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딱 보면 모르겠어? 게다가 위트 애들도 다음 주에 움직인다고 했어.”
“좀 위험해 보이는데.”
“위험하니까 가치가 있는 거지. 정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든가. 중요한 순간에 얼타는 놈이 있으면 곤란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버밀론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동료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저기 장벽만 넘으면 별거 없어. 안쪽으로 들어가서 학회 건물 주변부터 살펴.”
“낮에 보니까 중형 거병들이 잔뜩 있던데.”
“조종사도 없는데 움직이겠어? 그냥 고철이야. 사람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 덩어리.”
“하긴.”
3개월 전, 대륙 전체가 흔들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버밀론이 살던 곳은 난리가 났다.
균열이 확장됐고 가시화된 마나가 날뛰었다.
원인을 알아본바 둔에서 일어난 ‘어떤 실험’ 때문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전부터 말이 많았다. 학회장이 시민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닌 사익을 위해 정치 놀음 중이라고.
진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고결한 학회장의 희생이든 세 치 혀를 놀린 악덕 사업가의 사망이든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학회장이 죽고, 그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학회 자료가 땅에 파묻혔다는 것이다.
“학회 자료만 손에 넣으면 인생이 달라질 거야. 케브르톤 클랜 쪽에 연줄이 있으니까 처분도 쉬워. 아니면 우리가 따로 관리해도 되고.”
“돈도 좋지만 난 새로운 힘을 얻고 싶어. 너희도 그렇잖아?”
헝크의 말에 버밀론은 손가락을 튕겼다.
“힘도 좋고 돈도 좋고 명예, 지위 다 좋아. 그러니 잽싸게 들어가서 상황 살피고 물건 빼 오자.”
둔 도심지와 아웃라인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한 게 일주일. 분지 내에 설치된 수십 개의 창고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현장 관리자들이 자주 드나들던 18번 창고. 보유 품목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귀중한 게 모여 있을 터였다.
버밀론은 다섯 명의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작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각되면 정해진 대로 둘씩 찢어져서 빠져나오는 거 잊지 말고. 전투는 최대한 피하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사정 봐주지 말고 쏟아내. 잡히면 골치 아프니까.”
“거병만 없으면 나머진 쉽지.”
맞은편에 있는 오씬이 손안에 작은 번개를 만들어내며 말했다.
“우린 구시대 인간들하고 다르잖아. 너무 겁먹지 말고 후딱 끝내자.”
버밀론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여기 모인 여섯 명은 ‘신인류’였다. 학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꾐에 넘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마법을 수련해 자유를 얻은 마법사들.
“출발하자.”
헝크가 양옆에 있는 동료의 손을 붙잡았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로 손을 맞잡은 순간, 헝크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뛰어난 새.”
헝크의 말에 반응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버밀론은 킥 웃으며 물었다.
“그 유치한 루틴은 안 바꾸는 거야?”
“기합보다는 낫잖아. 나름 멋도 있고. 아, 말 걸지 마. 집중해야 하니까.”
마나가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헝크의 마법이 안정화되기까지 1분 정도가 소요됐다.
“됐어.”
헝크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신체술을 사용한 것처럼 훌쩍 뛰어올라 장벽을 넘었다. 버밀론도 뒤를 따라갔다.
장벽을 넘자마자 목표로 삼은 창고를 향해 뛰었다. 시야 끝자락에 정지해 있는 거병들이 보였다.
버밀론은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18번 창고.
보초를 서는 사람조차 없었다.
“쉽네, 쉬워.”
무슨 배짱일까. 지난 일주일간 관찰한 결과 창고 주변은 물론, 장벽 근처를 감시하는 인원이 전혀 없었다.
중형 거병이 배치돼 있으니 일반인은 겁을 먹고 못 올 거라 생각했나? 아니면 다른 경비 수단이 존재하는 걸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조심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 천천히 접근했다.
“잡히는 거 있어?”
“없어. 마나 밀도도 균등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한 후 창고 옆에 붙었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자세를 낮추고 창고 입구로 향했다. 자물쇠는커녕 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만약을 대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했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타닥.
적막을 깨트리는 소리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창고 구석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불덩이가 떠올랐다. 동료의 마법이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불빛이 창고 깊숙한 곳을 비췄다.
네 개의 다리를 가진 기계인형이 바닥을 톡톡 찍으며 다가왔다.
-내 잠을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
걸렸다.
불덩이가 기계인형을 향해 쏘아졌다. 화르륵 불길에 삼켜진 기계인형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챙기고 뜨자.”
은밀함을 버리고 과감하게 나서야 할 때였다. 검게 변한 기계인형을 발로 치우고 창고 안을 살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버밀론은 선반에 놓인 엘리멘트 패널 하나를 들었다.
무게가 상당했다. 안에 새겨진 회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회와 연관된 거면 비싸게 거래될 것이다.
부피가 작은 것부터 차곡차곡 배낭 안에 넣었다.
“가자.”
욕심은 화를 낳는다. 신호를 주자 동료들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재빨리 내려놓았다.
미리 봐둔 도주 루트로 이동하며 뒤를 돌아봤다. 추적자는 없었다. 18번 창고 주변도 조용했다.
발각된 것치고는 심심한 반응이었다. 분명 사방에 불이 켜지고 고함과 함께 경비병이 달려들 거라 예상했는데.
“멍청한 새끼들이네.”
장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만 넘으면 된다. 도심지에 숨어들면 추적자가 따라붙어도 따돌릴 수 있다.
헝크가 “서둘러”라고 말하며 눈치를 줬다. 마법이 곧 끝난다는 의미였다.
“먼저 가서 확인할게.”
버밀론이 장벽을 올려다보며 힘껏 발을 굴렀다. 몸이 살짝 떠오르다가 가라앉았다.
“뭐해?”
바로 옆에서 오씬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버밀론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헝크의 마법을 구현하던 마나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동료들도 뒤늦게 눈치챘는지 장벽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몸은 솟구치지 않았고 안쓰러운 점프만 반복했다.
“헝크,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유지 시간은 아직 남았는데.”
버밀론은 당황한 동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황하지 마. 다시 걸면 돼. 그렇지?”
“그, 그래.”
헝크가 손을 내밀었다.
마법은 정형화된 기술이 아니었다. 이 정도 오차는 생길 수 있다. 침착하게 다시 마법을 걸면…….
-딱 봐도 위험해 보이지 않아? 나 같으면 겁나서 접근을 못 할 텐데. 인간들은 말이야, 정말 긍정적인 동물이야.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애써 무시한단 말이지. 경고해도 듣지도 않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장벽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듯 긴 하품까지 했다.
기계인형이 내던 목소리였다. 회로가 불타 고장 난 게 아니었나? 그보다 기계면서 왜 하품을 하는 거지? 기계가 아닌 건가? 통신체가 달려 있는 건가?
-얌전히 있어. 발악하지 말고.
“오씬!”
발사체를 생성할 수 있는 오씬이라면 저 기계를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나가…….”
오씬은 손을 허우적거릴 뿐 자랑거리인 번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난 분명 말했어. 내 잠을 방해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그냥 갔으면 서로 편했잖아? 이건 너희가 선택한 거야. 지금이라도 얌전히 잡혀. 그러면 다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내 수면 시간을 더 방해한다면, 불의의 사고를 겪게 될 거야.
“튀어!”
사전에 정해둔 대로 둘씩 짝지어 세 방향으로 찢어질 때였다. 버밀론은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멈춰야 했다.
-방금 ‘튀어’라고 한 너. 넌 불의의 사고를 겪어야겠다.
1m 남짓한 기계인형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기계인형의 생김새를 잡아냈다.
아니, 저건 기계인형이 아니라…….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 * *
-이렇게 멍청한 애들은 어디서 솟아나는 거야?
슬리피가 투덜거렸다. 자기가 당번일 때만 이런 애들이 온다면서.
가하란은 통신기에 대고 옅게 웃었다.
“고생했어.”
-루카 소장한테 내일 넘길게. 조직적으로 움직인 건 아니라 별건 없을 거야. 철없는 꼬마들이 마법 하나 믿고 설친 거거든.
“군에 보내기 전에 내가 내일 먼저 만나볼게.”
-알겠어. 근데 지금 어디야?
“아웃라인 바깥쪽.”
-거기구나. 알겠어, 엄마한테는 말해둘게.
통신이 끊겼다.
가하란은 저 멀리 있는 검게 탄 나무를 바라보며 걸음을 뗐다.
“저 왔어요.”
어머니의 비석 앞에 꽃을 내려놓았다. 셀베이아가 챙겨준 샌드위치도 한쪽 옆에 두었다.
“아쉽게도 아버지 건 오늘 없어요.”
어머니 비석 옆에 세워둔 비석을 보며 말했다. 비석 밑에는 아버지가 남긴 아이디어 노트가 들어 있었다.
비석에 내려앉은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아낸 후 듬성듬성 난 잡초를 정리했다.
“근데 오늘은 두 분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바로 옆 자그마한 봉분 앞에 섰다. 오래된 개 목걸이가 왕관처럼 봉분 위에 얹어져 있었다.
바구니에 손을 넣어 살점이 잔뜩 붙어 있는 뼈를 꺼냈다.
“아직 안 떠났나 보네.”
개 무덤 위에 올려둔 이름표나 목걸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비바람에 쓸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개의 영혼이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누군가가 개의 영혼이 존재하느냐 묻는다면, 가하란은 웃으면서 그렇게 믿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툴이 들었다면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늦게 온 게 누구인데 투덜대냐면서.
그러다가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한바탕 뛰어놀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네 새끼들 다 널 닮았더라.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밀레나가 고생이야. 그 덩치 큰 애들을 씻기고 산책시키고 놀아주고. 제일 좋아하는 건 제니더라. 드디어 같이 돌봐줄 사람이 생겼다고.”
월, 하고 짖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반가웠다.
반쪽뿐인 샌드위치를 다 먹은 후 시계를 확인했다.
“요 몇 달간 시간이 참 빨리 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네 새끼들 내가 잘 돌보고, 여기도 내가 관리할 테니까 이제 그만 놀러 가. 너 뛰어다니는 거 좋아했잖아.”
빈 바구니를 들고 돌아설 때였다.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나뭇잎이 한순간 치솟아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10여 초간 불어닥치던 바람이 가라앉았다. 가하란은 옷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툴의 작은 무덤을 바라봤다.
“그래. 너도 한 고집했지.”
목걸이는 여전히 무덤 위에 있었다.
집 앞 담벼락에 착 달라붙어 하염없이 골목만 바라보던 덩치 큰 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또 올게.”
다음에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훌훌 떠나 다른 세계를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을지.
그건 툴이 결정할 일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