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70화 (70/175)

070 재벌의 우정 (1)

1.

8월 19일 목요일 오후 5시 30분.

강남구 삼성동 프랑스 요리 전문점 ‘드 발스’.

강철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홀을 지나고 있었다.

홀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는 모두 ‘예약석’이란 글자가 적힌 조그만 안내판이 올려져 있었다.

‘프랑스 요리라.’

강철은 요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음식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미식가처럼 이것저것 찾아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흔한 TV맛집조차도 줄 서서 기다리기 싫다고 가지 않았던 만큼, 프랑스 요리 같은 걸 따로 찾아 먹어본 일도 없었다.

‘재벌은 재벌이라는 건가?’

그렇게 강철은 가게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복도를 지나 VIP룸에 도착했다.

“어서 와.”

룸에는 이미 한소영이 도착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좀 재벌 집 사모님처럼 입으셨네.”

단정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에 강철은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니? 사람을 대하는 게?”

“우리가 서로를 너라고 부를 만큼 친해졌던가?”

“나보다 스무 살 어린 애보고 너라고 부르는 게 문제가 있나?”

“한 10년 뒤에 꼰대 소리 듣기 딱 좋겠네.”

“넌 10년 뒤에도 싸가지 없단 소리 듣기 딱 좋을 것 같은데?”

한소영과의,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나가며 강철은 관심법을 사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의 마음을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선을 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면, 강철은 결단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관심법은 강철에게 지금 현재 한소영이 품고 있는 그녀의 감정을 알려주었다.

‘재미, 기쁨, 흥미…… 자존심 상함은 뭐야?’

능력이 완전하지 않은 만큼, 아주 단편적인 감정에 관한 정보만이 강철에게 전달됐다.

‘재미있고 흥미롭고 기쁜데 자존심은 상해?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재미있고 흥미롭고 기쁘다?’

일단 강철은, 거기서 어떤 선 넘는 감정을 발견하진 못했다.

강철은 일단 관심법을 거두지 않은 채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한소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보물 창고는?”

강철의 물음에 한소영도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오늘 회장님한테 엄 전무하고 인공수정할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녀의 감정에서 기쁨과 흥미, 재미가 사라지고 씁쓸함과 착잡함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며, 일단 강철은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참 좋아하시더라고. 마흔 넘은 자기 아들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설득하겠다는데 참…… 속에도 없는 말로 기만하는 게 마음이 안 좋더라?”

한소영은 빤히 강철을 바라봤다.

“그런 상황에서, 보물 창고까지 어떻게 내가 들어가서 찍겠어?”

그녀의 말이 끝났다 판단하고, 강철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애 낳으면 선물 하나 달라고 하면서, 미리 하나 골라 놓겠다고 하고 들어가. 그럼 되잖아?”

그 순간, 강철의 관심법에 한소영의 감정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건 경악과 참담함이었다.

“넌 감정이 없니?”

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 전무랑 달리 그래도 회장님은 내게 잘해주셨어. 내가 엄 전무하고는 대화를 안 해도, 회장님한테는 그래도 한 번씩 안부 전화를 드렸다고. 그래서 이번에 집에 자주 찾아가도 문제가 없던 거고.”

한소영은 물을 쭉 들이켰다.

“그래도 이 집안에서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셔. 그런 분을 속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안 좋은지, 넌 공감도 안 되니?”

결과적으로, 자기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강철의 태도에 대한 비난이었다.

강철은 그 부분에서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때마침 VIP룸 문이 열리며 전채 요리가 나왔다.

강철은 빵 하나를 수프에 찍어 먹은 후, 한소영을 보며 말했다.

“참 너희 재벌이라는 족속들은 재미있어. 결국, 한소영 씨 당신은 엄근식을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라, 엄근식을 속이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내가 거기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지금 그러는 거잖아?”

그 순간, 한소영의 감정 상태가 놀라움과 수치심으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가만히 강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강철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봐, 한소영 씨. 애초에 내가 엄씨 부자 비자금으로 거목을 흔들어 당신을 거목 안주인에서 거목 주인으로 올려준다고 했을 때, 당신은 거기에 동조를 했어. 맞지?”

한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거겠어? 당연히 엄씨 부자를, 특히 엄근식 회장을 엿먹인다는 거잖아. 그렇지?”

강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 조소를 읽어낸 한소영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수치심과 약한 분노로 흔들리는 그녀의 감정에 흥미와 호기심이라는 것이 덧씌워졌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긴 하네.’

공존이 힘든 두 감정이 종종 공존하는 한소영의 패턴을 확인한 강철은, 빵을 마저 수프에 찍어 먹은 후 말을 마무리했다.

“그럼 쓸데없는 감정 품지 말고, 냉정하게 일을 해야 할 거 아닌가?”

강철은 자기 잔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그가 물을 쭉 들이켜자마자 레드 와인과 함께 주요리가 들어왔다.

“이거 혹시 술로 찐 요리인가?”

“네, 레드 와인으로……”

“아, 오케이. 알았어. 그것만 확인하면 됐어.”

소고기로 보이는 음식에서 올라오는 약한 와인향에 강철은 직원에게 한 차례 요리에 관한 질문을 한 후, 그를 내보냈다.

강철은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씹어먹은 후,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잔에 레드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맛있지?”

그런 강철을 바라보며 한소영이 물었다.

강철은, 순간 흠칫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내면에 가득하던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대감이 채웠기 때문이었다.

‘조울증인가?’

강철은 내색하진 않았다.

“괜찮네.”

강철의 말에 한소영은 활짝 웃었다.

그녀의 감정은 곧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정신병에 안 걸리는 게 이상한 환경이긴 한데…….’

강철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한소영의 잔을 채워주었다.

“이번 주 내로 보물 창고까지 확인해줬으면 좋겠어.”

“……”

한소영의 내면에서 뿌듯함이 사그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씁쓸함과 울적함 그리고 혐오감이 들어섰다.

“잘못하면 회장님한테, 내가 진짜로 엄 전무 애를 갖고 싶어 한다는 시그널을 줄 수가 있어.”

그녀의 말에 일단 강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지면 되는 거 아닌가?’

그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했다간 저 감정기복 심한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기에, 강철은 일단 속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적당히 잘 포장해야지. 그래도 재계 서열 17위 대기업 집단의 회장이 될 건데, 그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한데…….”

그렇게 강철은, 한소영을 설득했다.

사실 설득이라기보다는, 유도에 가까웠다.

그녀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는, 어쨌건 모두 강철에게 감지가 됐고, 강철은 거기에 따라 장단을 적당히 맞춰주며 그녀의 행동 방향을 지정했다.

“그럼, 잘 해보자고.”

그리고 후식으로 나온, 10가지 종류의 각종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소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까분다?”

한소영은 한결 밝아진 감정을 내뿜으며, 강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원래 악수는 윗사람이 먼저 제안하는 거야. 기억해 둬.”

그러면서 한소영은 강철에게 가볍게 윙크했다.

2.

목요일 밤 9시 30분.

종로구 평창동 엄근식의 저택 서재.

“요즘 뭐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 게야?”

엄근식은 다리를 꼰 채 아들 엄태욱을 바라보며 물었다.

엄태욱은 흠칫 놀라며, 엄근식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일도 없어요.”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은 거니?”

“그, 그게…… 조금 피곤해서요.”

“피곤해? 회사에도 잘 안 나가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종일 논현동이나 도곡동이나 아니면 서초동에 처박혀서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놈이 피곤해?”

엄근식은 짜증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 그…… 거기서 일 처리를 하니까요. 아, 아버지도 여기서 업무처리 다 하시잖아요. 회사가 아니라……”

“뭐야? 이 자식이 진짜!”

엄근식은 아들의 뺨을 갈기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후우…… 어릴 때부터 패면서 키웠어야 했어.’

그러나 지난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하지 못한 일을, 이제 와서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엄근식은 그런 욕구를 참고서, 엄태욱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오늘 소영이가 왔다 갔다.”

“그년이요? 왜요?”

“이 자식이…… 자기 조강지처한테 그년이 뭐야, 그년이!”

엄태욱은 고개를 숙였다.

엄근식은 한숨을 내쉬곤 마음을 가라앉힌 후 말을 이었다.

“소영이가 나한테 손주를 안겨주고 싶다는구나.”

“풋-!”

엄태욱이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터뜨리자, 엄근식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걸 느꼈다.

[빠악-!]

그대로 엄근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세게 엄태욱의 뒤통수를 때렸다.

“헉-!”

나이는 들었다지만, 일주일에 3회 이상 골프와 테니스를 치며 단련한 몸이었기에 엄근식의 손맛은 매서웠다.

엄태욱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엄근식을 올려다보았다.

“아, 아버지……”

놀라기는 엄근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엄근식은, 아들에게 처음 손찌검을 했다는 놀람에 사로잡혀 있진 않았다.

“소영이는 날 생각해서, 우리 엄씨 가문을 생각해서 인공수정을 할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데…… 그런데 너는…… 너란 새끼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 보여. 네가 그러고도 내 아들이야? 그러고도 엄씨 가문의 후예라고 할 수 있어!”

엄태욱은 고개를 숙였다.

“소영이가 그러더구나. 네가 설득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인공수정 하겠다고. 내 품에! 이 내 품에 손주를 안겨 주겠다고! 근데 너는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이 새끼야!”

엄근식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최고로 잘하는 사람으로 알아뒀어. 그러니까, 넌 당장 소영이랑 이야기해서, 날 잡고 병원으로 가. 장 실장이 안내해 줄 게다.”

엄태욱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엄근식에게 한 차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문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네가 그동안 연예인들, 모델들한테 싸지른 거 반만큼만 싸질렀어도 벌써 애가 세 명이나 있었을 거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그런 엄태욱에게 엄근식은 고함쳤다.

엄태욱은 문고리를 잡고 잠시 서 있다가, 이내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못난 놈…….”

그러나 그 못난 놈을 만든 건 결국 자신이었다.

엄근식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엄태욱의 뒤통수를 때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30년 전부터 이렇게 키웠어야 했는데…….’

한편, 서재를 나오자마자 엄태욱은 씩씩거리며 빠른 발걸음으로 엄근식의 집을 나섰다.

그리곤 차에 올라타자마자 최용대의 뒤통수를 발로 차고는 말했다.

“당장 도곡동으로 여자애들 불러. 그리고 비아그라도 준비해두라고 하고. 빨리, 이 새끼야! 꾸물거리지 말고!”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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