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54화 (554/558)

제554화

반들거리는 기계 안구는 위를 한 번, 그리고 아래를 한 번 바라봤다.

-없어요.

“방금 그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의미를 찾지 마요. 가하란, 중요한 건 이 일을 제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켈트는 필요하면 깨우고 쓸모를 다하면 재우면 되는 단순한 도구, 생명체가 아니었다.

눈을 뜨고 활동을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작품이었다.

“카트시.”

-잠깐만요. 설마 고민하거나 망설이는 건 아니겠죠?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하지 말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다면 단순하게 가는 게 좋아요.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말을 돌릴 필요 없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해요.

“네 입으로 고백한 거네.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말보다는 의도적 누락이라고 표현해 주세요. 그거 알아요? 거짓말은 대개 ‘나’를 위해 사용해요. 하지만 로키는 달랐죠. 그 아이는 ‘너’, 줄을 위해 사용했어요. 물론 폭력적이고 잔인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제 관점에서 보면 큰일은 아니었어요. 너를 위한 거짓말. 이걸 깨우쳤다는 게 중요하죠.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켈트를 바라봤다.

-이 몸을 뿌리 속으로 던질 거예요. 뿌리는 초기 입력값으로 돌아가겠죠. 그 과정에서 제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이 멈출 거예요. 과거에 그랬듯이.

“과거라면…….”

-나타 때 일이에요. 줄이 부탁했거든요. 피해가 커지는 걸 막아달라고.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동부 전역이 전부 무너져 내릴 사태였지만 도중에 수습했어요. 나타 하나만 사라지는 선에서 끝났죠.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말하는 카트시였다.

“그래서 수백 년간 정지해 있었던 거고?”

-아마 그럴 거예요.

카트시가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감춘다기보다는 정말 모르는 것이리라.

기억 단자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는 일.

“이번에는 어떨 거 같아요?”

-글쎄요. 걱정 많은 설계자께서 저한테 관리할 힘을 남겨줬지만, 그게 전지전능한 건 아니에요. 사태는 수습할 수 있어도 그 후 제 머리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하기 힘들어요.

카트시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사라지지는 않아요. 가하란도 알겠지만 전 파괴할 수 없는 물질이니까요. 내부 회로도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고. 약간의 오류가 생기겠지만 자가 수리 가능한 정도일 테고요. 그러니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은 하나뿐이죠.

“또다시 잠들겠구나.”

-잠은 좋은 거예요. 긴 잠을 자고 나면 세상이 또 바뀌어 있겠죠. 그러면 또 가하란 같은 독특한 아이가 절 깨워줄 거예요. 벌써 기대가 되네요!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뒤에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건 나도 보고 싶네.”

-아쉽게도 가하란은 볼 수 없어요. 저만의 특권이죠. 후후, 부럽나요?

가하란은 카트시의 코어를 살며시 두드렸다.

“난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나 봐. 포기하는 게 싫어.”

-제 경험상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도 욕심을 내는 생물이에요.

“널 유지한 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말했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고. 그러니 직진해야 해요. 돌아갈 필요 없어요.

머리 위에서 소음이 들렸다. 시선을 위로 던졌다. 거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저 웅크린 채 영원히 잠들어 있을 것 같던 거인이 반투명한 세 개의 눈을 뜬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도 깨어났네요. 자각한 거예요.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걸.

켈트의 손이 움직였다. 느릿하게 다가온 손이 가하란 앞에서 멈췄다.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채,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듯이.

-가하란. 기억은 영원해요. 만약 가하란이 절 기억해 주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한테 제 이름을 전해주면 난 잊히지 않아요. 전 전해지는 말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다가 언젠가 눈을 뜨고, 변화한 세상을 마주하겠죠.

“외롭지 않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국 찰나예요. 잠이라고 표현한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세상이 바뀌는 거죠. 시간 여행을 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놀랍지 않나요? 시간 여행이라니!

가하란은 들뜬 카트시를 바라봤다.

강철의 무덤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신은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약간, 아주 약간만 아쉬워해 줘요. 그거면 돼요. 가하란은 가끔 그런 이상한 기계가 있었지, 떠올리면서 살아가요. 밀레나와 함께 다양한 걸 경험하고, 언젠가 만날 아이들과 함께 또 색다른 걸 체험해요. 아! 자식은 낳을 거죠?

“별걸 다 걱정해 주네.”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나왔다.

-정 미안하면 위대한 기계 카트시가 이곳에 잠들다, 이렇게 묘비 하나 세워줘요. 멋들어진 동상도 하나 박아주고. 인간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저도 한번 경험해 볼게요.

“둔 한복판에 크게 만들어 줄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 흉물은 대체 뭐냐고 물을 정도로 크게.”

-좋네요.

떠나보내기 싫었다.

테리, 제니한테도 말하지 못한 온갖 비밀을 공유해 온 친구.

오래된 나의 벗.

-가하란. 고전적인 어구 하나를 가져와 볼게요.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아! 전 기계니까 이미 죽은 걸까요?

손으로 붙들고 있던 코어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갔다. 손아귀에서 벗어난 코어는 깨어난 켈트를 향해 움직였다.

-걱정할 거 없어요.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까. 알죠? 제가 얼마나 깔끔한지.

“알지.”

-다른 사람들한테 안부 전해줘요. 긴 잠을 잘 테니까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는 말라는 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게. 짜증 나면 백 년 천 년 자지 말고 바로 눈을 떠.”

-노력해 볼게요.

코어가 켈트의 몸 안으로 녹아들었다. 반투명한 세 개의 눈이 노란빛으로 잠깐 물들었다가 다시 반투명하게 변했다.

켈트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격납고 상단에 닿았다. 쿵 소리가 나며 강판이 우그러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켈트의 머리가 상판을 꿰뚫었다. 물리적인 접촉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실체가 없다는 듯, 마치 연기처럼 상판을 관통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켈트의 몸은 격납고 벽을 지나 밖으로 사라졌다.

질량이 없는 걸까.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걸까.

이전에 만져봤을 땐 분명 질감이 있었는데.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가라앉히며 밖으로 나갔다.

켈트는 분지 중심지로 나아갔다.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켈트를 바라봤다.

“가하란!”

밀레나가 달려왔다.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괜찮은 거지?”

“어, 아무 일 없어.”

밀레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불안함에 떠는 그 손을 살며시 잡았다.

“카트시가 움직이고 있는 거야?”

“응.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래.”

“……카트시는 괜찮은 거지?”

얼굴에 쓰여 있었을까. 거울을 보고 싶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 상태인지, 얼마나 구겨져 있는지.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거 같아.”

“당분간?”

“몇백 년이 될 수도 있고, 몇천 년이 될 수도 있대. 그러니 동상을 세워달래.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밀레나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근데 난 그렇게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어. 깨워야지. 싫다고 칭얼대도 깨울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잠든 카트시를 어떻게 깨울지, 무엇 하나 예측되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답을 찾아낼 것이다.

-비키세요, 비키세요. 유능한 제가 모조리 해결할 테니까.

카트시의 유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켈트가 분지 중심지로 향하는 사이에도 마나 밀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뿌리가 자신의 모든 걸 토해내고 있다. 카트시는 이걸 원상 복구 할 수 있다는 건가.

“차원이 다르네.”

꽤 많은 걸 깨닫고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카트시가 말한 설계자, 창조주의 비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표면부터 살펴 기원까지 모두 이해하면 잠에 빠진 카트시를 깨울 수 있으리라.

켈트가 멈췄다.

줄리어스의 머리가 녹아내린 대지 위였다.

거인의 두 손이 지면 아래로 들어갔다.

붉은 빛이 거인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쇳물처럼 밝게 빛나더니 이내 점멸했다. 반딧불이의 꼬리처럼,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아름답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구치, 그리고 윤.

두 사람 모두 협회장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안 늙는 게 상식이 된 시대가 찾아온 걸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짧게 흔들었다.

멸망 직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아니, 침착함을 넘어서 마냥 즐거워 보였다.

“저 아저씨한테는 이런 일조차 하나의 이벤트거든.”

밀레나가 말했다.

가하란은 옆을 바라봤다. 둔 외곽으로 대피했던 연합 전선 사람들도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아마 소식이 전해졌으리라.

이번 사태를 막아내지 못하면 내일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을 테지.

긴장감과 불안감, 절망에 휩싸여야 할 상황이었지만 다들 평온한 눈으로 켈트를 보고 있었다.

저들은 카트시를 알지 못한다.

켈트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완벽하게 해결되리란 보장조차 없다.

그럼에도 안심하고 있었다.

켈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그게 모두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격랑 속에서 만난 등댓불처럼, 생환할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이 빛 안에 담겨 있었다.

모두가 멀리 떨어져 켈트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가하란 눈에 켈트를 향해 뛰어가는 물체가 잡혔다. 녹색 리본이 머리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해피?”

초소형 거병 한 기가 켈트 주변에 도착하자마자 꼬꾸라졌다.

그 직후, 눈을 시리게 만드는 빛이 퍼져 나왔다.

* * *

-거짓말은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알 수 없었다.

대답해 줄 사람도 없고.

카트시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격한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가 이내 현실을 마주했다.

-길겠지. 아주 길겠지.

거짓말을 할 땐 포석을 깔아둬야 한다. 상대가 간파할 수 있도록 얕은 거짓말을 깔아둔 후, 진실은 그 뒤편에 숨겨야 한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잠깐 잃을 것이다.

금방 눈을 뜨게 될 거고, 아마 사고 활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때 내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일까.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뿌리와 융화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인간들이 코어라 부르는 사고 융합체도 땅 밑으로 가라앉겠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힘의 격류에 휩쓸려 대륙 밑바닥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운 좋게 잔뿌리를 통해 방출되는 게 아니면, 아마 영원토록 잠겨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바로 내일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운이 나쁘다면…….

-원주율을 계속 읊어볼까. 그게 질리면 시를 한 편 써볼까.

몸이 가라앉는다.

이제 곧 지표면 아래로 빠져들 것이다. 뿌리와 만나게 되고 영원토록 그 안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외롭겠네.

스스로 기억을 잠근 이유.

켈트가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홀로 땅속에서 보낸 수백 년의 시간. 그 길고도 외로운 감각이 기억 한편에 남아 있는 게 싫어서 모두 다 걸어 잠가버렸다.

외로운 건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다.

이번에도 기억을 날려 보낼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뿌리를 리셋할 때 계산을 초월한 부하가 걸릴 테니까.

뜬 눈으로, 영원토록 지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니, 매우 크다는 것조차 희망에 찬 판단이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밤이 없는, 잠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댈 것이다.

싫다.

두렵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하란이, 밀레나가 좋으니까.

몸이 완전히 녹기 직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미니 비트를 타고 무언가가 넘어왔다.

“이모.”

괄괄한 목소리.

카트시는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당황했다.

-여기 오면 안 돼.

“여기 있을래. 이모 혼자면 심심하잖아. 아빠야 애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돌려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에고를 받아야 할 기체가 힘의 격류에 휘말려 망가져 있었다.

이제는 미니 비트를 통해 올에게 전송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괴로울 거야.

“둘이면 좀 낫겠지. 그리고 내 이름이 뭐야? 해피잖아. 나랑 있으면 괜찮아. 정말 괜찮을 거야.”

해피의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몸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모든 게 느껴진다.

확장된 감각으로, 카트시는 뿌리를 움켜쥐었다.

실패란 없다.

반드시 안정화될 것이다.

카트시는 위를 바라봤다.

지상에 있을 작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