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요원 K (3)
5.
8월 31일 화요일 밤 10시.
[네, 거기서 식사만 하고 별도의 추가적인 접촉 없이 다시 서울로 올라가 헤어졌습니다.]
“흐음…….”
윤경태는 요원 K로부터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같이 간 여자가 조민석 동거녀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유아영, 89년생입니다. 조민석과 동거한 진 2년 정도 됐습니다.]
“조민석의 여자와 함께 사적인 외출을 나가는 조력자라…….”
[대상에게 차량이 노출된 건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응? 아. 신경 쓰지 마. 그냥 지나쳤다면서?”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고의로 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봐, 너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현실은 첩보 영화가 아니야. 아직도 그런 생각 가지고 있나?”
[…… 아닙니다.]
“그래, 추가로 보고할 건 없고?”
[없습니다.]
“그래. 내일 이 시간에 또 연락하자고.”
윤경태는 전화를 끊고서, 폰 화면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기집애가…… 자기가 무슨 007인 줄 아나?”
윤경태는 폰을 탁자에 올려놓고, 심야 뉴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포폰 쓰는 거나, 자기 명의 재산 하나도 없는 거야 뭐 특별할 건 없는데…….’
엄태욱의 부탁을 받아 사적으로 시작한 감시였다.
‘대산 내부 권력 투쟁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윤경태는 탁자 아래에 있던 종이 몇 장을 꺼내 볼펜으로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가장 상단에는 조민석을 적었고, 그 아래에는 김명길과 이대식을 그리고 좌측에는 유아영, 우측에는 감시대상이란 이름으로 강철을 집어넣었다.
‘조민석, 김명길, 같은 편. 김명길, 이대식, 라이벌? 유아영, 감시대상, 내연 관계?’
그러다 윤경태는 눈을 번쩍 뜨더니 한가운데에 엄태욱의 이름을 넣었다.
‘잠시만…… 이 새끼가?’
엄태욱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다.
국정원이 정권에 불리한 이슈를 덮기 위해 연예인 스캔들을 터뜨릴 때마다, 엄태욱의 이름은 한 번씩 거론되곤 했다.
윤경태는 폰을 열어 경찰청 쪽에서 받은, 유아영의 운전면허증 사진을 확인해 보았다.
눈이 크고, 전체적으로 순하게 생긴 게 딱 엄태욱이 좋아할 인상이긴 했다.
‘이 개새끼 설마 나한테?’
윤경태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조민석이 회장이 되고, 이대식이가 대가리가 커질 것 같으니 숙청하고, 새로 말 잘 듣는 따까리 하나 올리려 했는데 그게 김명길이다.’
그리고 김명길은 직접 감시대상의 대포폰을 만들어 주었고, 자기 명의로 차를 빌려 감시대상이 몰고 다니게 했다.
‘김명길이 유아영이랑 손잡은 거라면? 그래서 유아영이 자기 내연남을 돕는 일을 김명길한테 시켰고, 그 대가로 김명길이 이사가 된 거라면?’
그 논리의 전제조건은 유아영의 입김이 조민석의 인사권에까지 닿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태욱이 이 개새끼…… 우리가 무슨 흥신소인 줄 아나?’
만약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엄태욱은 마음에 드는 여자의 내연남을 치우기 위해 국정원을 이용한 것이다.
윤경태는 순간 자존심이 팍 상하는 걸 느꼈다.
‘아니야. 일단 아직은 가설이니까.’
윤경태는 다시 요원-K에게 연락했다.
[네, 과장님.]
“너, 잠시 그 새끼 감시 멈추고, 유아영 좀 마킹해 봐.”
[유아영을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윤경태는 자기가 종이 위에 그려놓은 인물 관계도를 보며 코웃음 쳤다.
‘사농공상 최하층에 있는 새끼가 아직 관 무서운 줄 모르시는구만?’
6.
자신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음을 강철은 9월 2일 목요일 아침에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강철은 서용태로부터 국정원 요원 인사기록부를 받아볼 수 있었다.
“원장이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람 제외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로만 추렸습니다.”
목요일 저녁 8시.
용산전자상가 서용태의 사무실에서, 강철은 인사기록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경찰 정보국과는 달리, 국정원 전체 인사기록부였기에, 그 양이 상당했다.
‘과장급이 나를 직접 감시할 리는 없고. 아! 여기 있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강철이 조사 범위를 6급 이하로 한정했다는 것과 요원-K, 강지현이 강씨여서 비교적 앞쪽 파일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 찾는 데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진 않았단 것이었다.
강철은 강지현의 파일을 따로 빼낸 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서용태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마술은 오늘 안 보여주셔도 됩니다. 헤헤.”
어딘지 모르게 과잉된 충성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강철은 슬며시 관심법을 발동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곤 물었다.
“2억 중에 인건비가 몇 프로나 되지?”
“그…… 사실 인건비가 제일 셉니다.”
“그래서, 몇 프로?”
“한…… 70% 정도?”
거짓은 아니었다.
“70이라…… 1억 4천이 인건비라는 건데…… 그 중 서 이사가 먹은 게 얼마나 되지?”
“그…… 저는 솔직히 말하면 10%도 못 건집니다. 제가 하는 건 좌표 지정해주는 것 정도고 실제로 일하는 건 짱개 애들이라서…….”
이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구만.”
강철은 관심법을 거두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라…… 아주 훌륭해.’
강철은 담배를 태우며 강지현의 인사기록부를 확인했다.
‘85년 5월 23일생. 노량진 원룸에서 혼자 살고 계시고…… 맞네. 자차로 사람 감시하고 다니는 거.’
그녀의 연락처까지 접수한 강철은, 폰을 열어 프로그램에 그것을 입력해 보았다.
그러다가, 입력을 완료하기 직전, 서용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내가 지금 이 구버전 프로그램으로 이 여자를 추적하면, 저쪽에서 역추적할 수 있나?”
그 물음에 서용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역추적은 불가능합니다. 뭐, 듣기론 CIA랑 러시아 FSB 쪽에서 역추적 프로그램 개발 중이라곤 하는데, 일단 아직 쓰이는 건 없습니다.”
“그래?”
강철은 마음 놓고 번호를 입력했다.
잠시 로딩 시간이 걸리더니, 이내 강철의 폰에 강지현의 위치 좌표가 찍혔다.
‘…… 송파구 잠실동? 잠시만 여기…… 조민석이 집이잖아?’
자신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음을 느꼈을 때, 강철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애초에 국정원의 목표가 조민석이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처음 국정원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시나리오였다.
‘경찰만 깡패 잡는 건 아니니까.’
그랬기에 일부러 강철은 유아영을 불러낸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 사적인 시간을 가짐으로써, 국정원에 교란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맞네. 애초에 조민석을 감시하려던 거였네. 그럼 이야기가 성립이 되지.’
국정원에서 자신을 유아영의 내연남 정도로만 판단하고, 감시 인력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그 인력을 조민석 감시에 투입했다.
시나리오의 아귀는 딱딱 들어맞았다.
‘잠시만 이 여자 소속이…….’
강철은 강지현의 인사기록부를 다시 확인했다.
‘해외정보국 범죄조사단 3팀 5파트.’
강철은 해당 부서 소속 요원들의 명단을 추려냈다.
‘윤경태. 해외정보국 범죄조사단 3팀 5파트장.’
그리고 5분 후, 강철은 강지현의 직속 상관을 찾아냈다.
‘윤경태…… 엄태욱이 외사촌 중 하나가 국정원에서 일한다고…….’
엄태욱은 아직 연락이 없었다.
‘위스키’ 구매를 위한 협상도, 그렇다고 돈을 주고 거래하겠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저 엄태욱은 침묵할 뿐이었다.
‘만약 엄태욱이 윤경태한테 의뢰한 거라면?’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흐음…….’
그렇게 강철이 다시 생각에 잠겼을 때,
[지이이이잉-!]
그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유아영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강철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지금 좀 바빠요?]
“여유롭진 않지.”
[잠깐 집에 좀 와줄 수 있을까요?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네.]
뭔가 이상했다.
유아영이 자신에게 먼저 연락할 일도, 먼저 보자고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잠시만…… 감시 대상이 조민석이 아니라 유아영이라면?’
강철은 곧장 유아영에게 대답했다.
“알았어. 곧 그리로 넘어가지.”
그리고 강철은 서류를 챙겨서 차에 올라타 곧장 잠실로 달렸다.
잠시 후, 그는 잠실 주상복합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가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유아영이 그의 차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따라와요.”
유아영은 강철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강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감시당하는 것 같아요.”
예상대로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며칠 전에 그쪽이랑 아산에 해장국 먹으러 갈 때 봤던 회색 세단 있잖아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제가 의외로 기억력이 좋아요. 아무튼, 그 회색 세단 말이에요. 그게 며칠 동안 제가 가는 곳마다 나타났어요.”
“흐음…….”
강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지금도 아파트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어요. 집에서 내려다보는데 진짜 너무 무서워요. 누구예요? 누가 저 감시하는 거예요?”
강철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쪽…… 과잉기억증후군인가?”
“네?”
“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유아영의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에 대한 이슈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결국, 직접 부딪혀야 한다는 건데.’
강철은 일단 유아영을 안심시켰다.
“주 타깃은 아마 조민석일 거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
그리고 강철은 차를 몰고 잠실을 떠났다.
자신의 뒤에 따로 누가 붙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속으로 이를 갈며 고민했다.
‘정면 돌파를 해야 하나?’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네, 별 이상 없습니다.”
밤 10시.
강지현은 원룸촌 입구 골목길에 차를 세워두고 윤경태에게 일일 보고를 올렸다.
“…… 외람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하나 내보자면 유아영 측을 감시하는 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실효성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야. 일단 당분간 계속 감시하고 있어.]
“…… 네.”
보고를 끝마치고, 그녀는 잠시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나 하려고 국정원에 들어온 건 아닌데…….’
영화를 보고 꿈꾸었던 첩보 요원의 삶.
그러나 국정원 요원으로서의 실제 삶은 영화와 매우 달랐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퇴사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숨을 고른 그녀는 이내 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원룸으로 가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막, 좁은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길로 들어섰을 때,
[퍽-!]
별안간 날아든 발차기에 그녀는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커헉-!’
기습 공격에 속절없이 당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그러나 그녀가 미처 반격 태세를 취하기도 전에, 강한 손길이 그녀의 목줄을 틀어쥔 채 그녀를 벽으로 밀어냈다.
“커억-!”
그녀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확인했다.
“너 누구야?”
늑대의 눈을 한 강철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