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재벌의 우정 (4)
6.
8월 21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어, 오랜만이요, 엄 전무.”
남산 가야호텔 VIP라운지.
최용대를 병풍으로 세운 채 위스키를 마시고 있던 엄태욱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VIP라운지로 들어오는, 상당히 피곤한 안색의 동년배 사내를 향해 다가가며 그를 껴안았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응? 반가워.”
갑작스러운 엄태욱의 포옹에 사내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일단 화답차 마주 포옹을 해주긴 했다.
“하하하, 지난번 외할아버지 제사 때 한 번 보고 난 뒤로 5개월만 아니오?”
“그간 연락도 못 해서 영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래도 보니까 때깔은 좋은 것 같네. 응? 하하. 자, 앉자고.”
엄태욱은 사내를 자리로 안내했다.
사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칵테일 한 잔이 그의 앞에 놓였다.
“내 입맛도 기억해주시고, 역시 엄 전무의 디테일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사내는 달달한 칵테일을 한 잔 마시곤 엄태욱을 띄워주었다.
“우리가 외사촌이기 이전에 친구잖아. 친구 취향 정도는 알아야지, 안 그래? 윤 과장?”
“친구? 허허허. 그렇지. 친구지.”
사내의 정체는 윤씨 트로이카 중 둘째이자 엄태욱과는 69년생 동갑내기인 외사촌 윤경태였다.
‘이 새끼 뭐지?’
윤경태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의혹을 품은 채 엄태욱을 지켜봤다.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그렇게 윤경태가 의심하고 있을 때, 엄태욱은 빠르게 본론으로 대화를 넘겼다.
“윤 과장,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어느 파트라고 했지?”
“구체적으로 말하긴 좀 그렇고…… 잘못하면 회사 조직도가 노출이 될 수 있으니까…… 그냥 국내에 잠입한 해외 조폭들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해외 조폭 담당…… 그럼 국내 조폭도 담당하겠네?”
“뭐, 원칙적으로야 그쪽 팀은 따로 있긴 한데 우리도 어느 정도는 같이 관할하기도 하지. 애초에 해외에서 들어온 놈들이 따로 놀거나 하진 않으니까.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요?”
윤경태의 의심은 더 커지고 있었다.
‘평소에 관심도 없던 놈이?’
엄태욱은 윤경태의 직업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관료제를 자기 발아래로 두고 보는 재벌 특유의 오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처럼 먼저 찾는 일도 없었다.
‘진짜 사고 거하게 쳤나?’
그런 윤경태의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태욱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우리가 대산하고 거래하는 관계라는 건 알고 있지?”
엄태욱의 말에 윤경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목건설이 짓는 아파트에 대산에서 인력하고 장비를 납품하는 걸로 알고 있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야.”
“뭐, 거목푸드에서 만드는 아이스크림 중 절반 정도가 대산식품 공장에서 생산된다고는 들었는데…….”
“에이, 이 친구야. 왜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리나?”
엄태욱은 씩 웃었다.
“우리가 대산하고 졸라게 딥한 관계라는 거 알고 있잖아. 국정원이 그것도 몰라?”
윤경태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 대산 보스가 갈렸어.”
“이사회가 개편됐다는 건 뉴스로 봐서 알고 있소.”
“대산이 뉴스에 나올 정도는 아닐 건데?”
“신문 경제란 단신으로 나온 게 있지.”
“그래? 뭐, 아무튼. 그거랑 관련해서 조사를 좀 부탁하고 싶어서 말이야.”
“조사?”
엄태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나는 좀 찝찝해서 말이야. 뭐, 걔들이 정상적인 기업이었다면 그냥 흔한 내부 투쟁 정도였겠지만, 근본이 깡패잖아? 지금도 전국구 깡패고.”
“흐음…… 허허. 말했다시피 우리는 한국에 들어온 해외 조폭을 관리하는 일을 하지 국내 조폭은…… 차라리 경찰에 의뢰하는 게 어떤가 싶은데 말이오? 아니면 검찰이나.”
계속해서 한발 빼려는 윤경태의 모습에 엄태욱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성질을 잠시 억눌러야 할 때다.
아쉬운 쪽이 자신이었던 만큼,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태욱에게도 그 정도 판단력은 있었다.
“이 친구, 이거. 능구렁이 다 됐구만? 옛날에는 되게 시원시원한 게 사내다웠는데 말이야.”
“허허허…… 나이를 먹으니까 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말이오.”
엄태욱은 최용대에게 손짓했다.
최용대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윤경태 앞에 놔두었다.
윤경태는 엄태욱을 바라보았다.
엄태욱은 열어보라며 손짓했다.
윤경태는 봉투를 들어 내용물을 살폈다.
‘흐음…….’
1,000만 원짜리 수표 10장이 들어 있었다.
“먹어. 탈 나는 거 아니니까.”
“허허허…… 이런 거 잘못 먹으면…… 탈 나는 정도가 아닌데 말이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윤경태는 봉투를 챙겼다.
“그래, 뭘 알아봐 드릴까?”
“이제야 말이 통하네. 하하하.”
엄태욱은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윤경태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새로 회장이 된 조민석. 그 인간한테 조력자가 있는 것 같아. 약도 팔고, 사람도 패고, 아무튼 침투에도 능하고 도둑질도 잘하고 그런 놈인데, 좀 조사를 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엄태욱은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윤경태에게 건네주었다.
“조민석이 번호야 알 거고, 그 조력자 새끼 연락처야. 대포폰 같긴 한데, 국정원 정도면 대포폰을 어디서 누가 뚫었는지도 알 수 있지 않겠어?”
윤경태는 쪽지를 받아 챙겼다.
“일단 다른 파트에 물어서 확인은 해 보겠소. 근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알다시피 나는 해외 조폭 담당이라서.”
“하하하! 이 친구야. 친구가 하는 부탁이잖아.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멋대로 난이도를 정하는 엄태욱의 모습이 가소로웠기에 윤경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엄태욱은 그 웃음을 다르게 이해했다.
“그래. 친구한테 떠보는 건 그만하고, 잘 좀 부탁해.”
그렇게 엄태욱의 의뢰는 비공식적으로 국정원에 접수됐다.
7.
8월 23일 월요일 정오.
상해탄 천호본점 룸에서 강철은 최병천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산 쪽에서 관리하던 거목 오너 비자금 중에 500억 정도는 엄태욱 품위 유지비로 책정이 돼 있었습니다.”
짜장면을 흡입하는 강철의 정수리를 보며 최병천은 자신이 일요일과 월요일 오전에 걸쳐 검토한 자료에 대한 해석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그중 300억이 즉시 인출 가능하게 현찰로 준비돼 있었는데, 그게 지난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 사이에 다시 세탁기에 들어갔습니다.”
최병천의 보고를 듣고서, 강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휴지로 입을 닦고, 최병천에게 물었다.
“인출 가능하게 준비돼 있었다는 게 무슨 말이요? 통장에 돈이 들어 있었다는 거요?”
“조국은행 강남논현지점 금고에 현찰로 그대로 보관 중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뭐, 형식상으로는 통장에 들어가 있는 거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게 싹 사라졌다?”
“네, 금고의 현찰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사라졌다고?”
“아, 죄송합니다. 자금 세탁 중인 200억에 물타기가 됐단 의미였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금 엄태욱이 빼내 쓸 수 있는 비자금은 0원이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흐음…….”
지난 토요일, 약 배달을 갔을 때, 엄태욱은 돈을 준비해두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강철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당황했다.
60억도 아니고, 고작 6억을 재벌이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철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강철은 최병천에게 비자금 흐름의 추적을 명령했고, 최병천은 오늘 그에게 그 결과를 알려준 것이었다.
“거목 비자금을 대산에서…… 그러니까 조민석 쪽에서 임의로 손댈 수는 없다고 했죠? 저번에?”
강철의 물음에 최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감증명서랑 도장, 위임장을 전부 거목그룹 쪽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대산 자체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결국 거목그룹이 개입해서 돈을 뺐다는 건데…… 흐음.”
강철은 다시 짜장면에 얼굴을 처박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최병천도 일단 배가 굉장히 고팠기에, 곧장 짬뽕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엄태욱이 한소영한테 욕을 했다고 했어, 인공수정 건으로. 그럼 엄근식이 엄태욱한테 인공수정하라 압박을 가했다는 건데…….’
의외로 굉장히 사적이고 가정적인 이유로 이런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단 생각에 강철은 짜장면을 먹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손자를 보는 일은 중요하지. 전근대적인 혈통에 근거한 권위가 기업을 지배하는 재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가정사지.’
강철은 계란국물을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리곤 군만두를 집어 먹는 최병천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 쪽에서 인감증명서랑 도장, 위임장을 확보하면 거목의 개입 없이도 그쪽 비자금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죠?”
“아, 네, 그렇습니다.”
최병천은 입을 막고서, 군만두를 최대한 빨리 씹어 삼키곤 말을 이었다.
“조금 무리가 생길 수는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국내에 남아 있는 3천억 전부를 해외로 빼돌릴 수도 있습니다. 뭐, 물론 그 전에 대산에서도 외주를 맡긴 2천억을 회수해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뭐, 어쨌건 우리가 통제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네, 그렇습니다.”
그 순간,
[지이잉-!]
강철의 폰이 짧게 진동했다.
“잠시만요.”
강철은 최병천에게 양해를 구하곤, 폰을 꺼냈다.
한소영으로부터의 문자였다.
<찍음>
짧은 문자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강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강철은 씩 웃으며 답장했다.
<ㅇㅋ 곧 전화함>
그리고 강철은 최병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저번에 최 감사한테 이야기했던 거 말이에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그 있잖아요. 해외에다가 계좌 하나 터 두는 거.”
“아, 네. 말씀하신 적 있으십니다.”
“알아는 보셨어요?”
“네, 알아봤습니다.”
“그거 하나 만들어 봅시다.”
“해외 계좌를 말입니까?”
“힘들어요?”
“아, 힘들진 않습니다. 다만…… 혹시 그게 거목 비자금하고 관련이 있는 겁니까?”
강철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최병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9월에…… 그러니까 보자…… 추석 전에나 돼야 성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시간은. 그냥 만들기나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몇 개나 만들면 되겠습니까?”
강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 3개 정도면 무난하지 않을까요? 국적도 다 따로따로 해서.”
“네, 알겠습니다.”
강철은 흡족한 표정으로 최병천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남은 짜장면을 모두 흡입했다.
‘겨우 300억만 동결 됐는데도 엄태욱은 아무것도 못 했어. 그럼 3천억이 동결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러시아에 나가 있는 2천억을 확보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어차피 부채가 5천억이 넘는 상황에서, 현금 3천억이 증발하면 분명 큰 타격이 될 거니까.’
그렇게 강철은 기분 좋게 식사를 끝마쳤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