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52화 (552/558)

제552화

정적이 찾아왔다.

중첩과 분열을 거듭하며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던 힘의 파동이 사라졌다.

해결된 것일까?

가하란은 지면을 내려다봤다. 옆에 선 랜더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밑에 있어요!”

끝난 게 아니었다.

랜더가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착안이 심하게 요동쳤다. 검 끝이 향하는 곳에 그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지금 베도록 내버려 둬야 할까?

경직된 머리와 달리 손은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가하란은 오른손으로 랜더의 검 앞을 막았다.

“잠시만요.”

랜더는 질문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내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꿈을 꾼 거 같은데.”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둠을 집어삼켰던 거대한 위상이 완전히 사라지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유토니아, 사람들을 대피시켜. 최대한 멀리.”

E30과 갤리온이 둔의 중심부를 향해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놀라지 마시고 저희를 따라 움직여 주세요.

-이쪽에도 사람이 있어요.

-이봐요! 도망치지 마시고 이쪽으로!

질서 정연한 대피는 힘들어 보였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설명하고 피난을 유도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강압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사람들을 학회 건물에서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뭐야, 이거!”

“관리부는 뭐 하는 거야! 이 기계들은 뭐고?”

“살려주세요!”

이곳은 둔 중심지.

모인 인구만 해도 3만이 넘을 것이다.

이제 막 심상 세계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몇몇은 무기를 들고 E30과 대치했다.

-위험 상황입니다. 신속히 대피해 주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대피해 주세요.

“가져가야 할 게 있어. 지하에 금고가 있다고.”

통제가 안 된다.

땅속에서 꿈틀대는 잔여 힘도 신경 써야 하고, 사람들 대피도 생각해야 했다.

우선 주변 사람들만이라도 대피시키고 외곽 쪽은 올에게 맡기는 편이…….

매의 날카로운 울음이 생각의 가지를 쳐냈다.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매 한 마리가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원을 그리며 고도를 천천히 낮추는데,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한쪽 날개가 20m는 넘어 보인다.

제왕의 위용을 갖춘 매가 세차게 울며 둔 중심지 위를 날아다녔다.

사람들의 이목이 하늘로 쏠렸다.

“여러분, 학회 건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세요. 꽃이 여러분을 인도할 테니 놀라지 말고요.”

하늘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였다.

흥분하던 사람들도, 기계를 적대시하던 사람들도, 갈피를 못 잡던 사람들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하란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자그마한 꽃이 피어 있었다.

꽃들은 둔 외곽을 향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술사님이야.”

“정말 위험한 건가?”

“페일, 로일! 엄마 손 잡고 따라와야 해. 알겠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난 수만 송이의 꽃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학회 건물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쥐와 고양이마저 꽃을 따라 외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적막이 가득 찬 중심지로 큰 매가 내려앉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매 목덜미에 올라타 있었다.

주술사라 불린 인물.

가하란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본 미래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주 나쁘진 않네.”

주술사가 다가왔다. 얼굴을 둘러싼 붕대 사이로 눈이 보였다. 어릴 때 봤던 초록색 눈동자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모험은 잘 즐겼니?”

주술사와 처음 만났을 때, 주술사는 이렇게 말했다. 넌 바라던 대로 모험을 하게 될 거라고.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모험은 모험이었어요.”

“로안도 널 지켜보고 있었을 거야.”

주술사가 몸을 돌려 랜더를 바라봤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미래와 함께하는군요. 어때요? 이번 일도 해결할 수 있겠어요?”

“저 친구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이걸 쓸 것이고, 이걸로 안 되는 일이라면 기도를 올려야겠죠.”

랜더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오크족 주술사와 운명을 되찾아 온 총수. 신비롭고 위대한 조합에 흥분되는 것도 사실이나,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그쪽이 아니었다.

가하란은 무릎을 꿇고 양손을 지면에 댄 후 바닥을 살폈다.

체시는 분명 반으로 잘렸다. 잘린 회색 덩어리는 체시의 본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체시는 기계이다. 완벽한 복사품이 아닌 어떤 목적을 위한 복제품 정도는 순식간에 만들어냈을 터였다.

땅 밑.

랜더가 갈라버린, 한때는 줄의 머리였던 힘의 덩어리가 여전히 약동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착안을 최대한 열었다.

지표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점으로 변했다. 이제 보이는 건 힘과 힘의 관계일 뿐이었다.

착안이 지층 아래를 잡아냈다.

힘을 측정하기 어려운 거대한 점 밑으로, 힘의 줄기가 보였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어디까지 뻗어 나갔는지 알 수 없는 힘의 근원.

뿌리였다.

압도되고 말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비트마저 기원을 뿌리에 두고 있었다.

정보의 탄생처.

“아.”

이해하게 됐다. 왜 뇌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움직여 랜더의 검을 막았는지.

단단하게 결속돼 있었다.

랜더의 개입으로 위상 중첩이 깨지던 그 찰나에 체시는 자신의 목적을 이뤄냈다.

줄리어스의 머리, 유단이 집념으로 빚어낸 힘의 덩어리가 뿌리와 얽혀 있었다.

관계성을 더욱 면밀하게 파악해야 했다.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을 늘렸다.

수십 개의 인두가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통증이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지면에 긁히며 부러져 나가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확인해야 해.

점들의 변화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눈에서 시작되던 압통이 조금은 가셨다.

주술사님의 힘인가?

움켜쥐었던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한숨 돌리며 힘의 진행 방향을 살필 때였다.

오른손 위로 다른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착안을 모두 열어둔 상태라 형태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누나, 여긴 위험해.”

“그러니까 더더욱 있어야지.”

떨어지라고 설득할 힘도 없고,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괜스레 미소 지으며 힘의 덩어리를 바라봤다.

결손 영역이 있는지, 절단할 방법이 있는지 몇 번이고 살펴본 후 착안을 풀었다.

뿌연 시야에 밀레나의 얼굴이 잡혔다. 눈빛을 교환한 후 랜더를 바라봤다.

“뿌리와 얽혀 버렸어요.”

“이대로 베어내는 건?”

“안 돼요. 완전히 동화된 상태라 건드리는 순간 뿌리 전체가 반응할 거예요.”

랜더가 눈을 반개하며 땅을 바라봤다.

“내가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밑에 있는 뿌리가 아주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알 수 있다. 내버려 두면 문제가 더 커질 테지.”

랜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건 단순한 힘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체시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힘의 줄기를 차단한 후에 제거해야 해요.”

말은 쉽게 나왔다. 하지만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았다.

“설비를 옮겨야 해요. 차폐 장비가 그쪽에 다 있어요.”

“트럭보다 블루아이로 옮기는 게 더 빠를 거야.”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가 움직였다. 멀어져 가는 밀레나를 보며 통신으로 상황을 전파했다.

-알겠어요. 필요한 물자를 준비해 두고 저도 그쪽으로 갈게요.

가하란은 드라이버를 손에 쥐었다. 한쪽 착안을 연 후 힘의 크기를 확인하며 드라이버로 바닥에 선을 그었다.

“땅을 들어내야 해요.”

힘의 덩어리는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았다. 일반적인 건설 장비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였다.

하지만 랜더의 힘이라면…….

랜더가 사각형으로 그어진 선을 바라봤다.

“느껴지긴 하지만 정확히는 볼 수 없었는데, 그 눈은 다르구나.”

검을 땅에 꽂고 선을 따라 움직이는 랜더였다.

“일직선으로 파고 내려가면 장비가 들어오기 힘들 테니 조금 넓게 파마.”

랜더가 뒤를 돌아봤다. 가하란도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서 블루아이와 트럭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잠깐 멈추라고 해주겠니?”

“아, 예.”

통신으로 말을 전했다. 접근하던 사람들이 멈췄다.

그 순간 랜더가 손을 움직였다.

지면이 떨린다. 가하란은 고개를 숙였다.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품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의지가 뿌리와 밀접한 마나를 건드리고 있었다.

경이롭다는 생각과 함께 쿠우웅, 굉음이 나면서 지면이 내려앉았다.

온몸이 흔들렸다.

가하란은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았다. 같이 있던 주술사는 매를 타고 하늘로 올라섰다.

“섬세함이 부족한 건 이해해 줬으면 한다. 이런 식으로 사용해 본 건 처음이라.”

온몸을 강타한 진동을 끝으로 적막이 찾아들었다. 가하란은 솟구친 먼지를 손바람으로 날려 보내며 주변을 살폈다.

하늘이 멀어졌다.

우측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파된 건물들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위로 솟구친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둔 중심부에 거대한 분지가 생성됐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저기.”

랜더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향한 곳에 막으로 둘러싸인 빛무리가 보였다.

가시화된 마나가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 땅이 지글지글 끓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뿌리와 연결된 힘의 덩어리.

랜더가 가까이 다가갔다. 밝은 노란색으로 끓고 있는 땅을 밟으며 힘의 덩어리 앞에 도착했다.

한동안 살펴보던 랜더가 돌아왔다.

“네 말대로 지금 저걸 잘라내면 여기뿐만 아니라 내가 손쓸 수 없는 곳에서도 뿌리가 돌출될 것 같구나.”

“의지가 담겨 있는 힘입니다. 저걸 차폐한 후 안전하게 제거하면 해결될 거예요.”

엔엔과 함께 설비가 도착했다. 모노클을 낀 엔엔이 힘의 덩어리를 살피며 말했다.

“하늘석 심부 자재라면 차폐 벽으로 쓸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에너지 유도체는 전송탑 모듈을 사용할 거고요.”

“디졸브 필드를 축소해서 펼쳐놓으면 작업하기 용이할 거예요.”

손발을 맞춰온 엔엔이기에 견적은 금방 나왔다.

난해한 작업이나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었다. 장비를 갖춘 후 접근했다.

강렬한 마나 파장에 E30은 접근조차 할 수 없어 갤리온으로 자재를 운반했다.

외력을 두르고 마나를 차단하는 특수 방호복까지 착용했는데도 마나 간섭이 일어났다.

뿌리가 아닌 뿌리와 동화된 일부조차 이런 에너지를 내는 건가.

힘의 덩어리 주변에 강판을 덧댄 후 하단부를 살폈다.

육안으로 보면 희뿌연 빛일 뿐이지만, 착안으로 살피면 정밀하게 이어진 힘의 줄기가 보였다.

마력선 회로를 구성하듯 레이어를 나누어 단계별로 접근하면…….

해답이 선명하게 보일 때였다.

-기계가 품은 악의란 대체 어떤 걸까?

비웃는 듯한 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힘의 덩어리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폭발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뿌리를 바라봤다.

완벽한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던 힘의 알갱이들이 서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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