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얼굴 없는 여자 (2)
4.
8월 2일 월요일 오전 11시.
종로구 평창동.
유난히 담장이 높고 두꺼운, 전체적으로 회색 톤의 색채를 뿜어내는 저택.
묵직한 철제 대문이 열리고, 차가 한 대 나왔다.
무려 한 대에 8억을 호가하는, 독일 명품 럭셔리 리무진 세단 골덴바움 RS-09가 기품있는 배기음을 내뿜으며 나왔다.
“천천히 가셔도 돼요.”
우아하면서도 품위가 있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묘한 퇴폐미를 풍기는 여인, 한소영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기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승차감 속에서,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유달리 맑은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혼은 안 돼! 절대 안 돼!』
그녀는 지난밤, 아버지 한경석 일신그룹 회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시대가 변했건! 너희가 각방을 쓰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한경석은 명확하게 말했다.
『너 하나 때문에 내 명예가 실추되게 할 순 없어!』
딸의 행복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 중시하는 아버지 한경석 회장의 모습.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경석은 그렇게 자식들을 가르쳤다.
『너희들의 작은 실수가 나에겐 큰 불명예가 된단 걸 명심하고 살거라.』
그리고 그 가르침은, 자식들이 모두 장성한 2010년에도 변함이 없었다.
‘차라리 바람이 난 거면 이해라도 하지…… 차라리 동성애자였으면 불쌍히라도 여기지…….’
이미 그녀는 남편 엄태욱의 기이한 성적 취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더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빠를까, 내가 자살하는 게 빠를까?’
15년 전 끊은 담배가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를 유혹했다.
그렇게 그녀가 우울감과 흡연 욕구에 사로잡힌 채 멍하니 여름 하늘을 보는 사이, 차는 약속 장소인 남산 가야호텔에 도착했다.
가야호텔 지하주차장에서부터 직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녀가 향한 곳은 옥상 테라스였다.
“벌써 와 있었네?”
그곳에서, 그녀의 오빠이자 일신그룹 부회장인 한준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신 부회장님을 불러서 회사에 지장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지?”
한소영은 그렇게 말하며 한준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남이랑 다르게 평소에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해둔 덕에 2시간 정도는 비워도 괜찮아.”
한준영은 시작부터 처남인 엄태욱을 까면서 한소영과 악수했다.
“어제 아버지한테 깨졌다며?”
한준영의 직설적인 물음에 한소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벌써 소문났나 봐?”
“소문이 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아버지가 나한테 직접 이야기했는데.”
“그래?”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아버지한텐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라고. 그냥 기다리라고.”
한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진행됐어?”
“강 박사 말대로라면 내년쯤에는 암세포가 간 전체를 잠식할 거라고 해.”
“그 뒤론?”
“그 상태까지 진행이 되면…… 어떤 치료를 하느냐에 따라 생존기한이 달라질 뿐, 돌아가시는 건 확정이래.”
“…… 짧아도 1년…… 길면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한소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영아. 조금만 더 참자. 12년 동안 잘 참았잖아?”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오빠. 아버지가 간암으로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자살하는 게 빠를까?”
한준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자살을 왜 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제2의 인생을 살아야지.”
“그런 날이 올까?”
“아, 오지. 반드시 오지.”
한소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어. 요즘 따라 내가 아버지 관을 만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내 관을 만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거든.”
5.
“어, 왔는가?”
월요일 12시.
명동 한식당.
외부 소음이 차단된 방에서, 강철은 백두산과 만났다.
“차가 많이 막히네.”
“이 시간에 명동 차 막히는 거 뭐 하루 이틀인가? 하하. 앉게.”
백두산의 안내에 강철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양반은 아직 안 왔나?”
“어디 보자…… 한 10분 전에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곧 도착할 것 같은데?”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제3의 손님이 들어왔다.
“아이고, 이거 양반은 못 되시는구만. 어서 오시게, 최 기자.”
백두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3의 손님과 악수했다.
“아이고, 백 회장님. 이거 늦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깡마른 체형에 금테 안경을 낀 중년 남성이 백두산과 악수한 후 가만히 앉아 있던 강철을 바라봤다.
백두산은 남자에게 강철을 소개했다.
“아, 인사하게. 저번에 내가 말한 내 고객일세.”
강철은 씩 웃으며 앉은 채로 중년 남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철이오.”
“아, 네, 반갑습니다. 태극일보 최병욱입니다.”
그러면서 중년 남성, 최병욱은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다.
‘태극일보 최병욱 기자…… 정치부…….’
강철은 피식 웃으며 명함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철로부터 명함을 기다리던 최병욱은 그가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자 어색하게 웃고는 백두산의 안내를 받아 그의 옆자리, 강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정식이 테이블에 깔렸다.
“자, 한잔 씩들 들자고.”
백두산이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가운데, 강철은 최병욱에게 물었다.
“어디 최씨요?”
강철의 물음에 최병욱은 밥을 먹다 말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 경주 최씨인데, 그건 왜?”
“아…… 경주 최씨? 아니오. 나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혹시 병자 돌림이에요? 그럼 우리 문중일 확률이 높은데?”
“다음에 기회 되면 소개해드리지요. 변호사니까, 뭐 알아두면 좋잖아요?”
“좋지요.”
식사 내도록, 세 사람 사이에선 그런 가벼운 대화만이 오갔다.
가끔 강철이 끼어들어서 한두 마디 거드는 걸 제외하면, 대체로 대화는 백두산과 최병욱 사이에서 오갔다.
“아으, 잘 먹었습니다, 백 회장님.”
“허허. 여기 백미는 후식이야. 아직 후식 들어갈 배는 남겨 뒀겠지?”
“아이고, 당연히 남겨뒀지요. 허허허.”
그리고 후식을 기다리는 사이, 강철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응?”
강철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서 자신을 향해 내밀자 최병욱은 흠칫했다.
‘뭐야?’
최병욱은 강철을 바라봤다.
강철은 ‘네 거야.’라는 듯, 턱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이게 뭡니까? 허허허. 어디 뭐 청첩장이라도 돌리는 거예요?”
최병욱은 슬쩍 봉투를 들었다.
굉장히 얇았기 때문에, 그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뭐, 뭐야 이거?’
그러나 최병욱은 곧 봉투가 얇다고 해서 내용물까지 가벼운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500?’
봉투 안에는 100만 원짜리 수표 5장이 들어 있었다.
최병욱은 강철을 바라봤다.
“백 회장님한테 최 기자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수다. 아 나라의 어두운 부분을 취재해 음지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최병욱은 백두산을 바라봤다.
백두산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하하. 이거…… 과찬입니다. 그냥 뭐……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죠.”
그러면서 최병욱은 봉투를 챙겨 넣었다.
“내가 요즘 거목그룹 주식을 사려고 하는데 대충 찾아보니까, 오너 리스크가 좀 있다고 합디다.”
강철의 말 한마디에, 최병욱은 그가 뭘 원하는지를 단박에 간파했다.
“허허허…… 이거 한국 기업 오너 리스크가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잖습니까? 허허허.”
“거목그룹은 특히 좀 그게 심한 모양이던데 말이오?”
“그렇습니까? 허허허. 이거, 제가 경제부가 아니라 잘 모르는……”
그 순간, 강철은 품에서 봉투를 하나 더 꺼내 최병욱에게 건넸다.
최병욱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봉투를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역시나 100만 원짜리 수표 5장이 들어 있었다.
최병욱은 그걸 품에 집어넣고, 안경을 고쳐 쓴 후 강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흠…… 뭐, 제가 한때 경제부에서 일하면서 거목그룹 취재한 적이 있긴 합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6.
“…… 다 꺼져.”
월요일 밤 11시.
논현동 빌라 포럼 8층 안방에서 엄태욱은 의자에 앉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조금 전까지 침대에서 서로 물고 빨고 뒹굴던 2명의 여자와 3명의 개 분장을 한 남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안방 문을 열고 나가면서 엄태욱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엄태욱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그저 허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왜 아무런 감흥도 없지?’
어제, 개 분장한 남자 3명과 거목건설 전속모델이 스트립 섹스 쇼를 펼쳤을 때도, 엄태욱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 그들이 성적으로 행동한다는 걸 인지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흥분되거나 하진 않았다.
처음에는,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돼서 그랬던 거라고 엄태욱은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그는 이례적으로 평일에 강남 텐프로와 호빠에서 제일 외모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선별해 전문 분장가를 동원해가며 동물처럼 분장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침대와 바닥 심지어 책상에서까지 진짜 짐승이 교미하듯 행위를 가지며 엄태욱을 만족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엄태욱은 만족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질 못했다.
대신 엄태욱은, 지난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 사이,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세계를 다시 떠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가 바라던 모든 게 존재하던 곳.
색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소리의 맛을 볼 수 있던 곳.
마치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던 곳.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추상적인 이미지만 떠오를 뿐, 그때의 구체적인 느낌은 마치 구름을 잡는 것처럼 제대로 떠올릴 수 없는 곳.
그곳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그렇게 그는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텐프로와 호빠에서 출장 온 남녀를 추방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설마…… 그때 그 개새끼가 먹인 술에…… 약이라도 들어있던 거야?’
엄태욱은 강철이 자신에게 억지로 먹였던, 중화되지 않은 양주를 떠올렸다.
단순한 술이 아닌, 분명 뭔가가 있었다.
“야! 술 좀 가져와 봐!”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서, 엄태욱은 바깥에 있는 최용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최용대는 술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심지어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다.
“야이 새끼야! 안 들려?!”
이번에도 최용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개새끼가 진짜! 귓구멍에다가 좆 박아놨어!”
결국, 엄태욱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이 개새끼야! 내 말이 개좆으로 들……”
방문을 나서는 순간, 엄태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거실 소파를 바라봤다.
최용대는 기절한 건지 아니면 잠든 건지, 눈을 감은 채 소파에 앉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강철이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잠자는 사람 깨겠네. 좀 조용히 하는 게 어때?”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