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주주총회
1.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강철은 김명길과 서용태, 최병천에게 경호원을 붙였다.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가 당신들을 납치라도 하면, 지체 말고 내 이름을 대고, 날 불러. 그래야 일이 더 쉬워지니까.”
그리고 세 사람에게, 그런 지침을 하달했다.
“당신들은 앞으로 나를 위해 대산에서 일해줘야 할 사람들이야.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생긴다면, 바로바로 해결해서 당신들을 무사하게 복귀시키는 게 내가 할 일이야.”
덕분에 김명길과 서용태, 최병천은 팔자에도 없던 보디가드의 에스코트를 받게 됐다.
물론 그 인력과 비용은 모두 대산에서 부담했다.
거기에 대해, 조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명길은 이해가 됐지만, 서용태와 최병천은 공식적으로 대산 소속이 아니었기에, 대산 회장 권한대행으로서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강철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 대답에, 조민석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벌써 내일이군.”
7월 20일 화요일 밤 9시.
조민석의 펜트하우스에서 강철은 그와 양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내일 있을 주주총회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강 고문 덕분이오. 고맙소.”
조민석은 살짝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에서, 강철에게 그렇게 말하며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강철은 그런 조민석을 향해 씩 웃어 보이곤 화답했다.
“뭘, 당연한 소리를.”
그러면서 강철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못 듣는 척하며 듣고 있는 유아영을 바라봤다.
조민석도 강철의 시선을 따라 유아영을 봤다.
“아영아. 잠시 들어가 있으면 안 될까?”
조민석의 말에 유아영은 TV를 끄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슬쩍 강철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뭐,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라도 있는 모양이오?”
조민석의 물음에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편지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조민석에게 건넸다.
“이게 뭐요?”
“열어 봐.”
조민석은 편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펼쳤다.
‘대산그룹 경영 효율성 재고 및 책임 경영 강화를 위한 정관 개정안?’
다섯 장의 A4용지에는 양면 가득 빼곡하게 문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민석은 그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살짝 얼굴이 창백해진 채 강철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엇이오?”
“뭐기는 내일 주총에서 통과될 정관 개정안이지.”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걸 통과시키겠다는 거요?”
“거기 나와 있지 않나? 경영 효율성 재고, 책임 경영 강화 뭐 기타 등등.”
“…… 설마……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거요?”
예상한 대로 조민석이 반응하자 강철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부, 분명히 말했잖소. 내가 대산 회장이 되고, 그대가 고문이 된다고. 근데 이대로라면……”
“거기에 당신의 회장직을 허용하지 않는단 표현이 있나?”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잖아. 강대산의 유물을 버리고, 조민석의 신경영시대를 열어간다고 생각해.”
말은 그럴듯했다.
경영 효율성 재고, 책임 경영, 신경영.
그러나 정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일 조민석이 앉게 될 대산그룹 회장 자리는, 지금 조민석이 앉아 있는 대산그룹 회장 권한대행 자리보다 더 권한이 없어지게 된다.
“…… 이건 나보고…… 그냥 바지가 되라는 거랑 다를 바가 없잖소?”
“바지라니 이 사람아. 너무 그렇게 자기를 비하하지 마. 그냥, 굉장히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경영하는 경영자가 되는 거야.”
강철은 씩 웃었다.
조민석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는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조민석은 다시 한번 더 정관을 살폈다.
“…… 설마…… 임원도 다 구성해놓은 거요?”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 거기에 나는 들어가 있소?”
“내가 말했잖아. 당신을 회장에 올리는 게 내 목표라고.”
“……”
조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그는, 빈 잔을 들어 거기에 양주를 들이부었다.
토닉 워터로 중화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40%짜리 술을 쭉 들이켠 조민석은, 그 강렬한 향과 타오를 것 같은 목 넘김에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넘어가야 한다.’
문득 조민석은 강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고?’
이때까진, 강철이 사람을 너무 안 믿는다며, 부정해왔던 명제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조민석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사람을 잘 믿었네.’
강철이 지방 주주들의 지분을 상해탄 천호본점으로 흡수할 때에도, 그 과정에서 대산그룹과 지방 주주 사이를 완전히 박살 내 놨을 때에도, 조민석은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국 헛된 것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내가 가만히 당할 것 같아?’
조민석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강대산 회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다들 좋아하겠지.”
일단, 그는 강철의 페이스를 따라가 주기로 했다.
‘자, 이제 당신이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뭘까?’
그리고 그런 조민석을 바라보며 강철은 그가 꺼내 들 카드를 예측해보았다.
‘검찰? 아니면 거목그룹?’
뭐가 됐든, 빨리 꺼내길 바라며, 그렇게 강철은 양주를 들이켰다.
2.
7월 21일 수요일 오후 5시.
대산그룹 주주총회가 송파구 본사 건물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주주총회라곤 하지만, 지방 주주들이 모두 사라진 시점인 데다 주요 주주인 강대산과 도구삼이 불참해버린 관계로, 대회의실 내부는 한산했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사람은 조민석과 그를 따르는 조폭 출신 이사 둘, 박경채를 따랐던 민간 출신 이사 둘 그리고 상해탄 천호본점 대표 김명길과 그의 법률대리인 자격으로 온 최병천 변호사가 전부였다.
“먼저 현황보고부터 하겠습니다.”
사회는 조민석이 맡았다.
현황 보고가 끝난 후, 곧장 김명길이 손을 들고 새로운 정관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최병천이 새 정관 초안을 배부했다.
“이, 새로운 정관은 그…… 우리 대산의 경영 효율성을 재고하고, 책임 경영을 강화해가지고 좀 더 선진적인 기업 문화를……”
김명길이 더듬거리면서 준비한 대사를 읊을 때, 모든 주주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지금 이곳에서, 사실상 독재에 가까운 수준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그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이 새로운 정관에 대해 논의를 하고, 그대로 통과시켜서 이 정관에 기반해 이사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상입니다.”
논의는 없었다.
조민석을 비롯한 주주들이 모두 찬성했고, 그대로 정관은 통과됐다.
그리고 통과된 정관을 기반으로, 두 명의 사내이사와 한 명의 사외이사 그리고 한 명의 감사가 선출됐다.
<대산그룹 임시 주주총회 결과>
대표이사 : 조민석
사내이사 : 조민석, 김명길
사외이사 : 서용태
감사 : 최병천
주총은 30분 만에 끝났고, 그 결과는 곧장 대산그룹 사내 인트라넷과 본사 로비 게시판에 공고됐다.
“뭐야? 왜 이렇게 이사가 적어?”
“사외이사는 또 언제 생겼데?”
“뭐야? 전부 등기이사야?”
“웬일이래?”
직원들은 비등기이사 하나 없는 새로운 임원진 명단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래봐야 조민석 상무가 대표가 된 거면, 변함없는 거 아니야?”
어차피 외양만 그럴듯하게 바뀌었을 뿐, 본질적은 그대로라며 비관하는 사람도 있었다.
“책임 경영 강화라더니 진짜네?”
반대로 전원 등기임원이라는 점과 계열사의 경영 자율성이 강화됐다는 점을 들어 무언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긍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뭐가 됐건, 문신한 놈들이 좀 안 설쳤으면 좋겠어.”
그렇게, 주주총회 결과는 대산그룹 일반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파문을 일으켰다.
“어쨌건 변화는 일어나겠지.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3.
“하하하. 축하해, 김 이사. 그리고 서 이사하고 최 감사도.”
7월 23일 금요일 저녁 6시.
청담동 일식집 VIP룸에서 강철과 김명길, 서용태 그리고 최병천이 원탁에 둘러앉아 건배하고 있었다.
“마, 이게 전부 강 고문님 덕분 아입니까? 마, 뼈를 갈아뿐다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겠십니다!”
“새끼야, 분골쇄신이라고 짧게 말하면 되지 뭔 말이 그렇게 기냐?”
“어이, 서 이사. 똑똑해서 좋겠네?”
“똑똑하기로는 여기 최 감사님이 최고 아니냐? 안 그래요?”
“아, 뭐.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오늘만큼은 강철도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분위기를 깨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외이사면 그 회사에 매일 출근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아, 네. 말 그대로 사외이사니까 말입니다. 저나 김 이사님은 상근이라서 매일 출근해야 하지만.”
“근데 궁금한 게, 그 최 감사님 말대로면 마 우리 대산 자산총액이 2조가 넘어가뿌면 최 감사님은 그대로 해임되는 거 아입니까?”
“뭐, 그때 가면 알아서 이사나 다른 직책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최병천은 강철을 바라봤다.
강철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줘야지.”
강철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 돌대가리야. 대산 자산총액이 2조가 될라면 1년에 1천억씩 늘어도 5년이 걸릴 건데, 당장 1년 뒤 일도 모르는데 뭔 5년 뒤 일까지 걱정하고 있냐?”
“마, 언제까지 단기적인 이익만 볼기고? 장기적으로 성장 추세를 또 봐야하는 거 아이겠나?”
“어쭈? 새끼 어디서 경제 뉴스라도 봤냐? 대가리에 쥐 안 내리든?”
자신들이 대산의 중역이 됐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지, 아니면 그걸 실감해서 저렇게 들떠 있는 건지, 김명길과 서용태는 그렇게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 지금 즐겨둬야지.’
그리고 두 사람이 살짝 취해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강철은 점잖게 넥타이를 맨 채 품위를 유지하는 최병천에게 당부했다.
“이사회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최 감사가 유일한 인텔리에요. 그러니까, 혹시나 덜떨어진 짓을 하려고 한다거나 하면,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주세요.”
그 말에 최병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그게 제 전공 아니겠습니까?”
강철은 최병천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곧 최병천이 강철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그 내용물이 동시에 각자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넘어갔다.
[지이이잉-!]
그리고 그 순간, 강철의 폰이 진동했다.
‘유아영?’
유아영으로부터의 문자 메시지였다.
강철은 가만히 그것을 확인했다.
<오빠랑 거목그룹 엄태욱 전무 만나러 가는 중 나중에 끝나고 전화함>
거목그룹 엄태욱 전무.
그 3단어의 조합을 본 순간, 강철의 입꼬리와 광대가 그대로 승천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