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재벌의 우정 (3)
4.
8월 20일 금요일 저녁 7시.
청담동 한식당.
방에서 조민석은 거목그룹 회장 비서실장 장우진과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요즘 대산에서 약 장사도 합니까?”
장우진의 물음에 버섯구이를 한 젓가락 집어 먹으려던 조민석은, 잠시 그것을 멈추었다.
그리곤 장우진을 바라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엄 전무님이 최근에 약에 빠져 산다는 이야기가 들려 오고 있습니다.”
조민석은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연기를 해?’
장우진은 그런 조민석의 모습에,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엄 전무님이 따로 약장수한테 찾아갈 사람도 아니고, 대산에서 공급하나 했는데…… 아닌가 봅니다?”
장우진의 물음에 조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잠깐 뽕을 취급했던 적은 있는데, 워낙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고, 그룹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서면서 비용만 많이 들어서 손에서 뗀 지 오래입니다.”
“흐음…… 그래요?”
장우진은 일단 이 이슈에 대해선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기로 했다.
“이사들이 맡긴 돈 말입니다.”
대신 장우진은, 오늘 조민석과 만난 진짜 이유에 관련된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직 국내에 남아 있는 게 얼마 정도 됩니까?”
조민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가 알고 묻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거목 오너 일가 비자금은 세탁의 주체가 대산일 뿐, 실제로 그걸 세밀하게 관리하는 건 거목 회장 비서실이었다.
‘엄태욱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러는 건가?’
조민석은 장우진의 의도를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 새끼도 엄태욱이가 회장되면 나가리될 놈 아닌가?’
일단 조민석은, 정석대로 말하기로 했다.
“크게 3장 됩니다.”
“흐음…… 3천억이라.”
“2장은 그쪽에서 러시아로 넘겼지 않습니까.”
“그랬죠. 그랬는데…….”
장우진은 술을 한 잔 마셨다.
조민석이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3천억 중에 엄 전무님 품위 유지비로 들어가는 돈이 얼마쯤 됩니까?”
품위 유지비.
국세청이나 검찰 같은 사정기관에 잡히면 곤란한 지출.
그것을 위해 쌓아둔 현금.
‘뭐야? 진짜 뭐 알고 이러는 거야?’
그것의 행방을 묻는 장우진의 질문에 조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침착하자. 만약에…… 만약에 진짜 엄태욱이가 자기 애비한테 일러바쳐서 이러는 거라면…… 침착하자.’
강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받은 스트레스와 유아영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에 터진 분노로 인해 홧김에 지르긴 했지만, 그 후환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히 있었다.
그랬기에 조민석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장우진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500억 정도가 엄 전무님 품위 유지비로 책정이 돼 있는데, 그 중 300억은 항상 현찰로 준비가 돼 있고 나머지 200억은 지금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중입니다.”
“흐음…… 500억에 현찰은 300억이라…….”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장우진은 이내 계산을 끝냈다는 표정으로 조민석을 바라보며 용건을 말했다.
“300억도 다시 세탁기에 넣으십시오.”
“네?”
조민석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뭔 소리야?’
그러나 도통, 장우진이 하는 말이 뭘 의도로 하는 것인질 파악할 수가 없었다.
“300억은 이미 깨끗하게 세탁이 된 겁니다. 구태여 다시 세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수수료만 더……”
“하라면 하십시오.”
원청에서 까라니, 하청은 깔 수밖에.
조민석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뭡니까?”
그 물음에 장우진은 슬쩍 조민석을 바라보며 짧게 한마디 던졌다.
“알 필요 없습니다.”
조민석은 불만도 많았고, 의문점도 많았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시 세탁해도 결국 기록은 우리 쪽에 남게 돼. 엄태욱이가 나하고 있던 일을 떠벌린 건 아닌 모양이야.’
다만, 자신이 우려했던 상황은 아니라 판단하고, 다소 안도하긴 했다.
‘장우진이를 어떻게 구워삶기에는…… 이 인간은 철저한 회장 똘마니라 힘들고…… 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이사한테 접근해야 할 것 같은데…….’
갈아탈 말을 빨리 알아봐야겠단 생각을 품으며, 그렇게 조민석은 아까 먹으려던 버섯구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5.
“뭐?!”
8월 21일 토요일 오전 11시.
도곡동 아파트 레이 글로리아 B동 펜트하우스 거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니 이 새끼야. 죄송한 게 아니라, 통장에 왜 돈이 없다는 거야?”
“그, 그게……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싹 빠져나갔습니다.”
“아니, 이 머저리 새끼야! 그러니까 누가 돈을 싹 빼갔냐고!”
“그, 그게…… 아, 아무래도…… 대산 쪽 같습니다.”
“야이 새대가리 새끼야!”
엄태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최용대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최용대는 뒤로 자빠졌다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산에서 관리했으니까, 당연히 대산이겠지! 그러니까, 그게 조민석이가 독단적으로 나 엿 먹이려고 한 짓인지 아닌지를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본인의 문제점은 망각한 채, 엄태욱은 엄한 최용대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조민석이한테 연락 대 봐.”
“네, 네.”
최용대가 조민석에게 전화를 넣었고, 곧 엄태욱은 그와 연결될 수 있었다.
[잘 계셨소, 엄 전무?]
상당히 짧아진 조민석의 말투였지만, 엄태욱은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여유가 없었다.
“야, 내 돈 어따 팔아먹었어!”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돈 어따 빼돌렸냐고, 이 깡패 새끼야!”
[토요일 아침부터 말이 너무 험한 것 같은데?]
“너 같으면 안 험하겠냐, 이 새끼야! 내 돈 다 어쨌냐고!”
[세탁기에 넣었소.]
“뭐?”
엄태욱은 당황했다.
“아니, 세탁기에 그걸 왜 넣어?”
[세탁하는 놈이 이유를 알고 돌리겠소? 그냥 돌리라니 돌리는 거지.]
“누가 돌리라고 했는데?”
[장 실장이 그랬소.]
“뭐? 장 실장?”
엄태욱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썅!”
엄태욱은 폰을 집어 던졌다.
그리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창가로 향했다.
‘씨발…….’
장우진이 움직였다는 건, 곧 엄근식의 뜻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망할 썅년…….’
그리고 엄근식이 자신의 돈줄을 틀어막은 이유는, 분명 한소영 때문이었다.
‘인공 수정은 염병.’
엄태욱에게는 한소영과 함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한소영이 엄태욱을 혐오하는 만큼, 엄태욱도 한소영을 혐오하고 있었다.
일신그룹 한경석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이혼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런데 갑자기 인공 수정을 해서 임신을 하겠다?
‘미친년…… 돌아가봤자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게 이제야 느껴지나 보지? 썅년.’
일신그룹은 이미 한준영 부회장의 후계자 책봉이 끝난 상황이었다.
당장 내일 한경석이 죽어도, 아무 잡음 없이 한준영이 그 뒤를 이어 회장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느그 애비가 뒤지는 날, 아주 개같이 쫓겨날 거다. 썅년.’
분노는 분노였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야, 그 개새끼 언제 온다고 했지?”
엄태욱은 창밖을 바라보며 최용대에게 강철의 방문 시간을 물었다.
“이미 왔다.”
“으헉-!”
엄태욱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언제 나타난 건지, 이미 최용대의 곁에서 강철은 그와 어깨동무를 한 채 엄태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새끼는 너무한 거 아닌가?”
강철의 말에 엄태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클러치 백에서 중간 사이즈 지퍼백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위스키’ 100알이 담겨 있었다.
‘위스키’를 본 순간, 엄태욱의 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만면에 미소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돈은?”
그러나 강철의 입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엄태욱의 표정이 다시 썩어들어갔다.
“그, 그게…….”
돈 앞에서 망설임이 없던, 돈은 문제가 되지 않던 엄태욱의 혓바닥이 갑자기 길어졌다.
거기서 강철은 뭔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준비 못 했나?”
강철은 ‘위스키’를 도로 클러치 백 안에 집어넣었다.
“사람을 계속 귀찮게 굴길래 어렵게 있는 물량, 없는 물량 다 털어서 준비했는데 돈이 없다?”
“이, 있어! 내, 내가 왜 돈이 없겠어!”
“그럼 6억 어딨어? 빨리 내놔.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그게…… 도, 돈이 있는데…… 아니 씨발 있는데 잠깐 현금화가 안 된 것뿐이야. 며, 며칠만 기다리면……”
강철은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서, 발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야, 야! 야 임마! 말은 끝까지 들어!”
엄태욱은 최용대에게 강철의 앞을 막으라 하고, 그 뒤를 쫓았다.
최용대는 재빨리 현관으로 가 현관문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다, 당장에는 안 되지만 다, 다음 주 화요일까진 현금화가 가능해. 그러니까, 일단 물건부터 주고 나한테 외상 장부 하나 받아 가……”
“비켜.”
강철은 엄태욱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는 최용대를 보며 말할 뿐이었다.
“좋게, 말로 할 때.”
최용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강철의 눈빛을 그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라볼 수 없는 건 엄태욱의 눈동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최용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현관을 막고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툭-!]
강철은, 그런 최용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가볍게 그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어?! 어?!”
최용대는 순간 균형을 잃었고, 이내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최용대가 쓰러짐에 따라 현관은 텅 비게 됐고, 강철은 그 길로 유유히 펜트하우스를 빠져나갔다.
“야이 멍청한 새끼야! 버티라고 했잖아!”
엄태욱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최용대의 머리통을 발로 한 차례 걷어찼다.
그리곤 재빨리, 맨발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그러나, 그 어디에도 강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개새끼가 진짜!”
엄태욱은 곧장 폰을 꺼내 강철에게 전화했다.
[10억.]
전화를 받자마자 강철은 액수부터 이야기했다.
“뭐?”
[10억.]
“아, 아니 어떻게 2배가 뛰는 거야?”
[10억.]
“내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10억. 더 이상 타협은 없어.]
그리고 강철은 전화를 끊었다.
“이…… 이……”
엄태욱은 손을 부르르 떨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폰 화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그때, 짧은 문자 수신음이 울려 퍼졌다.
엄태욱은 곧장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강철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친구한테라도 빌려. 10억.>
“이 개새끼가!”
결국, 엄태욱은 폰을 집어 던졌다.
“이 개새끼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엄태욱은 부서진 폰을 집어 들어 벽에다 다시 집어 던졌다.
“내가 엄태욱이야! 내가 엄태욱이라고! 이 씨발 약장수 새끼야!”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