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7화
아침은 조용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아침은 고요해야 하며, 정숙해야 하고, 차분해야 한다.
끼긱! 깍! 끼익!
벨솔은 이불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아늑한 아침을 깨우는 악랄한 소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톰한 이불은 차음성이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소음을 어느 정도는 막아줬다.
그래, 잘 수 있어. 깊은 잠에 빠져 저 망할 원숭이들의 소리를 잊고 이내 평온한 꿈나라로 향하는 거야.
푹!
무언가가 얼굴로 뛰어들었다.
벨솔은 참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불 위에서 난리 치던 놈이 사라졌다. 그래, 이제 다시 숨을 고르고…….
툭.
침대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호기심을 가져선 안 된다. 이건 적의 함정이니까. 얌전하게,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굴어야 한다.
툭, 투투툭.
“야 이 새끼들아!”
벨솔은 이불을 치워내며 소리를 질렀다. 외치는 순간 목덜미가 당겼다. 혈압을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된 건가, 싶은 구슬픈 생각이 잠깐 들었다.
오십.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걸까.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졌다. 날뛰는 원숭이 두 마리를 뒤쫓는 것도 귀찮고, 아침을 먹는 것도 귀찮고, 내려가 정리된 자료를 살피는 것도 귀찮아졌다.
“모르겠다.”
다시 누웠다. 그렇게 1분 정도 있다가 일어났다.
귀찮은 상태가 귀찮아졌다. 역시 이 몸뚱이에는 저주가 걸렸다. 일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끙끙 앓게 되는 저주가.
커피를 내렸다. 선반을 오가며 난리 치던 원숭이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너희들 진짜 밉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찬장에서 쿠키를 꺼내 하나씩 쥐여줬다. 끽끽거리며 좋아하는 루루와 라라였다.
아침 학살자인 두 원숭이가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놀이터를 찾아 간 것이다. 아마 연구 3실일 것이다. 그곳에 있을 후배들에게 감사와 애도를.
커피 잔을 들고 책상으로 갔다. 어제 보다만 자료를 들추다가 책상 끝자락에 세워둔 일기에 시선이 갔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건 교수님 아버지께서 남기신 일지입니다.”
넉 달 전, 기적처럼 돌아온 가하란이 넘긴 물건이었다.
아버지.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아버지는 꿈만 바라보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젖먹이를 내버려 두고 사라질 정도로 미련한 사람.
일지 안에는 아버지의 짧은 인생이 수록돼 있었다.
하늘석을 향한 집념, 갈망, 그리고 끝내 하늘석에 올라 그곳 생태계를 확인했다는 환희.
환희의 끝은 으레 그렇듯 후회로 귀결됐다. 대책 없는 아버지는 대책 없이 하늘석에 올라가고 대책 없이 하늘석에서 떨어졌다.
낭만인지 미련한 건지.
“아, 이것도 닮은 건가?”
두 딸 모두 가족은 고사하고 실험실에 처박혀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자길 닮아 낭만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자긴 결혼은 했다며 구박할까.
삭아서 들추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가죽 커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나중에 루나를 만나게 된다면 전해주리라. 벨루나는 이걸 보며 뭐라고 할까. 아마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 애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봐야 할 것이다.
우리 몸에 어떤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그 정도는 확인해야 한다.
“압력 낮추고, 활성도 확인하고.”
벨솔은 가시화 패드를 계속 확인했다. 골리앗의 피가 실린더를 거쳐 투명한 관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회전 속도는 1.2까지 맞춰봐.”
실전 투입이 가능한 품질까지 끌어올렸으나 애초에 목표한 바는 그게 아니었다.
얇은 관을 헤엄치다가 바닥에 깔린 굵은 파이프로 이동하는 액상 근육을 지켜볼 때였다.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메인실에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애들이 가까이 왔다는 건…….
출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예상한 대로 가하란이 루루와 라라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연구 단지를 헤집고 다니는 악동들이 얌전하게 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데려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벨솔이 루루와 라라를 보며 말했다. 말이 땅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두 원숭이가 품에서 뛰쳐나와 벨솔의 어깨에 올랐다.
“싫다는데요?”
가하란이 얄밉게 웃었다.
“진전이 있나요?”
골리앗의 피를 말하는 것이리라.
“기대한 수치는 아니지만 나아지고 있어. 물론 네가 부탁한 숫자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지만.”
“마음 편히 기다리면 되겠네요.”
“차라리 다그치는 게 어때? 그편이 오히려 덜 신경 쓰이니까.”
“전 교수님을 믿습니다.”
“속이 메슥거릴 거 같으니 그만해.”
가하란 주변을 뛰어놀던 루루와 라라가 메인실을 벗어났다.
“내려가자.”
골리앗의 피를 봤으니 이제 두 번째 방문 목적을 확인시켜 줄 때였다.
가하란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널찍한 지하실에는 10m 간격을 두고 세워진 두 개의 수신탑이 있었다. 높이 1m인 수신탑을 둘러싼 반투명한 벽이 이따금 주황 빛을 토해냈다.
“어때?”
관찰 중인 후배에게 가서 물었다.
“23.12 장파부터 시작해서 계속 확인해 보고 있는데 역시나 통과하질 못하네요.”
“이 속도면 특수 대역 전체를 훑는 데 어느 정도 걸릴까?”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특수 대역을 세분화해 이용할 수 있다는 개념도 아직 생소하니까요.”
후배의 시선은 가하란에게 닿아 있었다.
“고생 좀 하자.”
후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옆으로 가하란이 다가왔다.
“네가 설치한 이 차단벽, 정말 완벽하게 마나 파장을 상쇄하고 있어. 그 어떤 통신 장비도 이 벽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지.”
“하지만 라라와 루루는 서로를 감지했어요. 갈린 위상에서도 완벽하게 서로를 인식했죠. 정보 교환도 이루어졌고요. 비트와 닮았으면서도 비트와는 조금 다른 길을 통해 둘은 의식을 주고받은 겁니다.”
비트.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정보의 길. 뿌리가 힘의 근원이라면 비트는 뿌리에서 발생한 온갖 형태의 데이터라고 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거쳐 또 다른 어딘가에 닿아 있다고, 가하란은 설명했다.
실물을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었다. 간접적인 방법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했으나 운 좋으면 중상, 대개는 정신적 사망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거두었다.
말년에 죽기 직전 침대에서 도전해 보긴 하겠지만.
“루루와 라라의 통신 체계를 미니 비트에 접목할 수 있게 되면 대륙 간 통신도 가능해질 테죠.”
하늘석을 경유한 장거리 통신도 놀라울 지경인데, 가하란은 그보다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대륙 스케일로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상.
벨솔이 생각하기에 이 땅에는 뛰어난 천재가 무섭도록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천재는 능력을 개화할 환경과 만나지 못한다.
상식을 비틀 지능이 있다고 한들 기초적인 교육과 배움을 실현할 장소가 없다면 천재의 뇌로 밭일하다 죽게 된다.
하지만 정보 교류가 활발해진다면, 배움이 특수가 아닌 보편의 틀을 갖추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
물론 그런 세상이 찾아온다고 해도 중간에서 편익을 취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정보를 숨기고 오판하도록 유도해서 천재들의 능력을 갈취할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다음 주에 하늘석이 돌아옵니다.”
가하란이 말했다.
“그래?”
“올라가 보시겠어요?”
“음, 나중에. 루나랑 같이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알겠습니다.”
“밀레나도 한 달 만에 돌아오는 건가?”
“네.”
벨솔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신혼인데 아내가 옆에 없어서 쓸쓸하겠어.”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죠.”
대화하던 도중 수신탑을 둘러싼 반투명한 차단벽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설마?
하지만 빛은 지속되지 않았다.
“통신 실패입니다.”
후배가 말했다. 벨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쉬운 일은 아니니까.”
가하란도 동의한다는 듯 주억거렸다.
“아, 그쪽 일은 어때? 뭔가 단서를 잡았어?”
둔 중심부에 생긴 분지 안쪽에 가하란과 연관된 사람들과 온갖 장비가 모여 있었다.
도심지 복원이 주된 목적이라 알려졌지만, 가하란이 말하길 최우선 과제는 ‘친구’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가하란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한동안 실험을 관찰하다가 위로 올라갔다. 가하란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메인실을 벗어났다.
멀어져 가는 청년을 지켜보다가 돌아왔다.
“8번 섹터 교체하고 필립 농도 조금만 더 올리고.”
벨솔은 거대한 심장처럼 발밑에서 쿵쿵대는 순환 장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 * *
으스러진 담벼락, 내려앉은 집.
유년의 추억이 녹아 있는 집터 앞에 연푸른 예복을 입은 밀레나가 있었다.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스커트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스커트와 같은 톤인 재킷은 밀레나의 성격을 대변하듯 어깨 쪽이 딱 맞아떨어졌다.
결혼식 예복이라면 풍성한 드레스를 상상해 오곤 했는데, 엔첸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예복은 심플하게 구성돼 있었다.
보고 난 후에 가하란은 생각했다.
절제된 형태가 밀레나와 잘 어울린다고.
“치렁치렁한 것도 좋지만 이쪽이 좀 더 나한테 맞아.”
밀레나는 자신의 매력을 뽐낼 줄 아는 여자였다.
이제는 누구도 거주하지 않는 골목을 결혼식 장소로 택한 건 밀레나였다.
낮은 담벼락에서 나눴던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다나 뭐라나.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좀 나와줄래?”
가하란은 이불처럼 몸을 덮은 네 마리의 개를 바라봤다. 덥수룩하게 털이 난 개들은 하나같이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른거리는 결혼식 풍경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세웠음에도 개 네 마리는 침대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너희들 덩치를 생각해. 아래 깔린 사람은 잘못하면 질식사해.”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네 마리 다 혀를 길게 내뽑으며 헥헥거릴 뿐이다.
툴의 버릇을 빼닮았다.
툴 1호, 2호, 3호, 4호라 이름 지어도 쟤들은 불만이 없어야 한다.
개털이 내려앉은 이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개털 없는 삶은 진즉에 포기했다. 아침 먹을 때 개털이 입 안에 안 들어가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길게 하품하며 1층으로 내려갈 때였다.
“…….”
가하란은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제집처럼 편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 제집 맞죠?”
“맞을걸?”
“그렇죠? 전 또 다른 사람 집에 와서 침대를 빌린 건가, 그런 착각을 했지 뭐예요.”
칼리고가 풋 웃더니 쥐고 있던 식빵을 입에 넣었다. 식탁에는 빈 병이 하나 보였다. 오렌지잼이 가득 담겨 있어야 할 병이었다.
다가가 병을 들었다. 투명한 병 너머로 칼리고의 얼굴이 보인다.
“다 드셨네요.”
“맛있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아, 설탕도 좀 먹었다. 알지? 머리를 쓰려면 단 게 필요하다는 거. 미스터 리가 알려준 거니까 확실해. 당분은 아이디어의…….”
가하란은 개 네 마리를 바라본 후 손가락으로 칼리고를 가리켰다. 덩치 큰 성견들이 칼리고에게 달려들었다.
칼리고가 비명을 지르며 집 밖으로 나갔다.
가하란은 조용해진 식탁에 앉아 얼마 남지 않은 오렌지잼을 싹싹 긁어 식빵에 발랐다.
구운 식빵이 바삭 소리를 냈다.
“맛있네.”
밖에서 멍멍,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칼리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 좀 데려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