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 회귀-36화 (36/175)

036 강서구 백두산 (3)

6.

6월 16일 수요일 오전 11시.

“어흐, 개운하다.”

백두산은 목욕탕에서 나오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쭉 켰다.

목욕탕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수행비서 김명수가 그를 차량으로 에스코트했다.

“대출 희망자 신상 자료입니다.”

차에 올라타고서 김명수는 백두산에게 서류봉투를 건넸다.

백두산은 서류봉투를 열었다.

곧,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거 확실한 거야? 그 종로에 있다는 놈이 장난질하는 게 아니고?”

김명수는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제가 세무서 쪽 인맥까지 동원해서 사업자등록증이랑 다 대조해 봤습니다.”

“아니…… 대산그룹 계열사에서 왜 나한테 돈을 빌려달래?”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아니, 파악이고 나발이고, 어? 명수야, 생각을 좀 해 보자. 응? 아니, 그냥 본사에다가 돈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겨우 10억인데? 그걸 구태여 나한테 빌린다고?”

백두산은 다시 시선을 문건으로 돌렸다.

주식회사 상해탄 천호본점 대표 김명길.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강대산이는 사실상 조민석이한테 숙청당했다고 보면 돼. 그럼 뭐지? 조민석이 반대파가 뭘 꾸미는 건가? 그게 돼?’

백두산은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건 없었다.

“여기는 누구 라인이냐?”

백두산의 물음에 김명수는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라면 선병호라고 조민석 밑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대표였습니다. 근데 한 열흘 전인가, 김명길이라는 사람으로 대표가 교체됐습니다.”

“열흘 전?”

“네.”

“아무튼, 그래서 교체된 놈, 지금 나한테 10억 빌려달라고 하는 이놈이 누구 라인이라고?”

“알아보는 중입니다.”

백두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이 정확하게 뭐 하는 놈인지 알아내기 전까진, 대출 절대 불가야.”

백두산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국이 안 좋아. 이거 까딱 잘못 엮이면 나까지 엮이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같은 시각,

강동구 천호동 상해탄 천호본점.

강철은 김명길과 함께 대표실에서 볶음밥과 탕수육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저기…… 고문님.”

볶음밥을 절반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김명길은 살짝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로 입을 행군 후 강철에게 물었다.

“그…… 10억 정도면…… 우예 조 대행한테 말해가꼬 본사에서 받아내면 되는 거 아입니까?”

그 물음에 강철은 탕수육을 씹으며 김명길을 바라봤다.

김명길의 질문은 이어졌다.

“뭐 한 100억이면 몰라도, 10억 정도면 뭐 몬 해 줄 것도 없다 아입니까?”

그 질문의 근저에 깔린 불안을 읽은 강철은 씩 웃으며 반쯤 씹은 탕수육을 마저 씹어 삼키곤 물로 입을 행구고 대답했다.

“조민석은 지금 검찰하고 쇼부보는 것에 집중해야 해. 근데, 이 상황에서 쓸데없이 본사가 자금을 지출하게 해서, 검찰한테 책잡힐 필요는 없잖아?”

“그, 그건 그렇긴 한데…….”

“거기다 박경채 라인도 지금 어떻게든 뭘 해보려고 할 건데, 괜히 조민석이가 그쪽에 책잡힐 꼬투리가 생기면 곤란해지겠지? 그러니 우리 선에서 해결하자는 거야. 10억 정도는.”

“그, 근데 그래 치면 우리가 돈 빌리는 것도 쫌 뭐한 거 아입니까?”

“대산 본사에서 10억 지출하는 것과 대산그룹 전체에서 비중이 1%도 안 되는 음식점이 사채로 10억 당기는 건 주목도가 달라. 검찰이건 박경채건 여기까지 신경 쓰지는 않을 거야. 적어도 검찰은 확실히 그렇게 하겠지. 조민석이가 쇼부만 잘 본다면 말이야.”

김명길은 그럼에도 뭔가가 불안한지 안절부절못했다.

“백두산이한테 빌리는 게 불안한 건가?”

강철은 그런 김명길의 정곡을 찔렀다.

김명길은 흠칫 놀라며 강철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가 딱히 화가 나거나 한 것 같지 않은 걸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그냥 마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백 회장이면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고문님.”

“백두산이 그렇게 두렵나?”

“그…… 우리끼리 하던 이야기로 서울에는 두 산이 있다고 했십니다. 강동에 강대산, 강서에 백두산.”

강철은 미소를 지었다.

“강동에 있는 산 하나 무너뜨렸으니, 강서에 있는 산도 마저 무너뜨려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강철의 말에 김명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 행님?”

강대산 숙청 이후 겨우 입에 붙인 고문님이라는 호칭마저도 잊은 채 김명길은 상당한 당혹감 속에서 강철에게 말했다.

“배, 백 회장까지 손보실라면 저, 전면전 밖엔 없십니다. 아, 아이면 혹시 뭐 따로 사람 하나 박아 둔 거라도 있십니까?”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라믄…… 전면전 하실깁니까?”

이번에도 강철은 고개를 저었다.

“전략 거점만 확보하면 끝날 싸움을, 뭐 구태여 전면전까지 갈 필요가 있나?”

김명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그래, 고마 그 천하에 강 회장도 담가삔게 행임인데…….’

그저 그런 맹목적 신앙 하나로 자신의 불안을 억누를 뿐이었다.

7.

“어, 무슨 일이야?”

[오빠 바빠?]

“5분 정도 시간 있어. 왜?”

수요일 오전 11시 55분.

차를 타고 광진구 동부지검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조민석은 유아영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니 그…… 다른 게 아니구…… 오늘 아는 언니 생일이라서 그런데…… 밖에서 하루 자고 와두 돼?]

“서울 안이야?”

[응. 안 멀어. 강남이야.]

“그래, 자고 와. 뭐, 선물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돈은 있고?”

[진짜? 진짜지? 알아썽. 고마워 오빠. 돈은 괜찮아. 충분해.]

“그래. 술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내일 보자. 그래.”

통화를 끝내고 조민석은 폰을 바라보며 한 차례 피식 웃은 후,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조수석에서 가만히 통화를 듣고 있던 박용수가 조심스럽게 조민석에게 말했다.

“저기…… 회장님.”

“응? 왜?”

“이런 말씀 드리긴 좀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뭐가 좀 이상해서…….”

“뭐가?”

“원래 그…… 아가씨가 집에서 잘 안 나가시지 않았잖습니까?”

“근데?”

“그런데 최근에 뭐 강릉을 가니 또 외박하니 하는 게……”

조민석은 정색했다.

“어이, 박용수.”

박용수는 심장이 식는 것을 느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뭐가 죄송한데?”

“그, 그게…….”

박용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곁에서 가만히 운전하던 기사도 바짝 긴장했다.

“선 넘는 소리 하지 마. 넌 내 공적인 일에나 신경 써. 사적인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시는 그런 소리 안……”

“그만. 거기까지.”

박용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조민석은 불편함 심기를 감추진 않은 채, 그러나 따로 그것을 가지고 더 박용수를 갈구지도 않은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아영이가 바람이 났으면, 바로 티가 났겠지. 겨우 스물둘인데.’

같은 시각,

청담동 카페 2층 창가 자리에서, 유아영은 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맞은 편에 앉은 백유진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가 허락했어.”

그녀의 말에 백유진도 마주 웃어 보였다.

“강릉은 안 가도 괜찮겠어?”

“이제 와서 강릉까지 갈 필요가 있어? 난 그냥 언니하고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싶을 뿐이야. 손 꼭 잡고서.”

“그래. 옛날엔 자주 그랬는데.”

그러나 백유진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그러면…… 이제 말해주는 거지? 조민석이랑 손잡았다는 그 사이코에 대해서. 알아낸 게 있다며?”

그녀의 물음에 유아영의 얼굴에 가득 피어났던 미소가, 살짝 시들었다.

마치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은 채 유아영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응?”

“나 요즘 불안하다?”

백유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설마…… 조민석이 눈치챈 것 같아?”

유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요즘…… 언니랑 같이 있어도…… 마치 나 혼자 있는 것 같단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백유진은 한편으론 안도했다.

‘다행이다.’

조민석이 유아영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있을까?

그가 사실상 대산의 지배자가 된 지금, 유아영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공적인 것과는 무관한 유아영의 지극히 사적인 불안감에 일단 백유진은 안도하면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하고자 굳게 다짐하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유아영의 곁에 가 앉았다.

그리곤 유아영을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미안해. 언니가 요즘 많이 바빠서, 너한테 소홀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그녀는 유아영의 귓가에다가 대고 속삭였다.

“오늘 밤에는 절대 외롭지 않게 해 줄게.”

그 말에 유아영의 표정은 편안해졌다.

8.

6월 16일 수요일 밤 11시.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백두산은 러시아 여자 마사지사 나탈리아의 손에 허벅지를 맡긴 채 김명수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어, 아니야.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상해탄 천호본점 대표 김명길에 대해 알아봤는데…… 그…… 아무래도 빨리 회장님께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래, 누구 라인인데?”

[조민석 라인입니다.]

“뭐?”

백두산은, 점차 불끈거리던 하복부에서 힘이 쫙 빠지는 걸 느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나탈리아가 움찔하며 손을 멈췄고, 백두산은 일단 계속하라 손짓한 후 통화를 이었다.

“아니, 조민석이 라인인데 왜 나한테 돈을 빌리려는 거야?”

[그게…… 아무래도 김명길은 그냥 얼굴마담인 것 같고, 실제로는 조민석이 회장님께 돈을 빌리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민석이? 나한테? 왜?”

[거, 거기까지는…….]

“명수야.”

[네, 네, 회장님.]

“조민석이가 나한테 돈 빌리려는 것 같다, 이건 그냥 네 추론이지?”

[그, 그렇습니다.]

“그러면 새끼야, 추론할 거면 근거를 갖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자. 응?”

[네, 네. 죄송합니다.]

김명수를 야단치던 것도 잠시, 백두산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차분해진 목소리로 김명수에게 지시했다.

“너, 그 김명길이란 놈하고 약속 좀 잡아 놔라. 점심이건 저녁이건. 밥이나 먹으면서 한 번 내가 직접 떠봐야겠다.”

[회, 회장님이 직접 말씀이십니까?]

“내가 직접 나서 줘야지 저쪽에서도 진짜 패를 드러내지 않겠냐? 선배에 대한 예우가 있다면?”

[아,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백두산은 다시 누웠다.

나탈리아의 부드러운 손길에 다시 하복부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백두산은 은근슬쩍 나탈리아의 손목을 잡아 그 손을 하복부 쪽으로 올렸다.

‘조민석이…… 설마 나한테 폭탄 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응? 에이, 뭐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일단,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강철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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