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도둑 (1)
1.
자신의 배후에 꼬리를 붙일 만한 존재는 엄태욱과 조민석 조금 더 확장하면 부산의 조폭 3인방 정도였다.
그리고 그 꼬리로 국정원을 동원할 정도의 능력자는 엄태욱이 그중 유일했다.
그랬기에 강철은 국정원이 자신의 배후에 붙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엄태욱의 개입을 의심했고, 엄태욱이 마약 부작용으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을 때, 떠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엄태욱은 물론 최용대까지도 안색이 창백해짐에 따라 강철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뭐, 꼬리를 붙일 수는 있지. 하다못해 원룸 월세 계약할 때도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공인중개사가 괜찮은 사람인지 사기꾼인지 평판 파악도 해보고 하는데, 약을 사는데 뭐 당연해. 이해해.”
강철의 말에 엄태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또 내가 되게 귀찮아졌거든.”
그 말에 엄태욱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1알당 추가금 500을 더 줘야겠어. 그럼 2,000이 되겠지. 배송부터 영업까지 모든 부문에 걸쳐 비용을 만들었으니, 그쪽이 감수해야지. 안 그렇나? 엄태욱 전무?”
엄태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건 내가 미안하게 됐어. 아, 아버지한테 배, 배운 거거든. 도, 돌다리도 두드려가면서 건너라고.”
아버지를 팔아먹는 불효의 현장을 보며 강철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튼, 지금 2,000을 줄 수 있으면 이걸 여기 두고 갈 거고, 그게 아니라면 난 그냥 이대로 또 가는 거고.”
강철의 말에 엄태욱은 최용대를 바라보고 말했다.
“야, 가서 금고에서 꺼내 와.”
“네?”
“금고에서 꺼내 와라고! 2천만 원!”
“네, 네!”
최용대는 곧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태욱은 다시 강철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강철의 손에 들린 소형 지퍼백과 그 안에 든 ‘위스키’ 1정을 바라보았다.
“2, 2천 정도는 당장 줄 수 있어. 그 정도는 금고에 있다고. 그 그러니까…… 약부터 좀 주면 안 될까?”
애원하는 엄태욱의 모습에 강철은 단호하게 대처했다.
“돈부터 받고.”
5분 후, 최용대는 등산용 가방에 현금 2천을 넣어서 들고 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강철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소형 지퍼백을 엄태욱에게 던졌다.
엄태욱은 그걸 받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곤 ‘위스키’를 넣었다.
“아, 그리고 꼬리는 가능하다면 떼 주면 좋겠어. 뭐, 계속 달아둬도 나는 문제가 안 생길 건데, 그쪽이랑 나랑 약 거래하는 걸 그 꼬리가 알게 되면 뭐 참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그 말을 남기고 강철은 펜트하우스를 떠났다.
“용대야!”
엄태욱의 부름에 최용대는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네, 전무님.”
“경태한테 전화해서 저 개새끼 감시 그만해도 된다고 전해라. 대충 시나리오는 네가 알아서 쓰고.”
그 말을 남기고 엄태욱은 그대로 ‘위스키’가 든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잠시 후, 엄태욱은 환상의 나라로 떠났고, 최용대는 그런 엄태욱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윤경태에게 전화를 넣어 엄태욱이 시킨 일을 마무리 지었다.
2.
9월 3일 금요일 정오.
용산구 이태원동 중식당.
윤경태는 강지현에게 코스요리를 대접하고 있었다.
강지현은 상사 앞인지라 매우 조심스럽게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렸지만, 그 움직임에 쉼은 없었다.
그런 강지현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윤경태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강지현이 대충 나온 코스 요리 하나를 다 먹었을 때, 윤경태는 입을 열었다.
“일단 당분간 조민석이랑 유아영 그리고 그 대포폰 쓰는 놈, 이 셋 감청만 하고 뒤쫓지는 마.”
그 말에 강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집 알아봐 줄 테니까, 당분간 용산 쪽 안가에서 자. 너네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단 건, 결국 네 신상이 어느 정도 유출이 됐다는 거니까.”
“……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회사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면서 일을 했는데, 이 정도면 잘한 거야.”
때마침 메인 요리가 나왔고, 그것을 먹느라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잠시 단절됐다.
짬뽕 국물을 한 숟갈 떠먹고서, 윤경태는 생각했다.
‘엄태욱이 이 개새끼가…… 진짜 우리가 자기네 흥신소인 줄 아나…….’
신변이 노출됐고 그래서 공격을 당했다는 강지현의 보고를 받고서, 윤경태는 당황했다.
자기들이 그 정도로 허술했던 건지, 아니면 대산이 자신들을 찾아낼 정도로 대단한 건지 헷갈렸다.
일단 큰 위기에서 벗어난 부하 직원을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윤경태는 강지현에게 밥을 사 먹이고자 그녀를 용산으로 불렀다.
문제는, 강지현과 만나기 30분 전, 엄태욱의 비서 최용대로부터 온 전화 내용이었다.
『오해가 모두 풀렸습니다. 엄 전무님께서 대산에 대한 감시를 중단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일단 거기에 대해서 윤경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만의 항의 방식이었다.
‘오해가 풀려?’
아직은 단편적인 수준이었지만, 감시 대상과 조민석 그리고 유아영 거기다 엄태욱까지, 이 네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 관계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게 단순한 치정 문제인지 아니면 고도의 정치적 문제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엄태욱이 자신에게 감시를 부탁할 만큼, 그리고 국정원의 감시망을 파악하여 역습을 가할 만큼, 대산 측의 능력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능력이 조민석과 대산의 능력인지 아니면 감시 대상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모님이라…… 연막을 친 건가?’
강지현의 보고에 따르면, 감시 대상은 유아영을 사모님이라 불렀다.
‘내연 관계를 감추기 위한 연막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관계를 감추기 위한 연막인지…….’
여기서 더 정확하게 관계도를 파악하려면, 국정원의 공식적인 조직력을 동원해야 했다.
단순히 윤경태와 강지현, 두 사람만으로는 이 이상 정보 수집이 힘들었다.
거기다 강지현은 신변이 노출됐기에, 현장 감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엄연히 민간인 불법 사찰이야. BH에서 뻘짓 하다 걸리는 바람에 지금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인데…… 별 영양가 없는 일에 여기서 인력을 더 동원하면…… 힘들어.’
윤경태는 폰을 꺼냈다.
달력에 미리 입력해둔 일정표가 쭉 떴다.
‘내일이구만.’
9월 4일 토요일.
내일은 거목그룹 엄근식 회장의 칠순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재계 주요 인사는 물론, 엄근식 회장의 조카인 윤씨 삼 형제도 모두 참석하게 될 자리다.
‘그 인간 자뻑을 봐야 하나…….’
윤경태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하아…… 그 인간 안 보려면 준태하고나 같이 다녀야겠다.’
윤상태.
윤씨 삼형제 중 첫째이자, 현재 육군 중령으로 군무를 수행 중인, 윤경태보다 2살 많은 형.
그러나 윤경태에게 윤상태는 형이라기보단 경쟁자에 가까웠다.
‘대령도 아니면서 자기가 기수 중 제일 빠르게 대령 달거라는 놈이…… 에효…….’
민간 부문인 금융권에서 일하는 막내 윤준태는 모르겠지만,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윤경태에게 윤상태는 확실한 경쟁 상대였다.
비록 분야가 군과 국정원으로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커리어 대결이라도 하듯 지난 20년 가까이 싸워왔다.
‘여기서 위로 올라가려면 사고가 나면 안 돼.’
윤상태에게는 재벌이라는 인맥이 있었다.
윤상태는 엄근식에게 매우 잘 했고, 덕분에 엄근식을 통해 군 상부 인사들은 물론 정치권 인맥도 만들어 두었다.
그랬기에 윤상태 본인이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준장 진급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이란 게 다수의 평가였다.
반면 윤경태는 달랐다.
조금만 삐끗해도 탈이 나는 곳이 국정원인 만큼, 윤경태의 진급은 무조건적으로 보장돼 있진 않았다.
‘군이야 정권이 바뀌어도 크게 숙청이 되거나 하진 않지만, 국정원은 뭐…….’
그랬기에 윤경태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감청만 하자고. 그러다가 뭐 하나 건수 잡히면, 그걸로 물고 늘어지는 거고.’
일단, 윤경태는 그렇게 한 발 빼기로 결정했다.
“맛있냐?”
윤경태의 물음에 짜장면을 먹던 강지현이 입을 닦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먹어라.”
3.
9월 4일 토요일 저녁 6시.
중구 가야호텔 영빈관에서 거목그룹 회장 엄근식의 칠순 잔치가 성대하게 열렸다.
재계 서열 1위부터 30위까지, 끝발 있는 대기업 집단의 총수 혹은 차기 총수 후보자들이 모두 엄근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재계뿐 아니라, 정관계와 언론 심지어 주요국 대사들까지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예인들의 쇼로 분위기는 띄워졌고, 고급스러운 음식과 술로 참석자들의 위장은 즐거워했다.
‘잘 하고 있겠지?’
엄근식의 며느리 자격으로 손님들에게 인사하며 한소영은 입안이 바짝 말라가는 걸 느꼈다.
‘회장님이 여기 있어도, 집 경비 인력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닐 건데…… 설마 나한테까지 피해가 오진 않겠지?’
한소영이 우려하는 사이, 그녀의 근심이 되는 존재인 강철은 조용히 종로구 평창동 엄근식의 자택으로 침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담장은 높았고, 카메라는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수십 대가 놓여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강철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강철은 두건을 쓰고 장갑을 껴서 자신의 흔적이 최대한 남지 않도록 조치한 상태로 은신을 펼쳐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그는 미리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대로 현관을 지나 엄근식의 서재로 직진했다.
가정부들과 경비원들이 있긴 했지만,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만큼 그들은 살짝 긴장이 풀려 있었다.
덕분에 강철은, 별다른 장애물 없이 서재까지 갈 수 있었다.
‘안 잠겨 있군.’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강철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살짝 연 강철은 그 틈으로 서재 내부로 진입한 후 다시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은신을 펼치면 내가 안 보이긴 해도 결국 물리적 현상 자체는 보이니까.’
서재에 들어선 강철은, 내부에 감시 카메라가 없음을 확인하곤 일단 은신을 해제했다.
그리곤 곧장 커다란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였었지.’
한소영에게 받은 영상 자료를 근거로, 강철은 그림을 벽에서 뗐다.
그러자 그림 뒤에 숨겨져 있던 금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은 씩 웃으며, 금고 손잡이를 잡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방식이긴 한데…….’
강철에게 애초에 비밀번호는 필요가 없었다.
[퍽-!]
강철은 그대로 비밀번호 다이얼을 주먹으로 쳐서 깨부수었다.
단순히 깨부순 것만이 아닌, 아예 기계에 오거닉 메탈을 두른 손을 박아 넣어 내부 회로도 망가뜨렸다.
기계는 그렇게 무력화됐고, 강철은 너덜너덜해진 금고 잠금장치를 손쉽게 빼낸 후 문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극도로 방음에 신경을 쓴 게 패착이 됐어, 엄 회장.’
강철은 자신이 이렇게 소음을 내도 외부에서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방음에 감사하며, 금고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곧 강철의 입꼬리와 광대가 승천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