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잔당 (1)
1.
백유진의 죽음으로, 강철은 보다 많은 정보를 습득하게 됐다.
그녀의 스마트폰에는 보안이 걸려 있긴 했지만, 삼우전자의 옴니버스였기에 서용태가 쉽게 해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챙긴 노트북은 아예 보안조차 없어서, 서용태의 손에 맡길 필요도 없었다.
‘한동수 총경이라.’
6월 28일 월요일 오후 3시.
강철은 길동 오피스텔에서 테이블 위에다가 백유진의 노트북과 스마트폰 그리고 예전에 서용태로부터 받았던 경찰 정보국 인사기록부 파일을 펼쳐놓고 머릿속으로 그 연관성을 맞춰보고 있었다.
‘백유진의 자료에 따르면 이 모든 작전은 결국 한동수라는 사람 개인이 비밀리에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진행했다는 건데…….’
백유진을 처치함에 따라 조민석 주변의 경찰 빨대는 완전히 제거됐다.
여기서 멈출 수도 있었지만, 강철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백유진의 자료에 따르면 선병호의 프락치는 이미 윗선과 접촉을 한 상태야. 그걸 선병호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고.’
별안간 강철의 입가에 냉소가 서렸다.
‘구구절절하게 사랑을 고백하더니, 정작 선병호한테는 비밀을 만들어 뒀다라…… 공사 구분이 확실하셨구만.’
일단 강철은 움직이기로 했다.
‘의심 대상부터 찾아야지.’
강철은 펼쳐놓은 자료를 모두 정리했다.
그리곤 거울에 붙여둔, 이사회 내 반조민석 계열 인사들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경찰이라면 누구에게 접근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박경채.’
박경채와 김태영을 제외하면, 다른 이사들은 전무나 상무라는 직함이 아닌, 관리이사, 영업이사 따위의 직함을 들고 있는, 서열이 다소 뒤처지는 사람들이었다.
‘조민석보단 덜하지만, 박경채 라인도 어쨌건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내가 경찰이라면 박경채에게 접근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박경채라면 경찰과 손을 잡았을까?
이번에도 답은 쉽게 나왔다.
‘안 잡을 이유는 없지.’
김태영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숙청할 때 썼던 논리.
사실 그 논리에 증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억지스럽지도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는 강대산과 조민석이 날아가고 그 자리를 박경채가 채우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일 테니까.’
그리고 박경채 입장에서는 조민석을, 더 나아가 강대산을 치기 위해선 확실한 보증인이 필요했다.
‘박경채 쪽을 집중적으로 조사해봐야겠어.’
강철은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박경채의 폰 번호를 입력했다.
곧, 박경채의 위치가 떴다.
‘응?’
문제는, 그곳이 대산그룹 본사가 있는 송파구가 아닌, 경찰청이 있는 서대문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걸려준다고?’
함정일 가능성은 없다.
전무하다.
함정일 수가 없다.
박경채는 아직 강철의 존재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고맙구만.’
강철은 곧장 오피스텔을 떠나 서대문구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2.
월요일 오후 4시.
서대문구 경찰청 인근 카페.
“후우.”
박경채는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각설탕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리다 씹어 먹었다.
쓴 커피 맛 뒤에 달달한 설탕 맛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냈지만, 그러나 박경채의 마음은 전혀 진정되거나 그 맛을 음미하며 즐거워하질 못했다.
‘이 인간이…….’
박경채는 손목시계를 보고 4시 정각이 지났음을 확인하곤 이를 갈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각설탕 봉지를 까서 집어 던지곤 설탕을 어금니로 깨물어 먹었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고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박경채는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년 남자, 한동수 총경은 박경채를 보고는 앉으라 손짓한 후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운터로 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곤 진동벨을 들고서 박경채의 바로 뒷자리에 그와 등지고 앉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박경채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자리에 서서 한동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동수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박경채에게 말했다.
“사방에다가 우리 둘의 관계를 광고할 일 있나? 자리에 앉아서 나하고 등진 채 말하라고. 아무런 사이도 아닌 척.”
“이 판국에 007놀이라도 하자는 거요?”
“앉아.”
결국, 박경채는 자리에 앉았다.
곧 한동수의 커피가 나왔고, 한동수는 직접 그것을 챙겨 들고서 자리로 복귀했다.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우리 손절하려는 거지요?”
박경채의 말에 한동수는 커피잔을 든 채 답했다.
“손절이라니. 단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조심스럽게 행동하자는 거지.”
“조심스럽게? 언제까지 조심스럽게 행동할 거요? 조민석이가 회장 되고, 내가 백수 되면? 아니면, 내가 백수가 된 다음에 시체가 되면? 그때 가서 행동할 거요?”
“말을 삼가.”
“삼가기는 개뿔. 내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나 알아요?”
“이렇게 경솔하게 무작정 경찰청까지 쳐들어올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란 건 확실하겠지.”
한동수의 냉랭한 태도에 박경채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켠 후 고개를 돌려 한동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방에 주주들이 전부 주식을 털렸답디다. 웬 젊은 놈한테.”
한동수는 흠칫했다.
“전부?”
“35% 전부.”
“누구한테?”
“웬 젊은 놈이랍디다. 보나 마나 조민석이가 보낸 놈이겠지. 그보다도, 그 주식이 전부 어디로 간 건지 알아요?”
“어디로 갔는데? 조민석이 개인한테?”
“하! 그랬으면 말이나 안 하지. 상해탄 천호본점으로 갔습디다.”
“상…… 뭐?”
박경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한동수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한동수는 목소리를 낮춘 채 박경채를 나무랐다.
“상해탄 천호본점 대주주가 누군지 아쇼?”
“빨리 자리로 돌아가!”
“대산식품이요, 대산식품. 그럼, 대산식품은 사장이 누군지 아쇼? 조민석이의 충실한 딸랑이이자 예전에 조민석이 대신 빵에 들어가서 1년 살고 나온 이대식이라는 놈이요.”
“……”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대산이 사실상 조민석이한테 완전히 넘어갔다는 거요. 어? 당신이, 당신네 대단한 공무원 나리들이 뒷짐 지고 있는 사이에 모든 게 그 깡패새끼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말이요.”
박경채의 목소리가 꽤나 컸기에, 한동수는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손님들이 많지 않았기에, 별다른 주목은 없었다.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한동수의 말에 박경채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민간인 사찰 문제 때문에 시끄러운 거 알고 있지?”
“정치인들이 지랄한 거, 알빠요?”
“…… 그것 때문에 지금 국장님이 모든 작전을 스톱시켰어.”
“도둑놈 제 발 저린다더니…….”
“거, 비아냥 좀 진짜! 후우…… 아무튼 그것 때문에, 당분간 움직이기가 힘들어. 하지만 가을 정도 되면 좀 괜찮아질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고 있어.”
“그때까지 조민석이가 날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 오늘부터 조민석이 똥구멍도 좀 빨아주고, 간지러운 곳 긁어도 주고 하라고. 너도 지분 있잖아.”
“조민석이보다 못한 지분? 하!”
박경채가 듣고 싶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조민석이를 보내버리기만 하면 돼요. 지금 조민석이 파벌은 조민석 개인에게 모든 게 집중돼 있어요. 그러니까 조민석이만 어떻게 해 주면……”
“야…… 박경채.”
“……”
“그건 너네 파벌도 똑같잖아. 누가 누구한테 지적하는 거야?”
“지적이 아니라……”
“길게 이야기 안 한다. 기다려. 기다리다 보면, 우리 쪽에서 연락이 갈 거야.”
한동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까지 잘 참았잖아. 작전이 꼬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조금만 더 참아 봐.”
그리고 한동수는 카페를 떠났다.
박경채는 떠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씨발…….”
그저 욕지기나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여 테이블에 이마를 갖다 박을 뿐이었다.
‘손절했다면서 경찰청까지 찾아오니까 또 보기는 본다 이거지?’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강철은 박경채와 한동수가 앉았던 자리에서 사선으로 반대 방향 자리에 앉아 지켜보았다.
‘한동수가 완전히 손절을 한 걸까? 아니면, 크게 깽판쳐서 비밀 작전이 까발려지는 걸 막으려고 저런 걸까?’
뭐가 됐건, 한동수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이제 남지 않을 것이다.
‘선병호와 백유진, 두 경위에게 의존한 사적인 작전이었어. 이제 그 둘이 사라지고, 마지막 프락치인 박경채까지 사라지면, 한동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겠지.’
물론, 하려면 또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프락치를 심고, 첩보망을 구축하는 식으로.
그러나 그렇게 해서 다시 작전을 실행하려면 족히 3~4년은 걸릴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그냥 안 하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강철은 박경채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박경채는 카페를 떠났고, 강철도 그 뒤를 따라 카페를 나갔다.
3.
“아으으……!”
월요일 오후 5시 50분.
송파구 대산그룹 본사 회장실에서 조민석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퀭한 눈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조민석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내선으로 비서에게 커피를 가져오라 시킨 후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요즘?’
지난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유아영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조민석의 몸을 탐했다.
평소, 조민석이 그녀의 몸을 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처음에는 조민석도 즐겼지만 유아영이 4번째 사랑을 원할 때부터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5번째를 원했을 때, 조민석은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조민석은 죽지 않았고, 어찌어찌 5번째 사랑을 끝냈을 때, 이미 아침이 돼 있었다.
유아영은 그대로 침대에 뻗어 잠들었고, 조민석은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로 출근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꾸벅꾸벅 졸아가며, 이 시간까지 버텼다.
‘오늘도 설마?’
조민석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떨림에 맞춰서, 그의 폰도 진동했다.
‘응?’
이미지가 첨부된 문자였다.
발신자는 강철이었다.
‘뭐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휘감았다.
조민석은 조심스럽게 첨부 파일을 열람했다.
“으헉-!”
그리고 그는 잠이 확 달아나는 걸 느꼈다.
“이런 미친!”
똑같은 구도였다.
피를 흘리는 모습부터, 의자에 묶여있는 것까지.
김태영과 똑같은 구도였다.
단지 사람만 다를 뿐이었다.
‘박경채를? 아, 아니 도대체 왜?’
강철이 보낸 사진 속, 의자에 묶인 채 피를 흘리는 남자는 박경채였다.
[위이이이잉-!]
곧, 강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민석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조 대행.]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박 전무는 왜?”
[왜긴 왜야. 프락치 잔당 잡아 족쳐야 할 거 아니야.]
“프, 프락치 잔당?”
[됐고, 별일 없으면 지금 길동으로 와. 어딘진 알지?]
그리고 강철은 전화를 끊었다.
‘젠장…….’
피곤했지만, 그 피로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당혹스러움과 공포 그리고 궁금증이 조민석을 길동으로 이끌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