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55화 (555/558)

제555화

“필! 그쪽은 가면 안 돼.”

필은 힘차게 휘젓던 팔과 다리를 멈추며 앞을 내다봤다. 통행금지 표지와 함께 높게 치솟은 장벽이 보였다.

골목 끝에 놓아둔 상자를 밟고 올라가 지붕에 섰다. 시야가 확 트였다.

“필!”

“잠깐만.”

형은 언제나 안 된다고만 한다. 필은 지붕 끝자락에 발을 댄 다음 힘차게 뛰었다.

장벽에 올라서자마자 팔을 흔들어 중심을 잡았다. 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필! 하지 말라니까!”

밑을 내려다보니 형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움찔했지만 이내 씩 웃어 보였다.

“금방 보고 내려갈게. 아니면 형도 올라오든가.”

“너 진짜!”

필은 폭 40cm의 장벽을 따라 발을 통통 굴렸다. 이 아슬아슬한 장벽 질주를 무사히 끝내야 애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멈춰 서서 오른쪽을 바라봤다.

장벽 너머가 훤히 보였다.

아래로 움푹 파고들어 간 분지 안쪽에 사람들과 기계들이 가득했다.

거대한 트럭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중형 거병들이 무언가를 들고 이동 중이었다.

“내가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언제 따라온 것일까. 필은 뒤에 선 형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형도 올라왔네?”

“너 진짜…….”

다가온 형이 팔을 잡아당겼다.

“내려가자. 위험해.”

“잠깐만. 잠깐만 저거 보고 가자.”

장벽에 걸터앉았다. 형은 한숨을 내쉰 후 옆으로 왔다.

“형 그거 알아? 여기가 도시 중심이었대.”

“알아. 저번에 아빠가 말해줬잖아.”

“그랬나?”

형이 턱을 괴며 말했다.

“난리도 아니었겠지. 갑자기 이렇게 된 거니까.”

“메이린이 그러던데, 이렇게 만든 거 어떤 남자래. 그것도 혼자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니야?”

“아니지! 둔 학회장이란 인간이 위험한 실험 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둔 학회장.

어른들이 수시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너도 커서 학회장처럼 되어야지,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지금은 ‘둔 학회장’ 하면 ‘죽일 놈’이 돼버렸지만.

“근데 그것도 거짓말 아닐까? 어른들은 맨날 거짓말만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단 학회장이 위험한 사람이었다는 건 확실해. 이 형이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해 얻어낸 정보야.”

형은 그럴싸한 거짓말을 할 때 정보라는 말을 사용했다. 뭐,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저 많은 거병은 어디서 온 걸까.”

“루드 팩토리라고는 하는데, 거기 말고도 여기저기서 몰려왔겠지.”

중장비를 든 중형 거병이 일렬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대체 뭘 하는 걸까?”

“말로는 복원 사업이라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진짜 이유?”

필은 진짜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냄새가 잔뜩 배어 있으니까.

“알고 싶어?”

“어!”

“그러면 내 심부름 세 개만 해.”

“두 개.”

“좋아. 내 동생이니까 두 개로 봐줄게.”

형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보물을 찾는 거야.”

“보물? 저 아래 보물이 있어?”

“내가 말했잖아. 학회장이 위험한 실험을 했다고. 위험하다는 건 다른 말로 고부가 가치 사업이란 뜻이지.”

“고부가 가치 사업? 그게 뭐야?”

“돈을 엄청나게 벌어다 주는 일.”

“엄청나게? 얼마나?”

“상상도 못 할 만큼. 네가 원하는 걸 다 살 수 있을 정도야.”

“진짜?”

그래서 저 많은 사람과 거병이 모여 있는 거구나.

“나도 찾아볼까? 보물 말이야.”

“어허, 여기 함부로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했어, 안 했어?”

“했어.”

“장벽 위를 뛰는 것까지는 어른들도 이해하지만, 이 안으로 들어가는 건 진짜 안 돼. 잘못하다가 트럭에 치이거나 사고당하면 진짜 큰일 나.”

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형하고 약속해. 다른 건 다 해도 되는데, 넘어가는 건 안 돼. 알겠지?”

“알았어.”

필은 장난을 쳐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분할 수 있었다. 형이 진지하게 말할 때는 무조건 들어야 했다.

한동안 장벽 너머를 구경하다가 내려왔다.

해가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 형은 친구들과 할 일이 있다며 다른 곳으로 갔다.

도시를 벗어나 아웃라인으로 향했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 사이에 녹색 지붕이 보였다.

“엄마!”

문을 열고 들어가던 필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 하는 사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필!”

바닥에 나뒹굴기 무섭게 엄마가 달려왔다. 필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바닥에 쓸린 팔과 부딪힌 뺨이 눈물 나게 아팠다.

다시 일어서려고 했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 밑이 허전했다.

“엄마.”

“그러게 일찍 들어오라고 했지? 오늘 점검받아야 한다고.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 속상하게 할래?”

엄마의 다그침과 통증이 버무려져 기껏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애들이 보면 놀릴 만큼 엉엉 울 때였다.

“저도 어릴 때 그랬어요. 신나게 놀다 보면 시간을 깜빡하곤 했죠.”

낯선 목소리였다. 앞을 바라보니 이름 모를 아저씨가 있었다. 아니, 형인가?

얼굴에 옅은 화상 자국이 보였다.

“잠깐 좀 볼까?”

“……누구세요?”

“오늘 오기로 한 분이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왔어. 이름은 가하란.”

엄마를 슬쩍 바라봤는데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단 의자에 앉아볼까?”

몸이 번쩍 들렸다.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내려다봤다.

“다리가 없어진 것 같아요.”

“배터리 문제일 거야. 신경이 차단돼서 잠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고. 금방 낫게 해줄게.”

떼어낸 두 개의 의족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작은 부품들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잠깐 확인해 볼게.”

“와!”

눈앞에 알록달록한 선들이 생겨났다. 손을 내밀어 선들을 만져봤다. 손끝에 닿은 선들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됐다. 살짝 따끔할 거야.”

찌릿한 느낌과 함께 다시 다리가 생겨났다. 필은 바닥에 내려와 힘차게 발을 굴렀다.

“어때?”

“훨씬 편해요.”

가하란이 엄마를 바라봤다.

“일단 조정은 끝내놨어요. 하지만 성장기다 보니 점검 주기를 짧게 가져가야 해요.”

“아, 네.”

엄마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필은 알고 있었다. 튼튼하게 붙어 있는 쇠로 된 다리가 공짜가 아니라는 걸.

“카트시 재단에 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게 뭐죠?”

“제가 안내 책자를 하나 남겨두고 갈게요.”

가방에서 나오는 종이 뭉치를 보며 필이 말했다.

“엄마 글 잘 몰라요.”

“얘 좀 봐.”

엄마가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제가 실수했네요. 내일 이쪽으로 사람을 보낼게요. 홍보를 하긴 했는데 미흡한 부분이 많았네요.”

가하란이 손목을 들여다봤다. 필은 궁금해서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뭐 보는 거예요?”

“아, 이거? 시계야.”

“와. 되게 작다. 아빠가 가지고 다니는 건 주먹만 한데.”

“곧 많은 사람이 차고 다니게 될 거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선생님.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아닙니다. 가봐야 할 곳이 또 있어서요.”

“바쁘시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하하.”

엄마와 함께 배웅을 나갔다. 멀어져 가는 가하란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형! 나중에 또 와요!”

멀어진 가하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그건 이쪽에 놔주세요.”

“여기요?”

“네.”

셀베이아는 벽면 가득히 놓인 책장을 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이걸 또 언제 다 정리해야 하나.

“해야지.”

짐 옮기는 건 인부에게 맡길 수 있지만, 자료 정리만큼은 직접 해야 했다.

셀베이아는 오래된 기록장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날짜별로 정리했다.

정신없이 정리에 몰두할 때였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볕이 노르스름하게 변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저녁이네.”

기지개를 힘껏 켠 후 의자를 집어넣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가 창문 밖에 걸려 있는 노을에 눈이 붙들렸다.

지평선과 몸을 겹치는 태양을 바라봤다. 대령님이 좋아하는 풍경이네.

시선이 텅 빈 책상으로 옮겨졌다.

“언제쯤 돌아오실 건가요.”

책상의 주인을 그리워할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찾아왔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누님.”

가하란이었다. 손에는 대령님이 좋아하던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자료들 상태는 어때요?”

식탁에 앉자마자 가하란이 물었다.

“훼손된 게 많아. 건질 수 있는 건 건져서 이쪽으로 옮겼는데, 이제부터 정리해 봐야지.”

“저도 도울게요.”

“됐네요. 너 바쁜 거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까.”

차를 내려 가하란에게 주며 얼굴을 바라봤다.

성숙해진 모습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2개월 전.

가하란과 만났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이가 훌쩍 커서 눈앞에 나타났을 때, 셀베이아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감정이 한순간 터져 나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기어이 정신을 차리고 처음 내뱉은 말은 이거였다.

“밥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현장 상황은 좀 어때?”

가하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둔 한복판에 생긴 거대한 분지.

그 안에서 수많은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총책임자가 가하란이었다.

“지대를 높이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이 상태로 환경을 조성해서 예전처럼 거리를 만들어 봐야죠.”

“갈 길이 머네.”

“시작하면 금방이에요.”

셀베이아는 가하란의 손을 바라봤다.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여기선 편하게 있어.”

“아, 습관이 돼서요.”

가하란이 장갑을 벗었다. 자글자글한 피부가 드러났다. 이 아이가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길을 헤쳐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아, 내가 저번에 말했었나?”

셀베이아는 시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지만, 그런 걸 가하란에게 해주고 싶었다.

가하란은 이야기를 들으며 환하게 웃었다.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그건 아니에요, 라며 선을 긋기도 했다.

“슬슬 올 때가 됐네요.”

“뭐가?”

가하란이 문밖을 가리켰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나가보면 안다고 말했다.

셀베이아는 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건 아주 작은 거병이었다. 가하란이 만들었다는 초소형 거병.

-안녕하세요.

“아, 어. 안녕?”

-닥입니다.

일단 안으로 초대했다.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예요.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 기꺼이 돕겠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가하란이 설명했다.

셀베이아는 작은 거병을 바라봤다.

“도와준다면야 정말 고맙지만, 재미없을 텐데. 일기 같은 걸 정리해야 하거든.”

-바라라의 기록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 즐거워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다. 가하란이 만든 기계라면 대령님의 기록에 접근해도 문제가 없고.

“그럼 부탁할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닥이 식탁으로 가 자신의 손을 식탁보로 쓱쓱 닦은 후 되돌아와 손을 붙잡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셀베이아는 살짝 웃으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예의가 바른 친구네?”

“그래서 닥을 탐내는 분들이 많죠.”

“그런 애를 내 곁에 둬도 되는 거야?”

“그럼요.”

가하란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더니 일어섰다.

“이만 가볼게요.”

“저녁 먹고 가지.”

“오늘은 같이 먹어야 할 친구가 있거든요.”

누군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셀베이아는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잠깐만.”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살점이 크게 붙어 있는 뼈도 하나 준비했다.

“여기.”

“고맙습니다.”

가하란이 바구니를 받고 떠났다.

셀베이아는 멀어져 가는 가하란을 지켜보다가 옆을 내려다봤다.

-전 밥 안 먹어도 됩니다.

닥이 말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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