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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48화 (548/558)

제548화

후우, 입 안에서 깔딱대는 숨을 정리하고 허리를 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칼리고의 등이 보였다.

윤은 침을 삼킨 후 크게 외쳤다.

“같이 좀 가요!”

“미스터 리, 지금도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겁니다. 아시잖아요?”

“아니요, 전혀 모르겠어요. 이 몸이 늙지 않는다고 해서 지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러게 훈련을 받으라니까. 구치 씨만 봐도 죽을 듯이 구르니까 나날이 발전하잖아요. 미스터 리도 할 수 있어요.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좀 봐줄까요? 예전에 우리 애들 관리하던 때로 돌아가면 나름 재미있을 거 같은데.”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희번덕이는 눈동자였다. 윤은 진저리를 쳤다.

“전 슈퍼맨 같은 거에 관심 없어요.”

“슈퍼맨? 아! 그때 설명해 준 가상의 사람이군요.”

칼리고가 다가오더니 앞에 주저앉았다.

“업혀요. 랜더 씨와 구치 씨는 한참 전에 도착했을 겁니다. 재미난 일이 벌어질 텐데 그걸 놓칠 순 없죠.”

윤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돔’을 가리켰다. 생긴 게 꼭 잠실 실내 체육관 같다고 생각하면서.

“저게 멀쩡한 걸 보면 칼리고 씨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네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칼리고에게 업혔다.

“저질 체력으로 랜더 씨와 용케 여행을 다녔군요.”

“랜더 씨는 이해심이 많으니까요. 누구처럼 닦달하지도 않고. 또 여유를 갖고 하늘을 구경할 줄도 아는……!”

중간에 입을 꾹 닫아야 했다. 꺾일 뻔한 허리에 힘을 주고 칼리고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리고가 지면을 찰 때마다 매서운 소리가 났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 도로에 진입하면 이런 느낌일까.

“처, 처, 천천히!”

“뭐라고요?”

다 들었으면서 모른 척하기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공기 저항을 최대로 줄이는 게 살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도가 줄어들었다. 윤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군요.”

칼리고가 멈춰 섰다. 윤은 앞을 바라봤다. 탁 트인 평야를 가로지르는 마수들이 보였다.

뿔뿔이 흩어져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것들이 왜 뭉쳐 있었을까요?”

“글쎄요.”

땅으로 내려왔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정리했다. 신체술 사용자들은 일반인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칼리고는 잘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 거겠지.

“혹시 모르니 좀 천천히 가죠.”

칼리고가 검을 뽑아 들고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아, 랜더 씨와 함께한 여행은 즐거웠나요?”

“나름 괜찮았어요. 랜더 씨는 들어주는 걸 잘하는 사람이라 얘기하는 맛이 있죠.”

“들어주는 걸 잘한다고요? 그럴 리가요! 내가 입을 열려고만 하면 눈치 보면서 슬쩍 도망치는 양반인데.”

“그건 댁이 워낙 시끄러우니까 그렇죠.”

“그쪽도 만만치 않을 텐데.”

윤은 무슨 소리냐는 뜻의 코웃음을 쳤다.

“칼리고 씨는 기관총, 전 리볼버.”

“또,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를 하시는군요. 하지만 뉘앙스만으로 대충 이해는 됩니다.”

정면으로 달려들던 작은 마수 한 마리가 방향을 홱 틀더니 나무를 타고 사라졌다.

“겁에 잔뜩 질린 것처럼 보이는군요.”

“랜더 씨의 영향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가보면 알겠죠.”

칼리고를 따라 움직일 때였다.

저 멀리 보이는 회색 돔이 크게 출렁이더니, 이내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에헤이! 랜더 씨, 성질도 급하셔라.”

빨리 오라고 재촉하며 달려 나가는 칼리고였다. 윤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허벅지에 힘을 줬다.

“같이 좀 갑시다!”

* * *

가하란은 갈라진 장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뿌연 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길목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몽롱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옆에서 파삭 소리가 났다. 랜더가 쥐고 있던 검이 바짝 마른 모래처럼 변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초월적인 마나를 견뎌낼 수 있는 물건은 세상에 몇 없을 테니까.

모래로 변한 검을 바라보던 랜더가 장막 너머로 손을 넣었다.

위험하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위험이란 개념은 상대적이니까. 아마 랜더에게 위험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볼 수는 있지만 여전히 들어갈 수는 없는 것 같은데.”

장막을 통과한 랜더의 손이 사라졌다. 아마 반구체 반대편에 비죽 튀어나와 있을 것이다.

가하란은 랜더의 시선을 받았다. 이제 무엇을 해볼까,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방금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신 건지…….”

“필요하다고 생각한 만큼. 감각적인 거라 따로 설명하기가 어렵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이상 쓰면 저 안쪽에도 영향이 갈 거란 점이지.”

여분의 힘이 더 있다는 게 놀라웠다. 표면이라고는 하나 위상에 손상을 줬다.

운명을 되찾아 온 사람. 설명으로 들었을 땐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측정할 수 없는 힘.

착안으로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 힘의 파동이 둔을 덮친다면…… 랜더의 말대로 위상 자체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치우는 건 쉽게 할 수 있지. 하지만 고치는 건 내 분야가 아니야.”

지금부터는 네 몫이라는 듯 랜더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하란은 갈라진 장막 사이를 바라봤다. 고정된 사람들. 반복된 위상과 달리 여긴 멈춰버린 걸까?

안으로 들어가 봐야 실체를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위상을 넘을 수 있는 건.

“올. 위상 균열을 준비해 줘.”

-알겠어요.

하늘석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랜더도 변화를 느꼈는지 하늘석을 바라봤다.

“땅에 내려앉은 하늘석이라.”

랜더가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림도 그리는 것 같았다. 무얼 기록 중인지, 왜 기록하는 것인지 궁금해 가만히 쳐다볼 때였다.

랜더가 입술 끝을 살짝 끌어 올렸다.

“이야깃거리를 수집하는 중이야. 나중에 전해줘야 할 사람이 있거든.”

온화한 눈웃음이었다. 가하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특이한 경험을 몇 개 했는데 원하신다면 말해 주겠다고.

“나야 고맙지. 그 사람은 특이한 걸 좋아하니까.”

짧은 대화가 끝나갈 때쯤 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끝났어요.

“그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갈라진 틈 사이에 경계면을 생성할 거야.”

-네. 힘의 충돌이 일어난 지점에 경계면을 활성화할게요.

주황색 비트가 생겨났다. 틈 사이로 갈라짐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가하란은 비트와 장막이 맞닿은 부분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경계면이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좌표가 고정됐어요. 둔 안쪽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이 상태라면 다른 곳에 연결돼 있다고 해도 가하란을 복귀시킬 수 있어요.

“좋아.”

외력을 손에 둘렀다. 백염의 힘도 같이 끌어냈다. 살며시 비트 위에 손을 올렸다.

해석할 수 없는 자료들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난잡한 소리의 파도 속에서 가하란은 정신을 붙잡았다.

비트와 닿아 있는 손을 바라봤다.

아찔한 통증은 여전하지만 손이 타들어 가지는 않았다. 외력과 백염이 훌륭하게 손을 보호하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 뭔가 있구나.”

랜더가 비트가 있는 곳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혹시 협회장이라면 경계면을 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여기가 경계면이에요. 위상을 넘어갈 수 있는 출입구죠.”

랜더가 반짝이는 경계면 앞에 섰다.

“이곳을 통과하면 ‘틈’을 오갈 수 있는 거구나.”

“예. 한번 손을 넣어 보시겠어요?”

랜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경계면을 넘은 랜더의 손이 흐릿해졌다.

인지를 초월한 자도 안 되는 걸까.

“독특한 느낌이네. 내가 갈 수는 있겠지만…….”

랜더의 손이 점차 선명해졌다.

통과할 수 있는 걸까?

기대감에 차 바라볼 때였다. 경계면 주변에 불꽃이 튀었다. 곧게 이어지던 비트가 살짝 일그러지더니, 경계면 안쪽의 검은 공간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랜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뺐다.

“내가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경계면이란 게 부서질 것 같구나.”

“…….”

착안으로 똑똑히 보았다. 랜더의 팔을 기점으로 시작되던 힘의 파동을.

위상 간에는 물리적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한정적인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이론이었지만 반증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짓 한 번에 이론이 붕괴하다니.

괜스레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혼자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안쪽 상황을 확인해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올 겁니다.”

이 너머에 유단과 체시가 있다.

가설대로 유단이 무에서 유를 창조 중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중단시켜야 했다.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니까.

“바깥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여긴 걱정하지 말고.”

가하란은 남동쪽을 바라봤다. 누나가 이 소식을 듣게 되면 화를 내겠지. 곁에 있었다면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처지가 바뀌었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숨을 고르고 경계면을 넘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반겨줬다.

가하란은 비트를 구명줄 삼아 반대쪽 경계면으로 향했다. 손을 자극하는 통증이 강렬해질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반대쪽 입구에 도착했다.

다행히 입구는 지상에 고정돼 있었다. 복귀했을 때처럼 허공에 있었다면 골치 아팠을 것이다.

경계면 너머로 몸을 완전히 뺐다.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반짝이는 경계면이 사라졌다.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밤하늘이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은하수를 따라 날개 돋친 말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날개 돋친 말?

말 뒤에는 커다란 황금 마차가 달려 있었다.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릎까지 오는 버섯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눈, 코, 입이 달린 버섯들은 경계심 없이 다가와 같이 놀자고 속삭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섯들이 초대한 집에 앉아 있었다.

내가 뭘…….

“자자!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이것도 먹어봐.”

“이 과일 주스는 어때?”

“먹고 난 뒤에는 신나는 놀이가 기다리고 있어!”

꽃들도 다가와 까르르 웃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실없는 웃음이 계속 나왔다. 정겹고 즐거웠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뭐 어떤가?

여긴 즐겁고 행복한데.

“공주님이 오셨어!”

버섯과 꽃, 나뭇잎들이 우르르 뛰어나갔다. 나무 밑동을 닮은 집들이 들어찬 마을. 그 마을을 황금 마차가 가로질렀다.

마차 안에서 귀여운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대관식용 지팡이를 쥔 여자아이는 이렇게 외쳤다.

“다들 내 성으로 놀러 와! 맛있는 걸 준비해 놨어!”

공주의 마차를 보며 온갖 식물들이 외쳤다.

“빌로티에 공주님 만세!”

가하란도 헤벌쭉 웃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만세! 빌로티에 공주님 만세! 빌로티에…….”

잠깐만.

뇌가 일을 시작했다. 어릴 적 제니가 보던 동화책이 하나 있었다. 닳고 닳은 책. 골목의 여자애들끼리 돌려보던 책.

빌로티에라는 은발의 공주가 주인공인 동화였다.

가하란은 마차를 바라봤다.

거기에 앉아 있는 건 갈색 곱슬머리를 한 여자아이였다.

실실 웃던 웃음을 던지고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저지하는 식물은 없었다.

마차 창문을 통해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넌 빌로티에가 아니잖아.”

여자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지팡이를 흔들었다.

“싫어! 난 공주 할 거야!”

그와 동시에 주변 식물들이 시뻘게진 눈을 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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