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8화
“이건 아니란 말이지.”
칼리고는 무척이나 불만족스럽다는 듯 마당을 바라봤다.
마당에는 네 마리의 개들이 납작 엎드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개들 앞에 선 구치가 오른손 검지를 휙 움직이자 개들이 한 바퀴 뒹굴 굴렀다.
개들의 절제된 동작에 가하란은 무심코 박수를 보냈다.
구치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훈련된 병사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개들이 움직였다.
가하란은 자신의 검지를 내려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밥도 챙겨주고, 놀아주고, 투정까지 받아주는데 왜 내 말은 안 듣고…….
칼리고가 벌떡 일어서더니 구치 옆으로 갔다. 보란 듯이 검지를 들어 구치를 가리켰다.
“물어!”
개들이 칼리고에게 달려들었다.
한바탕 개들과 드잡이한 칼리고가 자리로 돌아왔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개들의 침으로 뒤덮여 괴상한 모양새가 됐다.
“알베르트도 그렇고 동물들이 이상하게 저 양반을 따른단 말이야.”
“동물은 내면을 보는 눈이 따로 있다고 하지. 쟤들도 자네의 그 시커먼 속을 보고 기겁한 게 아닐까?”
구치가 다가오며 한 말이었다.
“제 말도 안 들어요.”
정말로 가르침이 필요했다. 툴의 자식들을 얌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 1g 정도는 내어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쟤들이 널 워낙 좋아하는 거니까.”
“이대로 포기 못 해. 상하 관계라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줘야겠어.”
칼리고가 개들을 향해 달려갔고, 또다시 쫓기기 시작했다. 마당을 종횡하는 인간과 개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께선 언제쯤 도착하실까요?”
“곧 올 거다. 미스터 리가 시간 끌지 않는 이상 곧 오겠지. 아마도.”
협회장과 윤이 나타난 건 칼리고가 개들한테 항복을 선언하고 같이 나뒹굴 때였다.
“오셨어요.”
“저 사람이 계속 시끄럽게 굴면 쫓아내도 된단다.”
협회장이 칼리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상황 봐서요. 마실 거 뭐가 좋으세요?”
“아무거나 괜찮다.”
“전 상큼한 과일주스로 부탁할게요.”
윤이 손을 들며 말했다.
“가신 곳은 어땠나요?”
컵 두 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답은 협회장이 해줬다.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 그라운드 제로만큼은 아니지만 마나 밀도가 확연히 변한 곳이 꽤 많았다.”
“생활하지 못할 정도인가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했지. 신인류가 더 늘어날 거다. 기존에 새롭게 마법을 깨달은 친구들도 또 다른 힘을 손에 넣었겠지.”
세상이 또 바뀌고 있었다.
“저번에 제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됐나요?”
윤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안 그래도 제작해 봤어요. 잠시 와 주시겠어요?”
“얼른 가죠.”
“아, 그리고 협회장님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협회장과 윤을 데리고 집 뒤쪽에 마련한 공방으로 향했다. 장비를 점검 중이던 닥이 협회장을 보자마자 슬그머니 옆으로 피했다.
-아버지. 전 저분이 무섭습니다.
“익숙해질 거야.”
공방 지하로 향했다. 하늘석에 설치해 놨던 각종 설비를 이쪽으로 옮겨 놓았다.
하얀 불꽃이 맴도는 용로를 지나 제작대 앞으로 갔다.
“구동계는 말씀해 주신 것과 조금 다르지만 형태는 잡아 놨습니다. 시범 운전도 해봤는데 저한테는 안 맞더라고요.”
윤이 탄성을 내며 완성품에 다가섰다.
“스케치한 것과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오토바이네요.”
이륜차를 여기저기 살펴보던 윤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변속기를 만지면서 핸들을 꺾기도 했다.
“마나 포집을 상시 가동하면 별도의 배터리 교환 없이 계속 운행은 가능하지만, 디스크나 바퀴처럼 소모품은 교환해 줘야 해요.”
“마법 공학으로 뾰로롱 해결할 수 없나요?”
“마법 공학도 만능은 아니라서요. 정비법도 배우셔야 합니다.”
“그 정도야.”
콧노래를 부르는 윤이었다. 독특한 멜로디였는데 본래 살던 계의 노래인 것 같았다.
“난 뭘 하면 되지?”
협회장이 공방을 훑으며 물었다.
가하란은 백염으로 정제한 배합철을 가져왔다.
“이걸 잘라주실 수 있나요?”
공들여 만든 배합철이었다. 새롭게 제작될 거병의 탈로스가 될 합금.
강도 테스트를 자체적으로 거쳤지만, 극한에 도달한 힘을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물론 합금은 반으로 갈릴 것이다.
갈리더라도 몇 초 정도 버틸 수 있는지, 숫자로 된 자료를 얻고 싶었다.
“어느 정도의 힘을 실으면 될까?”
“가용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해주셨으면 합니다.”
협회장이 애검을 뽑아 든 상태에서 잠시 멈췄다.
“미안한데 검 하나 빌릴 수 있을까? 이 녀석도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협회장의 검을 넘겨받았다. 곧게 뻗은 검신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 검병 쪽이었다. 이음새에 균열이 보였다.
“마에스트로의 솜씨는 따라갈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 손볼 수는 있습니다. 제가 맡아서 수리해 봐도 될까요?”
협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가 쓰는 수련용 검을 가져왔다. 검을 쥐고 몇 번 흔들어 본 협회장이 배합철을 바라봤다.
“잘라보마.”
협회장이 검을 내리긋는 순간.
시설 내부에 설치된 경보 시스템이 일시에 작동하며 요란한 소리를 뱉어냈다.
소음과 함께 배합철이 반으로 쪼개졌다.
가하란은 손가락을 움직여 경보 시스템을 껐다. 그리고 고정대에서 떨어져 나간, 이제는 두 덩이가 된 배합철을 들어 올렸다.
검이 지나간 단면이 녹아 있었다. 열전도성이 낮아 뜨겁지는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맥없이 잘리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허탈해졌다.
“좀 더 연구해 봐야겠네요.”
배합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 *
“항공 모함은 언제 오는 거죠?”
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곧 올 겁니다.”
윤은 하늘석을 가리켜 항공 모함이라고 했다. 전에 항공 모함이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는데, 윤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바다 위에 뜬 요새.
요약하면 그런 거였다.
하늘석은 하늘에 있고 호위전단이라고 부르는 각종 배들이 없다는 게 약간 다르지만.
“다음 목적지는 어딘가요?”
가하란은 윤을 보며 물었다.
칼리고와 구치, 협회장은 이틀 전 둔을 떠났다. 구치와 협회장은 서쪽으로 칼리고는 남쪽으로 향했다.
“글쎄요. 근 10여 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더니 조금 지치긴 하네요. 인간이란 게 참 쉽게 변하죠? 오두막에 갇혀 지낼 땐 한시도 가만히 있기 싫었는데, 이제는 휴식이 그리워지고 있으니.”
“10년이면 쉴 때도 됐죠.”
윤의 심정을 이해하는 바였다.
다른 위상에서 홀로 고생하고 돌아오고 나니 느긋한 생활이 그리워졌다.
기회가 된다면 휑한 곳에 자리 잡고 무엇 하나 계획하지 않은 채로 몇 달 정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카트시를 찾고 난 후에.
“가하란 씨만 괜찮다면 이웃사촌이 되고 싶은데.”
“이웃사촌이요?”
“근처에 사는 걸 의미해요. 담벼락 하나 끼고 서로 시시콜콜한 얘기 주고받고. 아, 너무 가까우면 민폐일 수 있으니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을까 하는데.”
“저야 좋죠. 해주시는 얘기가 하나같이 흥미로우니까요.”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어요.”
“뭔가요?”
“변신 로봇.”
“……그건 또 뭐죠?”
“비효율의 극치인데 그게 또 남자의 로망이죠.”
남자의 로망.
윤이 때때로 꺼내 드는 말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해 주세요. 실현 가능성을 따져보고 도전해 보죠.”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벽에 걸어둔 통신기가 희미한 소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늘석과 연결된 통신기.
“저기 오네요.”
가하란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석을 향해 웃어 보였다.
* * *
안원은 언제나 그랬듯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그 안에서 겹겹이 쌓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 안 미친 건 칭찬해 줄 만하네.
산오투의 거대한 눈이 하늘에 맺혔다.
“위상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랑겔에 대한 것도 전해 드릴게요.”
-그러든지.
“요즘 어떠세요?”
-너만 없으면 조용하고 좋아. 정신 나간 새는 조용해졌고, 냄새나는 거북도 없고. 쥐새끼야 항상 밖을 나돌아다니니 알 바 아니고.
“얘기할 친구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하늘에서 하얀 불꽃이 떨어졌다.
가하란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불꽃을 피했다.
-꺼져.
“다음에 또 올게요.”
하늘에 맺혀 있던 눈동자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안원을 한 번 둘러본 후 눈을 감았다.
* * *
“마법 주문 같은 건 유치해서 필요가 없다니까요? 무엇보다 제 친구들은 그런 거 없이도 다 제 말을 들어줘요.”
“샬롯 씨. 잘 생각해 봐요. 공격할 때 기합만 지르면 밋밋하다니까요? 트렌드세터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왜 몰라주는 겁니까?”
“이상한 말 그만 하세요. 바람들도 비웃고 있어요.”
“유행은 만들어 가는 겁니다. 자, 외치세요! 윈드…….”
가하란은 차를 마시며 하늘로 떠오른 윤을 바라봤다. 허우적거리며 내려달라고 외치지만, 샬롯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도 오기가 생겼는지 하늘에서 소리를 질렀다.
“대대로 바람 마법은 윈드 커…… 컥!”
지면에 살포시 처박히는 윤이었다.
“사이가 좋은 거 맞지?”
밀레나가 곁에 앉으며 말했다. 살짝 탄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밀레나가 갸웃거렸다.
“왜?”
“그냥.”
밀레나가 픽 웃더니 신문을 펼쳤다.
그라운드 제로 이전만큼이나 신문사 활동이 활발해졌다. 대도시인 경우 주 단위로 새로운 신문사가 등장한다고 했다.
마전기의 영향이 컸으리라.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소규모 마을에도 전송탑이 들어가고 있으니까.
생활 환경이 나아지면 사람들은 여가를 활용하기 마련이다. 흥밋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보급된 것이 신문일 테고.
“이젠 사진도 마법사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어. 렌즈를 통해 세상을 찍어낸 게 더 선명할 때도 있고.”
밀레나가 신문을 보여줬다.
바다 위에 태양이 걸려 있었다.
신문을 통해서 바다를 보게 되는 세상이 찾아왔다.
직접 보면 또 다른 감동이 있을 거라고 사진 기자가 사진 밑에 적어 놓았다.
“사람들이 개척 시대라고 하더라.”
지난 한 달간 하늘석을 타고 대륙을 종횡한 밀레나는 미개척지 안쪽에서도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배터리 효율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며 거병 운용이 한층 더 쉬워졌고, 신인류의 대거 등장으로 마수 사냥에 박차가 가해진 것이다.
“타챠 아저씨는?”
“검은 심장 부족이 자리 잡은 산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어. 겁 없는 인간들에게 경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다.
마법 공학, 그리고 마법.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두 개의 산물이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그 때문일까.
다른 종과의 다툼이 잦아졌다고 들었다.
“소피나의 오크분들이 중재를 원하고 있어.”
“저번에 얘기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숲 아래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그쪽하고 분쟁이래.”
“어렵네.”
개척 시대.
아버지 세대가 꿈꾸던 시대가 찾아왔지만, 마냥 장밋빛은 아니었다.
주먹구구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도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조약이 필요했다.
아리엘이 지난번에 언급한 국제회의를 떠올릴 때였다.
착안이 진동했다.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샬롯, 안으로 들어와. 윤 형님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언가 오고 있었다.
촘촘하게 엮인 점들이 난잡하게 움직였다. 처음 보는 힘의 형태였다.
밀레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하지만 위험해 보여.”
“……애들을 깨울게.”
“잠깐만.”
먼 하늘에 푸른색 번개가 번쩍였다. 동시에 검은색 점이 하나 생겨났다.
검은색 점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사람이었다.
사람임을 인식한 그 순간, 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사람이 마당에 안착했다.
먼지조차 일지 않았다.
그토록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파공음조차 없었다.
가하란은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하얗게 센 머리.
장난기와 우울함이 공존하는 눈동자.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퀼비언…… 형.”
형이란 호칭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토끼 할멈 머릿속에서 만난 그건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가 초면인 것도 아니지. 어쨌든 기억은 공유하니까.”
퀼비언이 다가왔다.
모든 걸 빨아들일 듯한 검은 동공과 마주했다.
착안으로 읽어낼 수 없는 또 다른 인간.
“난 모든 걸 볼 수 없어. 하지만 가끔 보이는 것들이 있지. 꼬마야, 내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해.”
마도사의 눈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틈새에서 그 여자를 만났지? 하얀 감옥 속에서 미련하게 혼자 있는 그 여자를 말이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