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음모 (4)
7.
6월 9일 수요일 오전 9시 30분.
청담동 카페 2층 창가에서 유아영은 백유진을 기다리며 에티오피아산 원두를 갈아 만든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게 맞나?’
유아영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창밖, 청담동 일대의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에 한 번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쯤,
[스윽]
부드러운 팔이 뱀처럼 그녀의 목을 감쌌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이네.”
유아영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백유진을 올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유진은 그런 유아영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후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거 알아?”
유아영은 백유진에게 말했다.
“언니가 이렇게 먼저 안아주고, 뽀뽀해준 게 1년 만인 거?”
그 말에 백유진은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유아영의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해. 그간 내가 너무 소홀했지?”
유아영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뺐다.
그리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뭐 어려운 거 부탁하려는 거지?”
유아영의 말에 백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니. 나 뭐 하나만 물어볼게.”
유아영은 백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 사랑해?”
백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랑하지.”
“진짜?”
“진짜.”
“…… 증명해줄 수 있어?”
백유진은 말없이 가만히 유아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유아영은 눈을 감은 채 오랜만에 느끼는 그 따스함을 즐겼다.
잠시 후, 백유진은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의 침이 서로의 입술을 허공에서 이어주다가 이내 뚝 끊어졌다.
“사랑하는 거 맞네.”
유아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남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날 사랑해주는 사람의 부탁이니까…… 들어줘야겠지?”
그 말에 백유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민석하고 손잡았다는 그 사람 있잖아.”
“응.”
“그 사람…… 좀 유혹할 수 있겠니?”
“…… 역시 그거였구나?”
“미안해.”
유아영은 한동안 침묵했다.
백유진도 거기서 더 그녀를 압박하진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렸다.
정적은 카페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악장’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음악이 모차르트의 ‘소나타’로 바뀔 때, 유아영은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백유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아영을 안아주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이번 주 주말에…… 같이 강릉에 좀 가자.”
“강릉?”
“1박 2일로.”
“여행을 가자는 거니?”
“응. 갔다 오고 나서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할게.”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
백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약속한 거다?”
“그래. 약속한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서로의 품에 안긴 채 말없이 서로를 다독여주었다.
8.
수요일 오후 5시 32분.
단란주점 ‘콜걸’의 영업 준비 상태를 확인한 김명길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지하에서 올라와 바깥 공기를 마시며 담배를 태웠다.
‘고병우 금마가 근데 병호 행임만큼 뭐 얼라들을 모으고 그라지는 못할긴데?’
동시에 3개의 업장을 돌리고, 길동 일대의 소규모 건달 조직 및 반달 그리고 추종 세력을 관리하느라 하루 정도 머릿속에서 억누르고 있던, 강철이 던진 경고가 자연스럽게 담배 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천호동 쪽에 양아치들로 어째 뭐 일 도모할라는 긴가?’
그렇게 김명길이 자기 나름대로 자신을 향한 위협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
검은 세단 한 대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그가 서 있는 곳 앞에 딱 멈췄다.
김명길은 손님인가 싶어 입구에서 살짝 거리를 둔 채 물러났다.
그러나 차 조수석과 뒷좌석에서 내린 두 남자는 상가 입구가 아닌 김명길에게로 다가왔다.
그제야 김명길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곤 담배를 버렸다.
그리고 후방에 퇴로를 확인할 때,
“김명길 대표?”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가 공손한 말투로 김명길을 불렀다.
김명길은 잔뜩 경계하며 남자의 물음에 답했다.
“네, 제가 김명길인데예.”
“잠시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김명길은 확신했다.
이 새끼들이라고.
이 새끼들이 강철이 어제 경고한 그놈들이라고.
김명길은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잡고는 말했다.
“느그 뭐고? 뭔데 내보고 같이 가니마니 하고 앉았노?”
김명길의 적대적인 반응에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게 불타는 거 보시면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따라가시겠습니까?”
신사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메시지는 섬뜩했다.
‘어야지?’
김명길은 고민했다.
‘임마들 별로 그래 안 세 보이는데 어째 함 해볼 수……’
김명길이 순순히 끌려가기보단 싸우기로 막 마음을 먹었을 때,
[퍽-!]
그때까지 신사적으로 김명길에게 이야기하던 남자가, 상당한 속도로 김명길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미처 대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기에, 김명길은 그대로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무식한 건달 아니랄까봐, 그냥 따라가면 될 걸 쓸데없이 만용을 부린단 말이야.”
남자는 살짝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곁에 있던 다른 사내에게 김명길을 차에 태우라 명령했다.
그리곤 폰을 꺼내 자신의 윗선에 전화를 넣었다.
“네, 실장님. 잡았습니다. 그쪽으로 끌고 가겠습니다.”
통화는 30초 정도 이어졌다.
그 사이 김명길은 뒷좌석에 안전벨트로 상반신이 고정되고, 청테이프로 손목이 묶인 채 구속됐다.
통화가 끝나고, 김명길을 발로 찬 사내는 조수석에, 김명길을 뒷좌석에 구속한 사내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인천으로 가자.”
그렇게 차는 길동 단란주점 ‘콜걸’을 떠났다.
9.
금방 될 거라던 서용태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옴니버스에 이식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6시간이었다.
“이, 이 폰이 더러워서 이런 겁니다.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이 옴니버스 이게 애플망고폰 따라한다고……”
갖은 변명을 늘어놓긴 했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서용태는 강철의 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아, 아직 이 그 피처폰하고 스마트폰하고 이 연동이 좀 안 돼서 그런 겁니다. 고, 곧 업데이트하면 1시간 안에 설치 가능해질 겁니다.”
밤새도록 작업한 끝에, 서용태는 그런 변명과 함께 위치추적 프로그램 사용법을 강철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설명을 듣고서, 강철은 오전 7시 30분경에 오피스텔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는 일단 잠들었다.
12시간 정도를 자고 난 뒤에야 강철은 깨어났고, 깨자마자 그는 일단 서용태에게 받은 경찰청 정보국 인사기록부를 확인했다.
‘선병호.’
그중, 익숙한 얼굴 하나를 먼저 확인한 강철은 씩 웃으며 그 파일을 따로 빼두었다.
그리고 또 몇 명의 명단을 확인한 후에야, 마침내 강철은 자신이 원하던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백유진.’
84년생.
2010년 올해 27세.
경찰청 정보국 경위.
강철은 가만히 백유진의 파일을 살폈다.
인사기록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철은 인사기록부에 적힌 백유진의 개인 폰 번호를, 선병호의 경찰용 폰에 남아 있는 번호와 대조해 보았다.
같은 번호였다.
‘일단 물증은 다 확보가 됐단 말이지.’
강철이 경찰 인사기록부를 서용태에게 요청한 사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확실하게 백유진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병호가 경찰이라는 직관적인 물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의심병 말기 환자들한테는 이런 것 정도는 있어야지.’
조민석을 설득하기 위해선, 선병호의 권총과 노트북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앞으로 강대산을 밀어내고 조민석을 회장으로 앉히는 과정에서 그의 반대파, 즉 박경채 라인을 숙청하기 위해선 보다 실증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경찰 인사기록부였다.
‘조민석이는 지방에도 주주들이 있다고 했어.’
대산의 1대 주주는 강대산이고, 2대 주주는 도구삼이다.
그 둘의 지분을 합치면 과반이 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시 못 할 비율의 지분이 지방의 주주들에게 있다.
『그럴싸한 명분이 없으면, 지방 주주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방해하려고 할 것이오.』
조민석은 강철에게 말했다.
강대산을 밀어내고, 박경채 라인을 숙청한다고 하더라도, 지방 주주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설득이라…… 뭐, 결과적으로 내 의견에 동조하게만 만들면, 그것도 설득은 설득이겠지.’
강철은 선병호와 백유진의 자료를 따로 빼내어 책상에 보관해둔 후 폰을 꺼냈다.
그리곤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켜서 거기다가 백유진의 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잠시 버퍼링이 걸린 끝에, 마침내 옴니버스 화면 전체에 크게 GPS가 떴다.
‘서대문구에 있구만. 서대문구라…… 경찰청이네.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야.’
백유진의 현재 위치를 파악한 강철은 이번엔 조민석의 번호를 프로그램에 입력해 보았다.
마찬가지로 버퍼링이 걸린 끝에, GPS는 다른 지역을 가리켰다.
송파구 대산그룹 본사였다.
‘이 양반도 역시나 열심히 일하고 계시고.’
마지막으로 강철은 김명길의 번호를 입력했다.
‘응?’
강철은 김명길이 길동이나 천호동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김명길의 위치는 인천이었다.
‘계속 움직이고 있어?’
거기다 김명길의 위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 정도 속도면 걷는 건 아니고, 차를 타고 간다는 건데……’
강철은 가만히 폰을 확인했다.
김명길의 위치는, 이후로 10분간 계속해서 바뀌더니, 마침내 인천항 쪽에서 멈췄다.
‘인천항이라…….’
강철은 5분간 김명길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 걸 추가로 확인한 뒤에야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그리곤 곧장 조민석에게 전화했다.
[조민석이요.]
“어, 조 상무. 뭐 하나 물어보려고. 혹시 인천항 쪽에 대산그룹 재산이 있나?”
[이, 인천항 말이오?]
조민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거, 거기 우리 쪽 항만 창고가 하나 있긴 한데…… 그게……]
강철은 뒷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조민석이 무얼 말하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마 농장하고 비슷한 용도구만?”
[…… 그렇소. 그런데 거기는 왜?]
“아무래도 강대산이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모양이야. 일단 당신은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문 걸어 잠그고 있어.”
[아, 알겠소.]
전화를 끊고, 강철은 대강 옷을 챙겨입은 후 오피스텔을 나섰다.
그리곤 서용태에게서 빼앗아온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강대산이가 있지는 않겠지?’
만약 강대산이 인천항에 있다면, 일은 상당히 쉽게 끝날 터였다.
그러나 윗선이라는 작자들의 행태가 어떤지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강철은 그럴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강대산이까지는 안 바라니까, 최측근 정도 되는 사람 정도만 있으면 좋겠어.’
그렇게 강철은 속도를 높여서 인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강철 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