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마차가 떠나간다.
가하란은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버섯들을 떼어내며 마차를 쫓아갔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또다시 버섯과 꽃이 화목하게 모여 있는, 맛있는 차와 과자가 가득한 집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차와 과자. 나쁘지 않잖아? 숨 가쁘게 살아왔는데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강력한 유혹에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갔다. 아기자기한 웃음소리에 휘말리면 이 엉뚱한 세상에 복속될 것이다. 차와 과자가 가득한 집에서 공주님을 바라보며 하하 호호…….
“잠깐만 얘기 좀 해!”
가하란은 힘차게 굴러가는 마차 바퀴를 향해 외력을 뿌렸다. 한쪽 바퀴가 끼긱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끌리기 시작했다.
날개 달린 말들이 투레질하며 멈춰 섰다. 마차에 탄 아이가 울먹이며 달리라고 외쳤다.
“왜 그러는 건데? 난 공주인데.”
마차로 다가가 아이를 바라봤다. 대관식용 지팡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아까 한 말은 미안해. 내가 착각했어. 넌 공주가 맞아.”
“그, 그렇지?”
“그럼요, 공주님.”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성난 표정으로 따라오던 버섯과 꽃, 그 밖의 다양한 식물이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야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잘 벼려진 검보다 주변을 둘러싼 작은 식물들이 더 위험해 보였다. 칼에 찔리면 정신이 번쩍 들겠으나, 식물한테 붙들리면 바보가 돼 끝없이 과자만 먹게 되리라.
“여긴 황금 왕국인 거죠?”
동화 속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물었다.
“맞아. 황금 왕국이야. 내가 여기 공주고. 다들 날 좋아해. 다들 날 아끼고.”
아이가 창밖으로 몸을 빼 손을 흔들었다. 옹기종기 모여든 식물들은 물론, 도로를 끼고 배치된 온갖 사물이 들썩거렸다.
세상이 아이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가하란은 착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이 몸에서 시작된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무수한 점들이 아이와 연결돼 있었다.
“근데 공주는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운을 떼며 힘의 변화를 살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씩씩거렸다.
세계가 출렁거린다. 아이의 감정 변화에 따라 모든 게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가 모든 것의 중심이다.
“뭐라고?”
“아니에요, 착각했어요.”
가설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여긴 아이의 심상 세계였다. 어째서 아이가 바라는 모습으로 위상이 구현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유단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공주님.”
“왜?”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약속?”
갸우뚱거리던 아이가 도리질을 쳤다.
“안 돼. 전부 내 곁에 있어야 해. 난 공주니까 내 말을 들어.”
“알죠. 저도 공주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약속이라…….”
“너도 날 버리려는 거지? 또? 그런 거지? 난 다 알아. 거짓말만 하는 애들은 정말 싫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은하수가 드리워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별들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별들이 개의 형상을 취했다. 다양한 개들이 이빨을 내보이며 짖기 시작했다.
곤란했다. 상대의 힘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외부였다면 힘의 변화량과 마나의 이동으로 위력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불가능했다.
힘의 단위가 마나가 아닌 아이의 마음이니까.
“넌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나랑 같이 놀아.”
개들이 달려들었다.
왼쪽으로 피하면서 개의 뒷덜미를 잡아 반대편으로 던졌다. 날아가던 개가 공중에서 방향을 틀었다.
물리 법칙 따윈 상관없다는 듯 허공에서 추진력을 받아 달려든다.
가하란은 수십 마리의 개들을 상대했다. 몇 번 물리기도 했는데 아프지는 않았다.
잇몸으로 무는 느낌이었다.
주변에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갖 식물들이 개들을, 공주를 응원했다.
악당이 된 기분으로 개들을 계속 쳐냈다.
진전이 없는 싸움. 위험한 건 아니나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백염을 둘러 위협해 봐도 개들은 달려들 뿐이었다. 백염에 휩싸인 개는 빛무리로 변했다가 다시 개의 형상을 되찾았다.
죽일 수 없는 상대와 계속 싸워야 하는 건가?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유단의 마법이, 마법 공학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위험했다.
가하란은 아이를 바라봤다.
이곳은 아이의 심상 세계.
세상을 꾸며낸 저 아이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면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가 목을 움츠렸다. 겁에 질린 아이 주변으로 식물들이 몰려들었다.
“……그게 아니라.”
생각을 바꿔야 했다. 심상 세계가 손상되면 아이한테도 악영향이 가니까.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개를 떼어낸 후 길을 따라 뛰었다. 의족에 장착된 배터리가 마나를 분사했다. 몸이 붕 떠올라 단숨에 개들을 따돌렸다.
그렇게 몇 분을 뛰었을 때였다.
“다시 왔네?”
아이가 말했다.
분명 마을을 등지고 뛰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차와 식물들 앞이었다.
아이가 바라면 이루어지는 세계.
도망치는 건 일단 불가능해 보였다.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공주님. 절 내보내 주면 안 될까요?”
“왜 그렇게 가려고 해? 여기서 있어. 여기 좋은 곳이야.”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싫어!”
구슬리는 게 안 되면 협박을 해야 하나? 그러다 아이의 정신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개들이 달려와 온몸을 물었다. 여전히 통증은 거의 없었다. 아니, 이제는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아이의 심상 세계.
개들도 아이의 마음이 만들어낸 일부분일 것이다. 물어뜯어 죽이는 게 아니라 놀듯이 입질을 해 여기에 붙들어 두는 게 목적이겠지.
차라리 속 편하게 살인마의 심상 세계였다면 좋았을 텐데.
개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마차로 걸어갈 때였다. 오른손을 물고 있는 개한테 시선이 갔다.
털이 덥수룩하게 자라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노견인지 힘차게 몸을 흔드는 다른 개들과 달리 축 늘어져 있었다. 무는 것도 힘들다는 듯 잠깐 입질했다가 떨어져 헥헥거렸다.
큰 덩치. 길게 늘어진 혀. 빗자루처럼 땅을 쓰는 꼬리.
“……너.”
몸을 숙여 눈을 가린 털을 치워냈다. 세월이 내려앉은 눈동자가 보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활기차다 못해 방정맞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몸을 빼려는 개를 붙들고 얼굴을 살폈다. 틀림없다. 툴이다.
이름을 작게 불러봤으나 툴은 싫다는 듯 몸을 털 뿐이었다. 이곳은 아이가 만든 세계. 앞에 있는 개는 툴을 닮았을 뿐 툴이 아니다.
알고 있어도 반가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늙었어.”
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의 기억 속에 툴이 있다는 건, 툴과 접점이 있다는 뜻일까?
몸부림치던 개가 축 늘어졌다.
“툴을 알아?”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 곁에 서 있는 아이였다.
“알죠. 너무나도 잘 알아요.”
“루드에서 키우는 애야. 근데 종종 빠져나와서 나랑 놀아줬어. 눈이 나빠서 여기저기 부딪치는 일이 많지만.”
아이가 다가가자 툴이 반가워했다.
“난 얘가 좋아.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와 주거든. 얘랑 있으면 따뜻해.”
“더울 때도 달라붙어서 난감할 때가 있죠.”
“맞아! 근데 그래도 좋아. 혼자 있는 것보다는.”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나가고 싶어?”
“여기 있는 것도 좋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소원이야?”
우물쭈물 되묻는 아이였다. 가하란은 동화 속 공주를 떠올렸다.
“네. 소원이에요.”
아이가 바닥을 한 번, 그리고 들고 있는 대관식용 지팡이를 바라봤다.
“공주님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줘야 해. 빌로티에는 항상 그랬으니까. 그렇지?”
아이가 지팡이를 힘겹게 휘둘렀다.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길게 뻗어 있던 길 한복판에 울타리가 나타났다.
“돌아올 거지?”
“네. 일을 끝내면 찾아올게요.”
아이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가하란은 툴을 바라봤다. 훌쩍 늙어버린 개는 아이 옆에 딱 달라붙어 느리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툴하고 놀아줘서 고마워요.”
“당연하지! 공주는 모두와 즐겁게 지내야 하니까.”
가하란은 고갯짓으로 인사한 후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넘는 순간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익숙한 둔의 전경이 보였다.
뿌연 안개에 사로잡혀 있지만 구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모든 게 정지한 세상.
가하란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골목 구석에 웅크려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 손에는 커버만 남은 동화책이 쥐어져 있었다.
“금방 돌아올게.”
정지한 사람들을 지나치며 길을 걸었다. 시계탑 너머로 학회 건물이 보였다.
일직선으로 뻗은 인도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지독하게 밝은 빛이 보였다. 착안이 반응했다. 점들이 빛을 향해 응집되고 있었다.
감히 예측할 수 없는 힘이었다.
온전한 창조와 완전한 파괴, 방향성에 따라 무엇이든 가능해 보이는 힘이었다.
빛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지켜보는 게 좋을 거야.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기계 팔이 나타났다. 팔은 빛무리 안에 있는 유단을 가리켰다.
“저건 로키일 테고, 넌 체시?”
-카트시가 아무런 준비 없이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그게 너일 거라고는 로키도 예상하진 못했지만.
“나에 대해 알고 있어?”
-알지. 로키는 인간이 된 이후로 모든 걸 활자로 남겨두고 있거든. 그 안에 너에 관한 것도 있었어. 치부를 알고 있을 유일한 인간. 로키이기 이전에 유단이었던 ‘것’이 널 어떻게 평가했는지도 알고 있어. 꿈을 좇는 머저리.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가하란은 외력을 두른 팔로 백염을 뽑아냈다.
로키가 모으고 있는 힘은 아직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를 잉태하기 직전의 상태.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얌전히 있는 걸 추천할게.
“뭘 믿고?”
-믿음은 중요하지. 그리고 너라면 내가 준 정보에서 믿음을 찾아낼 수 있을 테고.
기계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눈앞에 작은 책이 나타났다.
-봐봐. 머리가 터져버릴 수도 있지만.
책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성질은 비트와 닮아 있었다. 옅은 비트의 줄기가 책에 닿아 있는 걸 확인했다.
-유단이 만든 거야. 내가 보이지 않는 정보의 물결 안에서 그걸 찾아냈다고 하네. 아, 이 말도 전해달라고 했어.
사라진 위상 안에서 우린 잠깐이나마 친구였지? 체시가 말했다.
-로키는 뭔가 본 것 같았어. 난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
비트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비록 소멸했다고는 하나 또 다른 위상에서 생성된 정보들도 비트에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그걸 획득했다는 건가?
“집념은 여전하네.”
가하란은 책을 잡았다.
머릿속으로 정보가 밀려들었다. 방대한 양이었으나 소화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 맞아? 뇌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체시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가하란은 책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닿은 책이 녹아서 사라졌다.
로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됐다. 로키는 말하고 있었다. 이걸 방해하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이해했지? 파괴하고 싶으면 조금 이따가 해. 지금 건드리면 모든 게 끝이야. 문자 그대로 끝. 둔은 물론이고 반경 100km는 아주 깨끗하게 사라질 테지.
가하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로키가 발견한 ‘작은 알맹이’는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즐겁게 관람해. 마법 공학의 역사를 다시 쓸, 아니 마법과 마법 공학의 신기원이 될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으니까.
가하란은 빛무리 안에 서 있는 로키를, 그 손에 모여들고 있는 알갱이를 바라봤다.
없음과 있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중첩 상태.
창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