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3화
체시가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기계의 악의.
“가하란.”
엔엔이 곁으로 다가왔다. 표정이 경직돼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가하란은 지면을 내려다봤다. 착안만이 확인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땅속 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힘 간에 연결이 끊기고 있어요.”
“그게 뭘 의미하는 거죠?”
“제가 보고 있는 뿌리는 측정할 수 없는 힘의 줄기이고, 그 힘의 줄기끼리 인력으로 묶여 있어요. 서로를 강하게 잡아당김으로써 안정 상태에 놓여 있는 거죠.”
부족한 설명일 수도 있으나 엔엔은 이해했을 것이다. 하늘석 부유 장치의 에너지 유도식을 고안했을 때와 비슷한 개념이니까.
“밀어내고 있군요. 방향은요?”
“전방위예요. 어느 한 지점으로 특정할 수 없어요.”
인력이 사라진 힘의 알갱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충돌을 시작할 것이다. 충돌은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생산해 낼 것이고, 생산된 에너지는…….
지면이 흔들렸다. 약한 지진이었다.
“시작되고 있어요.”
체시의 의지가 담긴 힘의 덩어리가 뿌리 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아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점점 반응도가 격하게 활성화될 것이다.
파삭.
바닥에 균열이 생기더니 밑으로 쑥 꺼졌다. 자그마한 균열 사이로 가시화된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라운드 제로.”
엔엔의 입을 비집고 절망스러운 단어가 나왔다.
아니, 그라운드 제로 정도로 끝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는 거대한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로써 행해진 마법이었다.
뿌리를 이용했기에 막대한 힘의 방출이 일어났지만 어디까지나 통제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조금 달랐다.
체시는 그저 파괴만을 원했다.
“전에도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있어요. 힘을 위쪽으로 분산시키는 거죠.”
랜더가 다가왔다. 늘어트린 검으로 지면을 가리켰다.
“정말 가능한가요?”
엔엔이 되물었다. 랜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기를 짜내듯이 지하에 있는 뿌리 일부분을 의도적으로 분출시킨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나 랜더라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해답일지도 모른다.
의도적으로 폭발을 유도해 힘을 상쇄하는 건 전반적으로 쓰이는 공법이니까.
랜더와 엔엔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입을 열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술이 달싹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악의.
다시금 그 말이 머리를 때렸다.
체시는 오래전 나타 왕국을 실험 무대로 삼았다. 뿌리를 자극해 폭발적인 지각 운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나타 왕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됐다.
뿌리를 이용한 파괴 행위를 가장 잘 이해한 기계가 체시일 것이다.
그런 체시가 같은 방법을 또 사용했을까?
그럴 리 없다. 체시는 이미 그라운드 제로라는 선례를 알고 있었다.
대륙 스케일의 파괴 행위가 벌어져도 이 땅 위에 인간은 기어이 살아남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물리적인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는 것 역시 자각하고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비트를 접한 로키가 신경 쓰였다.
로키는 줄리어스를 깨우겠다는 일념으로 일을 진행했다. 창조에 만족하고 소멸했으나 정말 그다음을 생각한 적이 없을까?
줄리어스가 온전한 상태로 부활했다면 돌봐줄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줄을 사랑하는 로키니까.
응당 체시에게 뒷일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키는 필요한 모든 정보를 체시에게 넘겼을 것이고.
줄리어스가 온전하게 부활했다면 체시는 분명 줄리어스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자신의 지능과 능력을 담보 삼아 줄리어스의 안위를 보장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줄리어스는 죽었다.
체시는 지닌바 모든 능력을 사용해 줄리어스가 없는 세상에 끝을 선물하려 했다.
그런 체시가 ‘막아낼 가능성이 있는 재앙’을 선택했을까?
그럴 리 없다.
가하란은 다시금 땅 밑을 훑으며 물었다.
“협회장님. 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셨다는 건…….”
“성도에서 아르드헨을 목적으로 한 테러가 있었지. 당시 몸을 제물 삼아 마나 폭발을 일으킨 자가 있었는데, 그 폭발을 갈무리해 하늘로 올려보냈다.”
인간의 몸으로 그런 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은 집어넣었다. 랜더라면 가능할 테니까.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나요?”
질문의 대답이 랜더가 아닌 밀레나의 입에서 나왔다.
“성도 시민이라면 다 알고 있어. 성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시민 궐기로 시민들이 밀집해 있었거든.”
밀레나의 말에 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하란, 그 일이 뭔가 문제가 되는 거야?”
“그 정도 사건이라면 응당 체시도 알고 있었을 거야. 어쩌면 협회장님의 존재도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뿌리라는 거대한 힘조차 제어할 대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가하란은 균열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마나를 바라봤다.
인력을 잃고 있는 힘의 알갱이.
의도적인 힘의 분출.
“폭발이 아니에요. 단순하게 힘을 분사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깨달았다. 체시가 무엇을 하려는지.
“지금 뿌리를 건드려 에너지를 분출시키면 안 됩니다. 그건 체시의 목적을 앞당기는 일이 될 테니까요.”
가하란은 바닥을 가리켰다.
“한순간의 폭발이 목적이 아닙니다. 체시는, 뿌리 자체의 소멸을 바라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폭발이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그라운드 제로가 대륙 전체에 남긴 균열. 그곳을 통해 뿌리의 에너지가 분사될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요람이자 무덤, 탄생과 끝.
뿌리 자체가 소멸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뿌리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그간 이용해 왔던 마나 자체가 사라지겠죠. 아니, 그 정도 선에서 끝나면 다행이에요. 어찌 됐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겠죠. 마나는 뿌리의 한 형태일 뿐, 뿌리가 사라지게 되면.”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멸망과 관계없다는 듯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보였다.
“모든 게 정지할 거예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가하란은 랜더의 검을 바라봤다.
파괴적인 힘.
모든 걸 짓이길 힘.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도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법을 떠올리려 해도 이해를 벗어난 상황이라 절망만 밀려들었다.
파괴가 아닌 제어가 필요한 때였다.
하지만 뿌리라는 힘의 원류를 어떤 식으로 제어한단 말인가?
무에서 유를, 창조의 문턱을 넘은 로키의 부산물조차 뿌리의 연결성을 끊어낼 뿐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몰아넣을 순 있어도 혼돈을 수습해 질서를 부여하는 건 불가능했다.
-대기 중의 마나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닥의 목소리였다.
조용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 다른 곳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체시가 남긴 악의가 뿌리한테 자유를 부여해 버렸다.
“방법이…….”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미지의 힘인 외력도, 산오투가 부여한 백염도 뿌리 앞에서는 초라해질 뿐이었다.
랜더의 검이라면 뿌리마저 갈라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랜더는 세상에 홀로 살아남은 고독한 인간이 될 것이다.
“대륙 규모의 공핍 영역.”
엔엔이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뿌리라는 에너지가 메말라 사라질 때까지 꺼지지 않는 디졸브 필드.
수백 가지 방법을 검토하던 머리가 한순간 멈췄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없다. 그 무엇으로도 이 현상을 해결할 수 없었다. 설령 드래곤이라 한들 도움이 될까?
윈테, 인지를 초월한 존재.
하지만 그 역시도 세상에 귀속돼 있었다. 세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뿌리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아니.
애초에 그는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 때도 용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세계의 종말도 그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존재들이, 현상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해결해야 했다.
방법, 방법, 방법.
신이 창조해 낸 힘의 근원을 다스리고 본래 상태로 돌려보낼 방법.
-스스로 기억을 걸어 잠근 이유가 무엇일까, 계속 궁금하긴 했어요.
가하란은 고개를 틀어 통신기를 바라봤다.
이 목소리는.
-가하란. 저 좀 꺼내줄래요? 위치는 보일 거예요. 그 눈이라면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겠죠.
붕괴한 학회 건물터에서 주황색 빛이 솟구쳤다. 하늘을 꿰뚫듯이 일직선으로 뽑혀 나온 주황색 선.
“카트시!”
건물터로 달려갔다. 건물 잔해를 치워낼 때였다.
묵직한 구동음과 함께 거대한 손이 잔해를 들어 올렸다. 블루아이의 손이었다.
-이 아래 카트시가 있는 거지?
가하란은 턱을 가볍게 당겼다.
-기다려.
블루아이가 커다란 잔해를 들어 올리고 갤리온이 자잘한 것들을 치워냈다.
주황색 빛을 따라 밑으로 파고 내려갈 때였다.
-햇빛이 좋네요.
여유 가득한 카트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틈새 사이로 외력을 밀어 넣어 카트시를 끌어 올렸다.
-기다리면 찾아주겠지, 기다리면 찾겠지. 근데 안 찾아서 어쩔 수 없이 먼저 말을 걸었잖아요. 섭섭하게.
절박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왔다.
“카트시.”
-알아요. 어떤 상황인지 전부 이해했어요. 이해 못 할 수가 없죠. 사방에 길 잃은 마나가 보이는데.
“방법이 있는 거야?”
-있죠. 너무나도 간단한 거니까 가하란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자신감이 가득 묻어 나왔다.
정말로 방법이 있는 걸까?
-기억을 잠가둔 이유. 제 몸이 존재하는 이유. 이제는 알아요.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거야?”
-네. 걱정 많고 소심한 설계자께서 보험을 들어둔 거였어요.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 당신의 손으로 빚어낸 것들이 엉뚱하게 작동할 때, 그걸 원 상태로 돌리기 위해 절 만들어 놓은 거죠.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위쪽을 바라봤다. 내려다보고 있는 랜더가 있었다.
-저분이군요. 설계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기다리던 사람?”
-벗어난 자. 언젠가 또 생겨나겠지만, 지금 당장은 유일해요. 완벽한 설계 도면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간.
카트시가 가하란을 바라봤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절 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요. 하늘석은 근처에 있겠죠?
“바로 앞에 있어.”
-좋네요. 얼른 끝내요. 이런 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금방 고칠 수 있어요.
“정말이야?”
-그럼요.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자자, 서둘러요. 문제가 복잡해지기 전에.
카트시를 안고 하늘석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이 뒤따라왔으나 중간에 돌려보냈다. 카트시의 부탁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착안이 없는 다른 사람은 휩쓸릴 수 있고, 랜더란 인간은 반대로 간섭이 일어나 일이 꼬일 수 있어요.
통제실 지하로 내려갔다.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켈트가 보였다.
-집어넣어 줘요. 그거면 가하란이 할 일은 끝나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무런 의심 없이 카트시의 코어를 켈트의 몸 가까이 들이밀 때였다.
“카트시.”
-네?
“정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럼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에요. 리셋하면 끝이에요.
“리셋?”
-노이즈가 생기면 초기화시키는 게 가장 간단하죠. 인간의 심장도 비슷해요. 정상 리듬을 잃었을 때 약간의 충격을 줘 원래 상태로 돌리는 거죠. 물론 그 충격이란 게 아주 정교한 작업이지만.
정교한 작업이란 단어가 손을 붙들었다.
“내가 도울 건?”
-없어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기다려요.
“카트시.”
가하란은 카트시의 기계 안구를 들여다봤다.
“그 간단한 일이 너한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말해줄 수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