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0화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블루아이군요. 거대 로봇은 역시 남자의…….”
신이 나 떠벌리다가 시선이 느껴져 입을 닫았다. 밀레나가 작게 웃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한번 타보세요. 대신 웨이브 겔 없이.”
“웨이브 겔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호 장비를 단단히 갖추고 탈 겁니다. 제 조잡한 물리학으로도 이걸 맨몸으로 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훤히 보이거든요.”
윤은 순백의 갑주를 바라봤다. 이족 보행 로봇이 실현되는 세계. 검과 마법보다 이쪽에 더 관심이 생긴다.
블루아이 곁을 오가는 작은 로봇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가하란은 괜찮겠죠?”
“괜찮을 겁니다. 안으로 들어갈 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하니까요. 무엇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윤은 갈라진 장막 앞에 서 있는 랜더를 바라봤다. 무엇이 가로막는다고 한들 저 손에 쥐여 있는 검이…….
“아이고, 그새 검이 부서졌나 보네요.”
“검이요?”
밀레나도 랜더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아, 하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어디 갑니까?”
“돌려드려야 할 게 있어요!”
멀어지는 밀레나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깜짝이야.”
윤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둥그스름한 쇳덩이를 들고 있는 로봇이 보였다. 코어라고 했던가? CPU와 비슷한 놈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많이 놀라셨나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어요. 사실…… 좀 놀랐어요. 밖으로 나온 이후 이렇게 놀랄 일만 겪네요. 오랫동안 집에 갇혀 살았거든요.”
-그렇군요.
윤은 작은 로봇을 바라봤다. 이전 ‘계’에 있을 때도 고도화된 AI는 존재했다. 하지만 일반 인공 지능의 문턱에까지 도달했을 뿐, 인간이 선별해 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 영역을 확장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로봇들은 스스로 학습한다고 들었다.
-허락 없이 대화를 듣게 됐어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계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답하기 어렵다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어려울 것까진 없죠. 다른 분들한테는 이것저것 제한이 걸려 있지만 전 자유로운 편이니까요. 네, 멀리서 왔어요. 아주 먼 곳에서.”
-대륙 밖에서 오신 건가요?
“그보다 더 먼 곳.”
작은 로봇이 좌우로 움직였다. 고민하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사람 같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닥입니다.
“신기하네요. 그 어린 친구 손끝에서 이 모든 게 만들어졌다니.”
윤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거병과 다각전차,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설비들.
지금도 긴 팔이 달린 로봇들이 하늘석 안으로 자재를 운반하는 중이었다.
“항공 모함이 따로 없네요.”
-항공 모함이요?
“바다에 띄워놓는 큰 배가 있어요. 안에는 전투기…….”
-전투기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몸이 밑으로 꺼지는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둔을 집어삼킨 돔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표면에 잔물결이 마구 일어나는데 곧 와르르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대화 중이던 작은 로봇이 재빠르게 뛰어갔다. 두 발로 걷는 늑대와 합류해 하늘석으로 이동했다.
윤은 근처에 있는 균열을 바라봤다. 안쪽에서 울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진동이 시작됐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겨우 느낄 정도의 약진. 평상시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현상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길한 징조 같았다.
윤은 구치를 찾아서 움직였다.
“느끼셨죠?”
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고도 다가왔다.
“느낌이 안 좋아요.”
칼리고의 촉이 반응했다. 위험하다는 증거였다.
“떨어져 있죠. 기웃거려 봤자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칼리고가 현장에 모여 있는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설명하자 마법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피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뒤로 물러나죠.”
구치가 윤의 어깨를 툭 친 후 돌아섰다. 윤은 저 멀리 우두커니 서 있는 랜더를 바라봤다.
명백한 적이 있다면 처리하기 쉬울 텐데. 마법적으로 얽힌 문제라 랜더의 힘도 방향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윤은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밀레나가 천으로 감싼 물건을 들고 뛰고 있었다. 형태를 보아하니 검 같았다.
“랜더 씨, 괜찮겠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 친구가 안 괜찮으면 어차피 우리도 곧 안 괜찮아질 테니까.”
“그건 그렇네요.”
랜더와 만난 밀레나를 눈여겨보다가 몸을 돌려 걸음 속도를 높였다.
* * *
“돌려드릴게요.”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랜더의 검을 내밀었다.
“마침 잘됐네요. 쓰던 게 없어져서 난처했는데.”
랜더가 검을 뽑아 들었다.
“사용해 봤나요?”
“써보려 했는데 아무리 쥐어도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원하신다면 더 빌려드릴 수도 있어요.”
“아니요! 저한테 맞는 무기를 찾았으니 이제는 괜찮아요.”
“그렇군요.”
밀레나는 요동치는 반구체를 올려다봤다. 진동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도 알고 싶군요. 가하란이 안쪽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 테니.”
랜더가 반구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베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베고 난 후가 문제죠. 폭발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지만, 반대편으로 분사되는 힘은 어쩔 수 없어요. 무엇보다 안에 있는 분들의 생명을 장담할 수가 없고요.”
십만에 달하는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가. 그 안에는 가하란도 포함돼 있었다.
“그건 안 돼요!”
철부지 같은 소리란 건 알고 있었다. 눈앞의 사태를 방치하면 십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재앙에 가까운 재난을 막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포장한 후 일을 진행할 것이다.
피해는 숫자니까.
도덕보다는 냉철한 계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십만의 목숨 안에 가하란이 포함돼 있었다.
이기적이라 욕먹어도, 어리석다고 비난받아도 가하란은 포기할 수 없었다.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이해하고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러니 마지막까지 기다릴 겁니다. 저는 그 아이의 눈을 믿고 있어요. 영리한 아이니까 해낼 겁니다.”
랜더가 검을 늘어트린 채 반구체를 바라봤다.
“같이 기다려보죠.”
* * *
가하란은 기계 팔을 지나쳤다. 체시는 붙잡거나 경고하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했으니 방해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로키.”
가하란은 무언가를 떠받들 듯 양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멈춰 있는 로키 앞에 섰다.
두 손 사이로 힘이 밀집되고 있었다. 지독하게 불안정한 힘이었다.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지면 걷잡을 수 없는 폭발을 일으키리라.
“과거에 난 한 번 죽었어. 날 파괴할 권리를 찾아 기계였던 날 죽였지.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죽음을 또 경험했어.”
로키가 말했다.
“전부 다 기억하는 거야?”
“아니. 단편적인 정보만 흘러들어 왔어. 왜 나한테 전해진 건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는 지금도 알 수 없어. 하지만 내 기억 안에 너와 함께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건 확실해. 거병을 제작한 것도, 마수를 사냥한 것도, 하늘석에서 용을 만난 것도.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죽은 것도.”
“그 정도면 전부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럴지도.”
눈앞에 의자가 생겨났다. 앉아, 라고 로키가 말했다. 의자를 끌어당긴 후 앉았다.
석고상처럼 굳은 로키는 말을 할 때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 역시 양손에 모여든 빛에 고정돼 있었다.
“지금 네가 만들고 있는 게 줄리어스라 확신할 수 있어?”
가하란은 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정보를 받아 왔어. 한시적 영혼 세계를 통해 이어진 모든 시간의 정보. 육체만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면 그녀는 눈을 뜨게 될 거야.”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게 내 한계인 거지.”
“줄리어스가 깨어나고 난 후에 넌 뭘 할 생각인데?”
그 질문에 로키가 웃었다.
“아직도 모르는구나.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
“잘 생각해 봐. 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들어서 알고 있다고?”
투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로키를 바라봤다. 피부가 죽은 나무껍질처럼 바짝 마르더니, 이내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로키가 제어하고 있는 빛의 알갱이가 로키의 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 몸으론 버틸 수 없어.”
창조의 빛.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알갱이가 발산하는 힘은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없는 것이었다.
“알아.”
로키의 귀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돌입했다.
확정된 죽음이 찾아온다. 로키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게 될 것이다.
“난 이 순간을 위해 노력해 왔을 뿐이야. 사람들은 나에게 ‘다음’을 묻지만,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빛이 응축됐다. 시리도록 밝았다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여길 봐. 날 만들어낸 존재가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어.”
손톱만 한 살점에 눈이 돋아나더니 이내 핏줄이 생겨났다.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뼈가 눈과 살점을 감쌌고, 핏줄에서는 장기가 생성됐다.
태아였다.
로키의 팔이 뚝 떨어져 나갔다. 로키의 몸이 붕괴할수록 아이는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풍성해지고 골격이 커졌다. 손바닥보다 작았던 태아가 유년기를 거쳐 금세 청년에 들어섰다.
로키는 두 다리를 잃었고 한쪽 눈도 사라졌다. 기계 팔이 다가와 무너져 내리는 로키의 몸을 지탱했다.
“옷을.”
로키가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또 다른 기계 팔이 반듯하게 누운 여자에게 옷을 입혔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은 여자.
“닮았지?”
로키가 말했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약간씩 다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와 생김새가 밀레나와 흡사했다.
로키의 하나 남은 눈동자가 바스러졌다.
“다행이야. 얼굴을 봐서.”
남은 한쪽 팔이 떨어지고 몸통마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로키가 누워 있는 줄리어스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동안에도 몸은 계속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키의 입이 줄리어스의 귓가에 도달했을 때 로키의 몸은 남아 있지 않았다.
“줄, 아침이야. 일어나.”
입술이 움직였고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로키의 몸이 완전히 분해돼 사라졌다.
가하란은 그 모습을 보며 오래전 마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키는요! 아침에 줄을 깨우는 걸 가장 좋아해요!
투두둑.
입술이었던 것이 모래처럼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로키의 머리를 들고 있던 기계 팔이 좌우로 살짝 움직였다.
안에 남아 있던 가루 같은 것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로키는 변하지 않았네.
체시가 말했다.
가하란은 누운 채 미동조차 없는 줄리어스를 바라봤다. 기계 팔이 줄리어스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 복사품을 이어받은 인간은 자기 욕망에 충실했어. 변한 거지. 어쩌면 당연해. 정신은 육체에 지배를 받으니까. 그런데 로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인 채로 죽었어. 이건 우수한 걸까, 미련한 걸까?
가하란은 외력을 몸에 둘렀다.
폭발적으로 난동을 치던 힘이 안정화됐다. 지금이라면 위상을 정리하고 외부와 연결할 수 있을 터였다.
-난폭하구나.
“구경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래. 넌 너의 일을 해야겠지. 하지만 잠깐 기다려.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
콰가강!
땅을 뚫고 수백 개의 기계 팔이 솟구쳐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