곤 하지만, 리스크가 계열사별로 분산이 돼 있기도 했고, 못 갚을 돈도 아니었으며, 이자도 쌌기에, 기업 경영적인 측면에선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오너 일가의 지배권이었다.
“만약에 말이다…… 이걸 훔쳐 간 놈이…… 그냥 무식하게 잠적만 해도 말이야…… 한 1년만 잠적해도…… 우린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엄근식의 말에 장우진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일단 은행장들한테 모두 연락해놔서 5천억을 동결해뒀습니다.”
비자금 1조 중 5천억은 시중 은행에서 세탁하고 있었다.
그것을 동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엄근식 앞에서 재롱을 떨던 은행장들에게 한마디 하면 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산 조민석이한테도 우리 쪽에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진,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해 뒀습니다.”
나머지 5천억은 대산그룹이 세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우진은 그들이 딴짓 거리를 할 거라곤 생각도 않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장님.”
장우진은 그 논리로 엄근식을 진정시켰다.
“정 안 되면, 그깟 서류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장우진의 말에 엄근식은 어느 정도 진정됐다.
그러나 근원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분노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침입한 걸까? 내 집에? 내 작은 박물관에, 내 서재에? 응?”
자신의 집이 털렸다는 것.
재벌 역사상 최초로 집이 털린 재벌이 됐다는 것.
그것이 그를 떨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건, 조만간 범인에게 직접 들으시면 됩니다, 회장님.”
이번에도 장우진은 그런 논리로 엄근식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는 조심스럽게 신경안정제를 엄근식에게 권했다.
잠시 약 봉투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엄근식은, 이내 그걸 뜯어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물을 쭉 들이켰다.
“우진아.”
약을 먹고 나서, 점차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엄근식은 장우진에게 당부했다.
“그 새끼 잡으면…… 경찰한테 넘기지도 말고, 그렇다고 죽이지도 말고, 최대한 멀쩡하게 잡아 와야 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래야 내가…… 그 자식을…… 그 도둑놈을…… 죽일 수 있잖아.”
엄근식은 그 말을 남기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장우진은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실 직원을 불러 엄근식을 안방으로 옮겼다.
‘그 도둑놈이 혹시나 엄태욱 전무라면…… 그래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안방으로, 비서에게 업혀 들어가는 엄근식을 바라보며, 장우진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