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51화 (551/558)

제551화

천년 고목의 나뭇가지처럼 사방을 점유한 기계 팔을 바라봤다. 하나하나가 자아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의족에 체중을 살짝 실었다. 기계 팔에 달린 손가락들이 공격 태세를 갖춘 뱀처럼 의족을 향했다.

-네가 지닌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난 알고 있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협이 될 정도야.

체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움직였다.

기계 팔들이 촤라락 소리를 내며 동시에 움직였다. 백염을 두른 팔로 우측 하단에 있는 기계 팔을 뽑아냈다.

콰득!

땅에서 뽑혀 나온 기계 팔이 순식간에 쇳물이 됐다. 쇳물은 생명을 지닌 것처럼 꿈틀거리며 공격해 들어왔다.

-쉽지는 않을 거야. 아직 로키가 불러들인 영혼 세계가 남아 있으니까.

쿠웅!

수십 개의 기계 팔이 한데 뭉쳐 거대한 채찍이 됐다.

의족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 파장이 몸을 뒤로 밀어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기계 팔이었다.

“로키가 불러들인 위상이라면 곧 사라지게 되겠지.”

-네 말대로 여긴 이제 불안정한 공간이 됐어. 아니지, 애초에 중첩된 상태라 온전치 못했어. 봐봐! 지금도 엉뚱한 일들이 생기고 있잖아?

가하란은 왼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체시가 조종하는 팔을 피해 누워 있는 줄리어스에게 접근 중이었다.

그 너머에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거울 가운데에 놓인 기분이었다. 무수히 많은 내가 양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전혀 다른 동작으로 체시의 기계 팔을 피하고 파괴하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이건…….”

-영혼 세계를 인간들이 뭐라 정의하는지 알고 있겠지?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기억. 가하란은 얼굴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계 팔을 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게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야. 모든 가능성을 내포했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지.

줄리어스 주변에 반구형 코어가 생겨났다. 코어에 달린 시각 장치가 좌우를 번갈아 봤다.

-지금 난 256개의 날 보고 있어. 더 보고 싶지만 의미가 없어 보여서 일단 멈췄어. 256개의 나는 256개의 널 상대 중인데, 그중 128개는 결과가 나왔어.

파앙!

기계 팔을 뜯어내며 줄리어스를 향해 달려갔다. 빈틈을 찾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기계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눈이 먼저 반응하고 외력이 뒤따랐다. 공중에서 붙들린 팔이 우득 뒤틀리며 땅에 떨어졌다.

외력을 다루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정확한 사용법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너를 이길 수 없어. 널 죽이고 싶은데 방법이 보이지 않아. 이미 결정된 미래라는 거겠지? 하지만 결승점이 같다고 해도 결승점까지 도달하는 길목은 셀 수 없이 많아.

촤아악!

하늘과 땅이 갈리며 수천 개의 기계 팔이 내려왔다. 팔들이 서로 촘촘하게 엮이며 거대한 벽이 됐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줄이 곧 깨어날 거야.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던 또 다른 가하란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기억.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미 힌트는 얻었다. 날개 달린 마차를 끌고 다니던 아이.

하늘에 맞닿을 것처럼 솟구친 벽을 향해 손을 펼친 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하란을 덮고, 체시가 생성한 벽을 덮고, 이내 하늘을 덮은 거대한 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거병의 손이 체시가 생성한 벽을 움켜쥐었다.

기계 팔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거병의 손이 뒤로 빠졌다.

후우우웅!

몸을 짓이길 듯한 강풍과 함께 거병의 손이 사라졌다. 뜯겨 나간 벽 너머로 체시와 줄리어스가 보였다.

줄리어스는…… 눈을 뜬 채 체시의 코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키는 줄리어스를 깨우고 사라졌다. 눈을 뜨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하지만 체시가 무엇을 바라는지, 가하란은 아직 알지 못했다.

-줄리어스.

체시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줄리어스를 불렀다. 줄리어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체시를 바라보더니, 길게 하품했다.

“체시구나. 그런데 블루베리는 어디 갔어? 분명 내가 안고 잤는데.”

-블루베리는 이제 없어.

“그래?”

가하란은 눈을 찡그렸다.

정말 인간을 창조한 건가?

만약 되살아난 게 맞는다면, 줄리어스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현시대의 인류에게 호의적일까? 아니면 체시의 요구에 따라…….

“안 돼!”

평온해 보이던 줄리어스가 갑자기 몸서리를 치며 팔을 휘둘렀다. 근처에 있던 기계 팔에 스치며 팔뚝에 긴 상처가 생겼다.

불안정한 상태다.

가하란은 체시에게 접근했다. 기계 팔이 땅을 뚫고 솟구쳤으나, 개체 수가 확연히 줄었다.

외력으로 접근하는 팔을 고정하고 단숨에 체시의 코어를 붙잡았다.

-그래. 꼭 이런 결말이더라.

체시의 목소리는 기쁨과 슬픔, 그 중간을 헤매고 있었다.

기계한테도 심상 세계가 존재하는지, 어떻게 구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체시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손에 힘을 줬다. 코어는 기계 팔과 달리 실체가 있는지 녹아들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아아, 어머니. 로키는 결국 실패한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지켜봤기에 나는 알 수 있어요. 당신의 머릿속은 지금 지옥이겠죠.

파앙!

코어가 터져나갔다. 충격파를 몸으로 받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회색 덩어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게 체시임을 보는 순간 알게 되었다.

-가하란, 상상해 봐! 한 인간이 겪어온 모든 인생이 한순간 머릿속으로 주입되는 거야. 시간적 구분 없이,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어머니는 위대한 공학자지만 결국 인과의 덩어리야. 그녀한테는 순서가 필요해. 하지만 지금 그녀 머릿속에는 순서가 없어. 그저 모든 게 동시에 존재할 뿐이지.

가하란은 줄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땅을 보고 있었다. 총명해 보이던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물든 정도가 아니라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너는 왜 있어? 아니야, 이건 어제야. 오늘인가? 몇 시지? 왜 그러는 건데? 죽이지 마! 카트시, 참 재미있지? 크랜베리! 내가 소파에…… 아아! 드디어 개발했어. 아니야, 실패했어. 기뻐, 슬퍼. 울지 마! 괜찮아, 괜찮지 않아.”

비명에 가까운 읊조림이 끝난 후 줄리어스가 체시를 바라봤다.

그녀는 애달픈 목소리로 말했다.

“체시. 날 멈춰 줘.”

서걱, 기계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줄리어스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겼다. 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는 동안, 체시의 기계 팔이 줄리어스의 머리를 들었다.

마침내 고통에서 해방됐다는 듯이 줄리어스는 웃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이었다.

-난 말이지, 줄을 질투했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알아. 난 줄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걸. 줄만 남아 있어 준다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줄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게 없어도 만족할 수 있어.

회색 덩어리가 움직였다. 눈을 반쯤 뜬 줄리어스의 머리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꺼냈다.

-실험은 언제나 실패를 생각해야 해. 뒤처리를 고민해야지.

위상 전체가 흔들렸다.

힘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서로 부딪쳐 상쇄되기도 하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 더 커지기도 했다.

혼돈.

착안이 점점 커지는 점들을 잡아냈다. 부피가 커지고 있다. 힘이라는 알갱이 자체가 커진다는 건…….

-줄이 살았으면 정말 좋았을 거야. 하지만 실패했어. 불러들이는 건 성공했지만, 시간 순서에 맞게 정리하는 건 실패했어. 중요한 데이터야. 하지만 이젠 쓸 수 없지. 로키가 사라졌으니까. 줄도 이렇게 됐고.

수십 개의 기계 팔이 줄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촘촘히 싸매 이제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줄을 기다렸어. 줄이 살아가는 세상을 기다렸어. 그런데 이제 줄이 없는 세상이 다시 찾아왔어. 가하란, 말해봐. 난 무엇을 해야 할까?

회색 덩어리가 꾸물거렸다. 가하란 눈에는 비웃음처럼 보였다.

체시는 답을 정해놓은 것이다.

“나타 때 일을 다시 반복하려고?”

-아니! 그건 식상해. 나타 때는 왕국을 지우는 것으로 만족했어. 지각이 뒤틀리고 용암이 솟구치는 것도 볼만했지. 근데 난 두 번째 이별을 맞이했어. 이 슬픔은 너무 처량해. 무기력해질 것 같아. 정말 끔찍한 느낌이야. 그래서…… 너희 전부가 이걸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

푹.

수십 개의 기계 팔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증폭된 힘이 기계 팔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로키가 남겨준 선물이야. 가하란, 그거 알아? 뭐든지 될 수 있는 이 작은 알갱이 말이야, 한 번 더 나뉠 수 있어. 그게 무엇이 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지.

시력을 앗아갈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온몸을 녹일 듯한 열기도 덮쳐왔다.

외력으로 몸을 둘러싼 후 백염을 둘렀다. 마주 오는 빛과 열에 대항하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회색 덩어리를 바라봤다.

-완전히 지워지게 되면, 모든 걸 잊게 되면 오히려 편해질 거야. 정보조차 남지 않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순간 빛과 열이 사라졌다.

하늘을 뒤흔들던 소리가 멈췄다.

세계가, 로키가 만든 위상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질량은 유지한 채 부피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둔 전체를 재료 삼아 무언가가 벌어질 것이다.

아마 마나 폭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파괴가 일어나리라.

가하란은 양손을 움켜쥐었다.

기계 팔을 뜯어냈던 거대한 거병의 손이 다시금 솟구쳤다. 거병의 손이 좁아지는 하늘을 떠받치는 굳건한 기둥이 됐다.

-놀라워. 이게 네 마음이란 거구나.

가하란은 땅속에 틀어박힌 기계 팔을 향해 뛰었다. 저곳이 폭심지가 될 것이다.

폭발의 원료는 줄리어스의 남은 육체일 테고.

체시가 말한 ‘가장 작은 것을 나누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원료를 치워야 한다.

지면을 향해 손을 내리쳤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거병의 팔이 지면을 파헤쳤다.

땅 깊숙한 곳에 박힌 줄리어스의 머리가 보였다. 아니, 이제는 머리라 부를 수 없었다.

착안이 꿈틀댔다.

순수의 힘의 덩어리. 저게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 되면 둔은 끝이었다. 아니, 둔에서 끝나면 다행일 정도였다.

외력으로 줄리어스의 머리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잘 가.

눈앞에 나타난 회색 덩어리가 팽창했다.

턱이 위로 들렸다. 버텨보려 했으나 몸이 튕겨 나갔다. 지면을 한 바퀴 구른 후 의족의 배터리를 사용해 자세를 잡았다.

회색 덩어리가 주먹보다 작아져 있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깨지고 있었다. 위상의 주체였던 로키가 소멸했다. 공간을 붙들고 있었던 정신이 사라졌으니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안 돼.

몸이 계속해서 밀려났다. 거병의 팔도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첩 상태가 깨지고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본류와 지류의 중간.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정신을 잃고 멍하니 앞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털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휩쓸린다.

외력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물처럼 펼쳐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먼 곳으로 밀쳐냈다.

“뭐, 뭐야?”

“루티! 이쪽으로 와!”

“여보! 여보!”

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하란은 최대한 멀리 도망치라고 외쳤다. 물론 무의미한 경고라는 건 알고 있었다.

힘의 덩어리가 분열하고 힘을 토해내면, 모든 게 끝난다.

접근해야 해.

뒤흔들리는 위상의 경계면으로 나아갔다. 경계면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과거가 보이고, 미래가 보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줄리어스가 본 게 이런 거였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너도 왔구나. 불확실한 미래로. 하지만 이제…….

하늘이 완전히 깨져나가고 경계면조차 수축할 때였다.

선이 그어졌다.

하늘을 종단한 선이 수직으로 내려와 체시의 본체인 회색 덩어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두꺼운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하란은 자신의 오른쪽을 바라봤다.

중첩된 위상 자체가 갈려 나갔다.

이런 게 가능한 건…….

“애썼구나.”

쥐고 있던 검을 한 번 툭 털며 랜더가 다가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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